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 정당성의 위기와
'현실주의 전략'의 착오
[진보정치 공동연재1-3] ‘긴’ 후기 87년체제와 진보정치의 위기
    2017년 04월 20일 08: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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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레디앙, 민플러스 공동연재 글이다. 촛불운동과 박근혜 파면을 거치며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대안체제를 앞장서서 주장해온 진보정치는 불신의 장벽에 갇혀 연대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향후 진보정치운동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냉정한 분석과 평가, 소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진보정치를 연구했거나 진보정당에서 활동한 세 명의 1기 진보정치의 평가와 제언을 6차례에 걸쳐 싣는다. – 글쓴이(정경윤, 김상철, 손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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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분열보다 무능이 더 문제’ 링크

시대가 변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시대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으나 여전히 우리의 힘은 낡은 시대의 끝자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총선과 촛불시위, 대통령 파면국면에서 드러난 민심은 지금의 체제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줬지만, 그래서 어디로 갈 것이냐는 질문은 여전한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동안 진보정치는 그 자신이 가진 역량 이상으로 한국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정치구조 왼편에서의 위협으로 기성 정당이 개혁적인 정책을 내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하는 ‘급진세력의 측면효과’를 만들었다. 2008년 촛불 뒤 민주당의 좌클릭은 물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정부의 개혁적인 공약 역시 이런 결과로 나온 것이다. 지난 대선 이후 한국 사회의 노골적인 퇴행과 야당의 보수화는 진보정치의 주변화와 고립이라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합의된 결론은 없다. 정경윤과 김상철의 글에 이은 이 연재의 의도는 단지 ‘듣기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토론과 논쟁을 진지하게 시작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진보정치의 위기 배경과 원인을 진보정치에 참여한 개인이나 집단의 내적 심리상태가 아니라 체제의 성격 변화와 진보정치의 대응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87년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 모습

87년체제와 진보정치의 관계구조

오늘날 진보정치가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1987년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87년 체제는 ‘항쟁’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계기로 최소한 세 가지 요소들이 변화하면서 만들어 낸 앙상블이다.

첫째, 독재 체제에서 자유주의적 대의질서가 ‘제한적으로만’ 복원되었다. 결선투표제 없는 대통령 선거는 둘째 치고서라도 각종 정치관계법과 선거법은 신진 세력의 의회 진출을 가로막았다. 소선거구제에 기초한 단순다수대표제가 만들어 낸 정당의 득표수와 의석수 간의 불비례성은 지금도 항상 반복되는 문제다.

둘째,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개발독재 체제에서 시장권력이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했다. 많은 이들이 한국 사회 신자유주의화의 기점을 1997년 말 외환위기로 보기도 하지만, 그 변화는 87년 체제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 레이건 독트린과 워싱턴 컨센서스 등에서 예고된 제3세계의 신자유주의화 프로그램은 노태우 정권의 체제 과도기를 거쳐 김영삼 정부에서 ‘세계화’를 천명하면서 전면화 될 채비를 이미 갖추었다. 외환위기는 이데올로기 수준의 전면화를 촉진시켜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로의 전환 과정에서 예상되는 민중적 저항을 손쉽게 돌파하게 만든 촉진변수다.

셋째, 분단 체제의 이완이다. 물론 분단 체제는 1953년 이후 견고하게 유지되어 온 시스템이지만, 1987년 이후 그동안 4.19혁명과 5.18항쟁 등 일시적 해방공간에서만 분출되었던 저항공간이 일상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87년 체제 하의 분단 체제는 그 내부에 균열과 이완의 가능성을 담지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 87년 체제는 이에 상응하는 세력관계를 구조화했다. 정치·경제적 지배세력이 세 요소의 한 축을 담당했다면, 반대쪽에는 저항세력이 포진했다. 6월 항쟁에 뒤이어 전개된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1988년 남북 청년학생회담을 위한 전대협의 통일운동, 1989년 문익환, 임수경, 서경원 의원 등의 방북으로 촉발된 민간통일운동은 ‘저항을 동반한 민주화’의 이행기를 열었다. 이들은 ‘제한적 민주화’의 한계로 인해 제도정치 영역으로 침투하지는 못했지만, 강력하고 혁명적인 사회운동세력으로 성장했다.

민주노동당의 실험: 체제 내부에서 체제를 넘어서기

87년 체제의 성립과 함께 수면 위로 등장한 진보세력은 87년 체제 초기부터 체제를 거부하는 저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핵심은 분단 체제와 자본주의라는 양대 시스템에 대한 저항과 거부였고, NL과 PD적 경향이라는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다. NL적 경향은 주로 최소한의 적과 최대한의 연대를 추구했고, PD적 경향은 계급적 적대를 우선시했다. 이런 시각 차이는 전략적·전술적 통일전선의 구성 세력 문제, 이중전선 문제, 민족자본가 문제, 합법정당에 대한 시각 차이, 제도야당과의 동맹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이어졌다.

각 진영의 초기 프레임은 오랫동안 진보세력의 정체성을 규정했지만,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진보운동세력은 노태우 정권의 과도기를 거쳐 체제가 공고화됨에 따라 정치세력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것은 ‘체제의 외부’에서 체제에 도전하는 방식에서 ‘체제 내부’에 들어가 체제에 변형하는 전략으로의 수정이었다. 알다시피, 이 도전과 실험이 빛을 본 것은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2004년 원내진출 성공이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 17대 총선에서 ‘드디어’ 원내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가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제146조 제2항을 위헌 확인해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부터 광역의회의원 중 비례대표 시·도의원에 대한 정당투표가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여전히 정치 체제는 제한적 성격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조그마한 출로는 열었다.

그러나 정치 체제가 조금 개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원내진출을 성공케 한 가장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다. 민주노동당 이외에 17대 총선에 도전한 진보·개혁적 정당인 희망2080, 녹색사민당, 사회당은 모두 1%도 득표하지 못하고 해산됐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13.03% 득표로 지역구 2석을 포함 총 10석을 얻었다. 왜일까? 민주노동당은 이질적인 진보세력들이 분열의 90년대를 넘어 결집한, 연합전선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진보정치운동사적 측면에서 민주노동당은 기존의 변혁적 운동에 비해 급진성이 약화, 혹은 완화된 것이었지만, 한국 정당 체제에서 볼 때는 대단히 혁신적이며 대항적인 정당이 출현한 것이었다. 그들은 선거참여를 계기로 체제에 흡수되지 않도록 여러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진성당원제를 토대로 당원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했고, 운동 방식의 당활동을 전개했다. 물론 운동방식의 당활동은 소수정당의 한계로 인해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원내진출 이후에도 ‘거대한 소수 전략’으로 알려진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결합을 추구했으며 현실정치로의 유인력을 저지하기 위해 공직당직 겸직금지나 공직자의 특별당비 등 다양한 장치를 꼼꼼하게 달아 놓았다.

그러나 ‘운동에서 정치로의 전환’은 운동영역에서 존재하던 갈등 구조를 정당 내부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기도 했다. 초기 갈등을 봉합했던 ‘진보세력의 정치세력화’라는 공동목표가 원내진출로 인해 어느 정도 해소되자, 이전의 갈등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당의 리더십은 1차 목표의 성공 이후 내적 갈등을 해소할 새로운 목표와 리더십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과거의 감정적 적대를 재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당원 직접민주주의? 이상하게도, 수많은 갈등의 와중에 그 자랑스러운 ‘당원 직접민주주의’는 한 번도 제대로 작동한 바 없다. 예외라면 2005년 1차 중앙위원회를 앞두고 ‘기관지위원장 사퇴 권고결의안’이 360명의 당원 연서명으로 제출된 것이지만, 그 사퇴 권고안조차 2005년 7월 2일 3차 중앙위원회에서 찬성 145표, 반대 160표로 부결됐다.

당의 내부는 오히려 87년 체제의 모습처럼, 정파를 중심으로 한 제한적인 대의제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물론 여전히 보스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 정당질서를 고수하고 있었던 기성정당에 비해서는 민주화된 내부질서였지만, 일반당원이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는 그런 시스템을 현실화한 수준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어떤 전문가는 민주노동당이 ‘과도한 내부 민주주의 때문에 분열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과연 그런가?

어쨌거나, 원내진출 이후 새로운 공동 목표의 부재와 정파관계에 묶여버린 리더십의 결과는 당내 엘리트들이 당을 쪼갠, 2008년 분당이었다.

후기 87년체제의 등장과 진보정치의 전략 변화

2008년 분당이 진보정당의 역량을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진보정치의 위기와 관련해 더 중요한 사실은 2008년부터 시작된 체제의 성격 변화와 이에 대한 진보세력의 대응이다. 2008년 거대한 촛불의 출현은 단지 당시 정권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는 의미로만 머물지 않는다. 정경유착으로 상징되는 독재적 경제 체제가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 했으나 연속적인 금융위기로 그 실체를 드러냈고, 낡은 권력의 숨줄을 이어준 분단 체제 역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으로 뿌리째 흔들렸다.

민중을 일찌감치 ‘개와 돼지’로 보았던 견고한 대의 체제도 ‘진정한 주권이란 무엇인가’를 되물은 거대한 촛불의 힘 앞에 흔들렸다. 2008년을 전후해 우리를 규정했던 사회적 틀들이 거대한 민중의 출현과 함께 ‘낡았다’는 의심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요구한 징후였다.

‘후기 87년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후기 87년 체제는 체제의 정당성이 약화되면서 대안 체제로의 이행이 요구되지만, 아직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혼란과 각축이 일어나는 시기다. 이 시기는 새로운 체제를 향한 힘과 구체로의 퇴행을 향한 힘, 현상유지를 위한 힘들 간의 다양한 각축을 특징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보수적 퇴행의 힘과 민주당의 좌클릭을 강제한 진보적 힘 간의 각축은 후기 87년 체제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각축은 촛불의 패배와 보수정권의 재집권, 그리고 무엇보다 진보정치의 자멸적 파국으로 인해 아주 ‘긴’ 후기 87년 체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2008년 촛불의 패배는 아직 분당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진보정당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촛불시위가 정점에 오른 2008년 6월 10일 이른바 ‘명박산성’ 앞에서 진행된 10시간의 지지부진한 토론은 진보세력의 머릿속에서만 남아 있던 오랜 전략, 즉 국가권력을 민중의 힘으로 포위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전략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

인정하긴 어렵겠지만, 이것은 현실정치로의 급속한 전환을 제어했던 핵심적인 안전장치 중 하나가 끊어져 버린 결과를 낳았다. 이후 야권을 비롯한 진보정치는 ‘선거연합’으로 상징화된 야권연대로 빨려 들어갔고, 꽤 성과도 있었다. 2008년 교육감 선거에서 확인된 ‘야권연대’의 가능성은 2009년 4월, 10월의 재보궐선거를 거쳐 2010년 지방선거에서 지역 차원의 공동정부 전술로 효과가 확인되었다. 더 나아가 2011년 4.27 재보선과 10.26 재보선에서 민주노동당은 민주당과 공동선거운동본부를 꾸리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물론 선거연대나 공동정부, 공동선대본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달콤한 성과는 우리 안의 욕망과 조우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민주당과의 공동선대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선거운동 방식, 전략 등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재보선에 나간 당의 색깔이 공동선대본이라는 명분으로 민주당의 색깔로 바뀌었으며, 민주당의 지역 조직 운영 방식, 지역 핵심 인사와의 연계망, 후보 홍보 방식, 여론조사에 대한 대응 노하우 등 기성정치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선거 기술을 전수받았다.

야권연대

수많은 정치이론은 어떤 정치세력이라도 정당 간 경쟁, 선거 참여, 의회진출 등 점차 ‘현실정치’에 치중하게 되면, 기존 제도의 관행을 변형하는 대신 자신들의 주장이나 전술을 제도화된 관행에 맞춰 변경하는 ‘자기 변형’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정치를 수용함으로써 얻어진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기존의 운동적 방식보다 목표 달성에 효과적이기 때문에 탈동원화가 시작되며, ‘이데올로기’ 보다는 ‘실리적인 정치’가 급격하게 우위를 차지한다.

이런 경향은 통합진보당의 창당으로 이어졌다. 오해는 말라. 어떤 세력과 손을 잡았다고, 어떻게 강령을 개정했다고,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과정은 무너지는 체제에 대한 대항적 성격을 강화한 형태가 아니라 상층 중심의 논쟁과 갈등, 실리적 각축으로 전개되었다. 진보대통합의 제기부터 협상, 방침 확정과 합의안 의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일반 당원은 제대로 된 정보를 받지 못했고, ‘아래로부터의 진보대통합 운동’으로 제안된 사업도 ‘선언 운동’ 형식의 당원 동원 방식이었을 뿐, 평당원에게 어떤 결정 권한을 부여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2012년 총선 이후 통합진보당 내에서 벌어진 잔인한 내부 갈등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과 분석을 필요로 한다. 매우 고통스럽겠지만, 이에 대한 평가 역시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 사건을 어느 집단만의 잘못으로 이해하는 한, 자기 외부에서만 문제의 원인을 찾는 한, 위기를 벗어날 어떤 시사점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우선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창당부터 부정경선 시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압도하고 있었던 실리주의적 정치경향이다. 이념적 유토피아의 체계적 제거는 진보정치운동 주체의 자부심을 실리적 욕망으로 대체함으로써 치열한 내부 적대 과정에서 냉소와 조롱의 감정을 풍부하게 생산했음은 물론, 사태의 종결 이후에도 정당 해산까지 불러온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여전히 능동적 활성화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던 대중과 진보정치운동 간의 접합지점을 제거했다.

정당성 잃은 체제에 순응하려 했던 착오

정치적 실리만을 중심에 놓고 보면, 체제 순응적인 전략이 반드시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체제의 정당성과 안정성이 높아지던 시기가 아니라, 체제의 정당성이 흔들린 후기 87년 체제에 진행되었다는 것은 전략 착오다.

만일 2008년 이후 체제의 정당성이 취약해진 시기에, 2008년 이전 민주노동당의 경험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2008년 촛불이 요구했던 대안 체제의 모습을 자기부터 먼저 실현해 보였다면 어땠을까? 최소한,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이 엉뚱한 곳으로 향해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이상을 제거한 진보정치가 계속 진보할 수는 있는 것일까?

한국의 진보정치는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치열한 논쟁도 벌여보지 못한 채 끝없는 갈등 속에 마지막 남은 에너지마저 소진하고 있다. 문제는 낡은 것이 시대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역시 낡았다. 낡은 시대와 맞서 싸우다 함께 늙어가는 노병사의 모습이 현재의 진보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 속에서 과거 새로운 시대를 향해 뛰던 젊은 날의 진보정치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하는 열정은 이 바닥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개와 돼지’ 취급을 받던 민중은 곳곳에서 힘겹게 살아남아 대통령을 파면했으며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고 있다. 기성 정치구도의 균열은 여전히 진보정치의 공간이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다. 아직 구체적 실체가 잡히지는 않았고 엉뚱한 대상에게 새로움의 열망이 투영되고 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이제 갈등보다는 진지한 논쟁을 시작할 때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끝>

손우정/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민간싱크탱크에서 일하다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소에서도 잠시 일했다. 지금은 시민사회를 다시 활성화할 여러 사업을 하고 있으며 청년 진보정치인을 지원하기 위한 사업도 구상 중이다.

필자소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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