• 껍데기 우익 아닌,
    친일 하지 않았던 우익들
    [책소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김건우/ 느티나무책방)
        2017년 04월 22일 10: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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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건국된’ 나라로 좁히려는 세력의 시도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1919년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국가라는 게 다수의 생각이다. 대한민국을 이야기할 때 3.1 정신과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 이야기에 정면으로 친일 문제가 걸려 있고, 또 한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지 않았을 때 모두가 바라던 국가의 설계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그리고 이후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만든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고, 그들의 설계는 주로 어디에서 연유했으며, 또 얼마만큼 현실에서 실현되었을까. 이 책의 기본적인 질문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말하려면, 간과하기 쉽지만, 당연한 전제 조건이 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를 자부하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시기에 남북 분단이라는 예기치 못한 불행을 엄연한 현실로 맞닥뜨린 만큼, 하나는 일제에 부역한 사실이 없거나 그 사실을 철저히 참회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도 일정 정도 이상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친일을 하지 않은 우익’이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의 조건이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지금까지 한국 현대사는 남북 대결의 와중에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친일 세력이 우파의 정체성을 실질적으로 독점해 왔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우파가 이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들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계획하고 실행한 실질적 주체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 현대사의 근대적 전환기를 이룩한 1960~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헌들과 연구들을 참조해 가면서, 이 시기에 정부 정책을 주도한 이들과 민주화 진영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모두 이념적으로는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들이 바로 ‘친일을 하지 않은 우익’, 즉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었던 것이다.

    대전대학교 김건우 교수는 스무 해 가까운 연구를 통해 친일에 물들지 않았으면서 북한 공산주의 정권과도 거리가 있는 ‘양심적’ 우익의 실체를 추적하고, 이들이 대한민국의 발전과정에서 했던 일들을 구체적으로 탐구해 왔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한국 현대 지성사와 문학사에 관련하여 꾸준히 축적해 온 그동안의 연구 업적을 집대성한 저작으로, 이 저작을 통해서 우리는 이른바 ‘학병세대’를 가운데에 놓고 치열하게 전개된 한국 현대사의 뚜렷한 줄기가 한국 우익의 진짜 기원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학병세대’는 왜 중요한가. ‘학병세대’는 주로 1920년 전후 다섯 해 정도에 출생한 이들로, 실제로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이라고 할 만하다. 이름만 들어봐도 쟁쟁하다.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백낙준,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 김수환, 지학순, 조지훈, 김수영 등이 여기에 속하며, 이들의 사상적 선배로는 이들 ‘진짜 우익’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 등이 있고, 그 후배들로는 천관우, 이기백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선배 세대인 이승만, 장면, 박정희 등과 달리 친일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고, 또한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주로 이북 출신으로 남쪽을 택한 사람들이기에 반공 문제에서도 의혹이 없었다. 실제로 이들은 정치, 언론, 교육, 종교, 학술, 사상 각계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이들이기도 했다.

    해방기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주체를 세울 때, ‘친일’ 여부 문제는 대단히 중요했다. ‘민족에 반역하고 친일을 했던 이들에게는 새 나라의 주체가 될 자격이 없다’는 공감대가 당시에 있었다. 다만,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했기에 나라 만들기의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도 ‘몸을 더럽히지 않은’ 이들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학병세대’가 시대의 중심에 등장했다. 일제 말 전쟁에 동원되어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전쟁터로 끌려갔던 사람들, 제국 최고의 고등교육을 이수했지만 친일 전력이 없는 이들이 새로운 나라 만들기 과정에서 중심세력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들은 제국 일본의 교육을 정점까지 받은 엘리트 집단이어서 정치경제적 근대화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한국 현대사에서 불변의 상수에 해당하는 미국 정부와도 사이가 아주 좋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구 지향의 세계주의자였고,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있었다. 4.19혁명과 5.16 쿠데타 이후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이들은 때때로 정치 현실에 참여하여 박정희 주도 세력과 뜻을 같이하기도 했지만, 그 친일적 뿌리에 대해서는 생래적 반감과 꾸준한 의혹을 품었다.

    아울러 이들은 ‘제헌 헌법’에 구현되어 있는 상해 임시정부의 중도적 이념에 동감을 표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그려 낸 산업화의 밑그림을 박정희 정권에 제공했으며, 한국적 특수성을 내세워 정치사회적 자유를 억압하는 군사독재 정권과 치열하게 싸웠다.

    이들 ‘진보 우익’이야말로 정통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었다. 《사상계》의 장준하와 《동아일보》의 천관우와 《조선일보》의 선우휘가 모두 여기에 속했고, 보수적 지사 조지훈과 자유의 화신 김수영이 이 그룹에서는 하나였다. 연세대학교의 백낙준이 이들을 후원했으며, 탈출한 학병이자 《사상계》의 주필을 역임한 고려대학교의 김준엽은 이들의 화신과 같았다.

    학병세대는 극우적 국가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자신들과 입장이 같지 않으면 모두 용공좌파로 내모는 ‘우익의 사칭자들’과는 그 뿌리가 달랐고, 근대 국가에 대한 그림도 달랐다. 이들은 산업만의 근대화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총체적 근대화를 꿈꾸었다. 정치적 근대화로서의 민주화, 경제적 근대화로서의 산업화, 문화적 근대화로서의 새 문화 창조가 이들의 구상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도달한 지점을 보면, 이들이 꿈꾸었던 나라를 향해 대한민국이 분명히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차 자료를 뒤지면서 오랜 연구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통 설계자를 밝혀낸 이 책의 소중함은 여기에 있다.

    필자는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해방 후 제도권 정치의 역사에서 중도노선 정당조차도 살아남은 적이 없다. 우익과 보수를 가장한 ‘극우 정치세력’과 그냥 ‘우익들’ 간의 이합집산과 대립의 정치사였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와 정책을 말하면서 보수 우익 일부에서 지은 ‘좌우 프레임’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을 듯하다. 이념적 스펙트럼은 넓고 우익도 마찬가지이다. 해방 후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 세력은 ‘우익’을 독점하려 했다. 그것이 자신들이 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좌우 프레임’으로 득을 보는 이는 누구인지 따져 보아야 할 이유도 이런 역사에 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한국 우익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로 읽었기를 바란다. 자신들의 입장과 같은 극우적 국가주의 아니면 모두 좌파로 내모는 오늘날 우익을 사칭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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