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과 친구들,
    19금 영화 본 걸 고백하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⑮]이순이
        2017년 04월 19일 10:52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광화문에서 704번을 타고 빈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딸은 내내 내 어깨에 머리를 묻고 잤다. 한산한 버스가 조금씩 차더니 불광역에서 콩나물시루가 됐다. 운전기사는 그만 타라 거듭 종용했다. 북한산성 입구에 내려 의상봉을 올랐다. 가파른 봉우리라 쉽지 않은 구간이었다. 딸애는 코를 훌쩍이며 손수건으로 닦고 휴지로 풀면서 의연하게 올랐다. 코감기에 걸렸다. 고등학교에 오르고선 잠이 부족해서인지 감기가 부쩍 잦았다.

    “아빠, 있잖아. 내가 어젠 아빠 말이 맞아서 할머니 편 안 들었는데, 앞으론 할머니가 실수해도 너무 심하게 뭐라 하지 마. 할머니가 안 됐어.”

    기특한 지적이었다. 토요일인 어제 6월 8일 낮이었다. 2층에서 딸과 함께 아점을 먹고 있었다. 할매가 청소하다 떨어뜨린 방충망을 달아 달라고 주문했다. 청소하다 또 빠진 거였다.

    “엄마, 왜 자꾸 방충망 건드려서 사고 날 일을 만들어. 청소하려면 미리 빼 달라고 하든지.”

    나는 잔소리를 했다. 그래도 빠진 데는 길가가 아니라 덜 위험했다. 방충망 달고선 길가 쪽으로 가 봤다. 예상대로 창밖 창살 구조물 위에 프라이팬이 놓여 있었다. 창살 구조물은 사람을 보호할 용도였다. 창살들 간격이 9센티미터가 넘어 물건을 함부로 올리면 불안했다. 한데도 할매는 프라이팬과 냄비 따위를 말린답시고 종종 올려놨다. 물건이 골목으로 떨어진 적이 몇 번 있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러면 할매는 한동안 올리지 않다가 잊을 만하면 또 올렸다. 어제가 그랬다. 난 씩씩대며 언성을 높였다.

    “길 가던 사람 머리라도 맞으면 죽을 수 있다고. 그러면 이 집 팔아서 갚아도 모자란다고. 하지 말라는데 왜 또 올렸어? 어”

    집은 내 아버지의 평생이었다. 중동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마련한 집이었다. 당신이 중풍으로 쓰러지던 날 아침이었다. 상태가 심각했다. 다급한 나는 119를 부르려고 전화기를 들었다. 당신은 한사코 만류했다. 혀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원비 많이 나올 거야. 그러면 집을 팔아야 할지도 몰라. 그건 안 돼. 너한테 물려줄 집이야. 이 집은 네 엄마와 너희들이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야. 내가 없더라도 너희들은 살아야 한다.”

    그러고서 당신은 혼절했다. 당신의 예언처럼, 해방촌 집은 가족의 최후 보루가 되었다. 몇 년 뒤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땅에 묻고, 동생들은 내 이름으로 명의를 바꾸라 했다. 엄마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그럴 순 없었다. 한대교, 아버지 이름 자리에 이순이, 엄마 이름을 올렸다. 내 인생에서 몇 차례 되지 않는 선견지명이었다. 내 이름으로 명의를 바꿨다면 벌써 한참 전에 거덜 났을 집이었다. 우리는 전세나 월세를 전전하고 있을 게 명백했다. 나는 노동운동 한답시고 생계가 몹시 궁할 때마다, 또는 운동의 어떤 활동을 위해 재정이 필요할 때마다, 집을 처분하려고 호시탐탐 노렸다. 아파트로 바꾸자고 설득해 보기도 했다. 바꾸는 과정에서 차액을 남기려는 의도였다.

    “내가 죽기 전까진 어림도 없다.”

    할매는 단호했고,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속이 많이 상했고 다투기도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할매가 참 잘했다 싶었다. 나는 할매가 세상을 뜨면, 집을 당신들의 이름으로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할매가 노발대발할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동생과 아내와 아이에겐 운을 띄었다.

    한대교와 이순이, 당신들처럼 성실하게 살다 가는 민초들의 공간으로 활용하면 참 좋겠다 싶은 마음이다. 아기가 태어나고 수년간 가족 모두 한 층에서 살았다. 3대가 방 2개에 엉켜 사는 형국이라 번거로웠다. 그러다 아내는 아래층 세입자가 이사를 가는 틈에 어찌어찌 돈을 마련해 아래층으로 옮겼다. 당시엔 아내와 내가 각각 활동비를 받고 있을 때였다.

    아무튼 어제, 딸은 나와 할매의 사태 추이를 지켜보며 구경만 했다. 평소 같으면 나를 향해 할머니한테 왜 그러냐고 따졌을 아이였다. 할매는 내 잔소리를 듣지 않는 척하다가, 느닷없이 동생과 비교했다.

    “철우는 뭐 부탁하면 다 하는데 저거는 뭐 하지도 않으면서.”

    허를 찌르는 성동격서였다. 그래도 꿋꿋하게 잔소리를 계속했고, 할매에게 다신 올리지 않겠다는 항복을 받았다. 나는 1층으로 내려왔다. 아이가 등 뒤로 따라 내려오며 소곤댔다.

    “아빠, 아빠, 난 아빠 얘기 동의해. 그래서 아빠가 할머니한테 뭐라 하는데 가만히 있었던 거야.”

    우리는 킥킥대며 할매 흉을 봤다. 아래층에 있던 아내가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래도 어머니한테 잘 해. 큰소리 낸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야.”

    조금 뒤 할매가 따라 내려왔다.

    “저놈은 지 어미는 신경도 안 쓰고 자식만 뭐 사다 주고. 이 집에 나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무안을 달래려는 듯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할머니, 나 있잖아. 내가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아빠보다 나를 더 사랑해”

    “그럼 당연하지. 아빠보다 할머니를 제일 사랑하지.”

    아이가 할매를 끌어안았고, 다들 웃었다. 방충망 ‘사건’은 차일피일 미뤘던 내 잘못이 컸다. 문제가 반복될 때에 곧바로 창살에 나무판자를 깔아야 했다.

    한1

    의상능선에서

    산길을 걸으며, 2차에 걸친 딸의 적성검사 결과를 얘기했다. 1차는 행복 지수 평가였다. 전부 좋았고, 가정 행복 지수가 특히 높았다. 그 점에 나는 몹시 안도했다. 청소년 자살 원인 가운데 핵심 원인은 다른 무엇도 아닌 가정에서의 갈등이었다. 성적 압박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그 근저엔 가정 내 갈등이 깔려 있었다. 부모의 과도한 압박과 꾸지람이 아이들을 자살로 몰고 갔다. 성적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이 모두 자살하는 건 아니었다.

    2차 적성검사는 정서·행동 특성 검사였다. 딸의 총점은 12점이었다. 기준은 나이와 성별에 따라 다른데, 여고생은 38점부터 정서나 행동의 어려움이 나타날 수 있는 관심군이었다. 딸의 우울척도BDI는 7점이었다. 우울하지 않은 상태였다. 10점부터 63점까지 가벼운 우울, 중등도 우울, 심한 우울로 분류하는데, 21점 이상부터 관심군으로 분류했다. 딸의 자살 생각에 대한 결과는 정상 범위였다. 전반적으로 흡족했다.

    의상봉에서 용출봉으로 향하다 빈터에서 토마토와 계란을 먹었다. 딸은 넓은 깔판 위에 누웠다. 나는 책을 읽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잠자는 딸에겐 서늘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싶었다. 잠에서 깬 딸에게 춥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랬다고 했다. 딸은 산속 꿀잠에 재미 붙은 듯했다. 산 정령들의 기운을 받으며 낮잠을 자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호사였다. 불현듯 재벌 총수들이 생각났다.

    “누리야, 아빠는 한국에서 돈이 제일 많다는 삼성재벌 이건희보다 우리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 그 사람은 직원들이 굽실거리는 맛과 비싼 음식 맛은 알겠지만, 우리처럼 산에 오르는 맛은 모르잖아. 세상의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항상 먹으면 그게 행복이겠어? 부를 사회에 기부해서라도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탐욕스럽게 자꾸 끌어 모으기만 해. 세계 제일의 부자인 빌 게이츠는 재산의 95%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했잖아. 스스로 행복할 거야. 근데 우리나라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어. 아빠는 예전엔 이건희 같은 사람들한테 적개심이 앞섰는데, 지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죽으면 그만인데 말이야.”

    “맞아. 정말 그래.”

    딸은 내 말에 적극 호응했다. 우리는 북한산 정령들의 기운을 받으며 씩씩하게 의상능선을 탔다.

    “아빠, 며칠 전에 유진이랑 미림이랑 집에서 잘 때 뭐 하고 잤는지 알아”

    “뭐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잤어.”

    싱거운 질문과 대답이었다. 뭐가 있는 듯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머뭇대다가 슬슬 풀어 놓았다.

    “사실은 영화 봤어. 아빠한테 얘기하기는 뭐 한데, 그런 영화 봤지. 19세 이상 관람 가, 하~.”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후궁’ 봤어. 미림인 보다가 중간에 자고, 유진인 그런 장면 나오면 깨우라 해서 한두 번 깨웠더니 보고, 그 장면 없으면 다시 자고, 그러다 곤히 자기에 안 깨웠어. 근데 영화가 재미없었어.”

    참으로 귀여웠다.

    “근데 아빠, 있잖아. 얼마 전에 엄마가 컴퓨터로 ‘돈의 맛’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하마터면 나는 봤다고 할 뻔했어. 여기까지 왔었어.”

    딸은 손가락으로 제 목을 가리키며 킥킥킥 웃었다. 나도 하하 웃었다.

    “다른 친구들도 그런 경우가 있대. 4반하고 8반은 교실에서 야한 영화를 봐. 선생님이 그걸 보고 뭐라 안 했대.”

    딸의 말에 발동이 걸렸다.

    “한나 언니하고 급 친해진 건 좋아하는 가수가 똑같아서였는데, 한나 언니도 기숙사에서 매일 저녁 친구들하고 야한 영화 봤대.”

    한나는 나의 노동운동 동지이자 벗인 여영국의 딸이었다. 여영국은 현재 진보정당 소속 경남도의원이다. 집이 창원이었다. 한나는 기숙사가 딸린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서울시립대에 합격한 뒤, 방을 알아본다며 제 아빠와 우리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딸과 한나는 궁합이 맞아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좋아하는 가수, 기숙사 생활, 영화 따위 얘기를 했단다.

    “근데 엄마는 네가 그런 거 아냐”

    “알아. 근데 야동은 보지 말래. 성의식이 왜곡될 수 있다고.”

    나는 딸의 얘기를 듣고 묻지는 않았으나, 딸과 친구들이 야동도 봤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딸에게 내 경험을 얘기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어느 날 청계천 세운상가 2층 구석의 음침한 가게로 가서 2,000원을 주고 빨간책을 샀다. A5 용지 크기의 누런 갱지를 반으로 접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성행위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만화였다. 집에 가져와 숨겨 놓고 보다가 똥 쌓인 변소에 버렸다. 딸은 얘기를 들으며 하~, 웃었다.

    한2

    딸아이는 한여름 산행의 족탕 맛에도 빠졌다. 5월 19일 북한산 구기계곡에서

    부암동암문에서 하산을 시작했다.

    “아빠, 계곡에 발 좀 담갔다 가자.”

    딸이 먼저 제안했다. 지난 산행의 족탕 맛을 못 잊은 모양이었다. 삼천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발을 넣으니 시원하고 상쾌했다. 시간이 지나자 아릴만큼 차가웠다.

    “아~! 아빠, 너무 차가워.”

    딸은 탄성을 지르고 담갔다 뺐다 반복하며 즐거워했다. 손수건을 적셔 얼굴도 닦았다. 그렇게 10분 쉬다가 등산화를 다시 신고 모자를 물에 담근 다음에 머리에 쓰고 하산했다. 둘의 모자챙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산을 마치고 남대문의 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의상봉, 그 어려운 코스를 갔다 왔나 보네요. 아이가 참 대견하네요. 요즘 애들은 산에 안 따라가는데.”

    우리 대화를 들은 가게 주인이 부러워했다. 딸의 얼굴에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딸내미가 가게 문을 나서며 물었다.

    “아빠, 거기가 그렇게 힘든 곳이야”

    “그럼 힘든 코스지. 아까 산에서 어른들도 낑낑대며 많이 힘들어하는 것 봤잖아.”

    딸의 얼굴에 충만한 미소가 걸렸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