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보다 무능이 더 문제
[진보정치 공동연재 1-2] 퇴행적 정파구도의 재생산에 대하여
    2017년 04월 18일 09: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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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레디앙, 민플러스 공동연재 글이다. 촛불운동과 박근혜 파면을 거치며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대안체제를 앞장서서 주장해온 진보정치는 불신의 장벽에 갇혀 연대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향후 진보정치운동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냉정한 분석과 평가, 소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진보정치를 연구했거나 진보정당에서 활동한 세 명의 1기 진보정치의 평가와 제언을 6차례에 걸쳐 싣는다. – 글쓴이(정경윤, 김상철, 손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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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대선 기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대선을 바라보는 시선은 착잡하다. 촛불 정국이 만들어낸 조기 대선의 쟁점은 유력 후보들의 가족 문제로 휘발된 지 오래되었다. 물론 정의당과 민중연합당과 같이 진보정당의 흐름을 잇는 정당의 후보자들이 나섰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무기력한 기운이 팽배하다. 앞선 글에서 정경윤 박사(이후 직함 생략)는 과거 민주노동당이 보였던 원내진출이라는 제도 정치 내에서의 성취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한계를 지적했다. 한쪽으론 운동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고 그래서 당내 갈등이 심화하였다는 진단과 함께 다른 한쪽으로는 대중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의미 있는 제도화의 경로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했다. 그러면서 제도정치와 운동 정치의 갈등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며 이런 흐름이 진보정치 운동의 ‘내부 세계’ 내에 갇혀 버렸다고 진단한다. 정경윤이 민주노동당의 ‘거대한 소수’ 전략이 가진 성취와 한계에 주목했다면 나는 좀 더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진단하면서 진보정치 운동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적 공존과 인질 정치의 구조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특히 그간 진보정치 운동에 대해 반복적으로 나온 진단들이 진짜 원인을 담고 있는지 아니면 그럴싸한 현상유지의 알리바이에 불과한지도 따져보고 싶다.

분열보다 무능이 더 문제다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진보정치는 분열 때문에 망한다’는 것이다. 진보정치에 관심이 없는 이들로부터도 들었으니 아예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것이 진보정당론의 유일한 원칙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민주노동당에서 나온 후 진보신당 시절 서울지역의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나면 늘 듣는 이야기도 비슷했다. 개인적으론 불만이었던 탈당이었던 터라 다소 억울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언제나 ‘죄송하다, 그래도 언젠가는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진보세력의 통합이라는 것을 강박처럼 여기는 경향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나타난 흐름을 보면 통합이라는 말처럼 모호한 것은 없다. 합친다는 것은 일종의 시너지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적어도 경험적인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너지는 숫자 더 정확하게는 지지율이었다. 실제로 통합진보당의 창당과 정의당으로의 입당이라는 두 번의 경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봐왔던 논리가 그랬다. 현실 정치에서 최소한의 유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물질적인 조건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라도 일단 합쳐서 규모가 큰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번번이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겨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정치 운동에 들어온 이상 이 정도의 부침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경험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의아한 것은 그렇게 통합이 된 이후의 일들이다. 통합진보당이라는 실험은 많은 사람이 말하길 꺼리는 ‘에비’가 되어 버렸지만, 사실은 왜 이 실험이 실패했는지를 짚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것을 떠나서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던 힘에 대해 생각해보자. 민주노동당의 분열을 가져왔던 바로 그 주체들이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던 주체들이 아니었나. 그들 스스로 민주노동당에서 보였던 갈등이 해소되었고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통합적인 진보정당이 가능하다고 말했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주체들이 다시 통합진보당을 깨뜨리는 주체가 되었다. 그 정치적 리더를 쫓아서 이합집산하듯이 옮겨갔던 이들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상대방에서 찾기 바빴다. 그러면서 오히려 통합에 가장 적대적인 세력이 되어 버렸다. 실제로 작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지역마다 진보정당들의 후보들을 조정해서 단일 후보로 만들자는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민중연합당의 후보들을 배제하기 위해 애를 썼고, 민중연합당에서는 정의당의 후보가 출마한 지역에 뒤늦게 공천을 했다. 차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라도 단일화를 하겠다면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냈으나 우스갯소리로 끝났고, 결국 한때는 ‘통합만이 살길이다’고 해서 함께 정당을 했던 두 세력의 갈등이 선거연대를 가장 어렵게 만드는 갈등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역설을 마주했다.

비극은 단순히 선거연대가 무산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이라는 지역의 특수성 상 중앙보다는 광역에서, 광역보다는 지역에서 정파와 상관없이 공동으로 사업하는 경험이 많아진다. 하다못해 세월호 추모집회를 공동으로 준비한다고 해도 정파 간의 구분은 딱히 의미 있진 않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에서 분리 정립되었던 시기보다, 통합진보당을 거친 지금의 상황에서 정서적 반목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이 갈수록 갈등을 직접 겪었던 세대들이 없어지지만, 정서적인 반목은 더욱 커졌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차라리 정파 간의 이론적, 실천적 대립이면 좋겠지만, 그저 세력 간의 대립으로만 확대재생산 되는 상황이다. 노동당만 놓고 보면 과거 진보신당에서 현재 노동당까지 새로 정당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적어도 정당운동 과정에서 정파 간의 대립을 직접 느낀 경험이 없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을 경험했거나 그 이전의 민중운동을 통해서 정파 간 갈등을 경험했던 이들은 소수다. 하지만 전반적인 집단적 태도만 놓고 보면 과거의 정서적 불신이 없어졌다가 보다는 오히려 확대 강화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통진당 사태

2012년 통합진보당 중앙위 폭력사태 모습(방송화면)

왜 그럴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파라는 출신을 빼놓고는 차이를 구분할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더 직접 말하면 민주노동당을 거쳤던 혹은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유사 경험을 했던 이들이 확대 재생산했기 때문이다.

단지 전승으로 내려오는 경험의 일단이, 구전으로 퍼져가는 유령 같은 일화들이 의미 없는 구분들을 확대재생산 하는 사이, 현실 운동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해석하는 유일한 척도는 ‘정파의 출신’이 되어 버렸다. 몇몇 지나쳐버릴 수 있는 사소한 문제들을 너무 확증해서 판단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최근 사드 배치와 관련된 이슈를 보자. 소위 좌파라고 불리는 정파에서는 어떤 대중적인 움직임이 없다. 그 이슈는 관심이 있고 더 잘하는 특정한 정파의 문제로 갈음된다. 반면 장기투쟁사업장에 대한 연대나 이슈파이팅은 그 역의 모습이 보인다. 이건 역할 구분이 아니라 아예 통일 문제나 한반도 평화와 같은 이슈는 그들의 것, 노동 이슈나 착취 문제는 또 다른 그들의 것이라는 의제의 분리정립으로 나간다. 이런 기묘한 구분이 시간이 갈수록 분리와 차이를 확대하고 강화한다. 그런데 이런 갈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정치는 정치라는 논리

개인적으로 최근 나타나는 가장 우려스러운 경향은 운동과 정치를 분리하려는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통합진보당 이후의 흐름에서 가장 우려할 만한 분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기묘한 역할 구분에서 파생되는 정서적인 적대는 각 정파적 지도력을 정당화하는데 필수적이다. 기층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민감한 이들보다 분리 확대된 정파 구도에서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각 정파의 지도력들은 수십 년 간 변하지 않는 위치를 보장받고 있다. 비유적으로 보자면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끼리는 교환할 연락처조차 없는데, 적어도 각 정파의 지도력들은 기묘한 악연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락하고 조율할 수 있는 사적 연락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마치 남북의 적대적 정치세력들이 서로의 정치권력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되었듯이 현재 정파 구도라는 것 역시 각 정파의 낡은 지도력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 그러면서 두 가지 편향이 공통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벗어나는 진보정치의 논리가 첫 번째다. 지금 진행 중인 대선에 출마한 진보진영의 두 진영을 보자. 솔직히 서울지역에서 한 정당의 위원장이었던 나로서는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민중연합당과 정의당이 무엇을 해왔는지 알 길이 없다.

그들이 주장이나 정책 그리고 공약에서 보이는 가치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인 지역이라는 현장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대선후보 중에서 보면 내놓는 정책과 가치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이다. 현실적으로 진보정당이 유효하려면 선거와 선거 사이에 무엇을 하든 간에 선거에 후보를 낼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는 것, 이런 제도 정치의 유효함이 역설적으로 진보정당의 유효함을 증명해준다는 논리의 역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주노동당의 힘을 대중운동과 정치 운동 간의 상호 영향에서 파악한다면 명확하게 지금의 진보정치는 대중운동이 없는 정치 운동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 셈이다. 이 말은 대중운동이 부재하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운동 자체가 정치 운동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말이다. 탄핵정국을 이끌었던 민주노총이 명확한 정치방침을 내놓지 못했다. 정치조직끼리 합의해야 하는 문제를 대중운동 조직 내의 문제로 만들어서 파국적인 결론이 나오도록 몰아붙이는 일이 반복된다. 이러는 사이에 운동은 운동이고 정치는 정치라는 논리가 광범위하게 퍼지고, 어찌 되었던 진보정당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배타적 지지’조차도 사라졌다. 이런 조건은 각 정파의 지도력들은 제한된 대중운동의 영향력 속에서 쉽게 자신의 지도력을 확대 생산할 수 있다.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지를 아주 좁게 제한함으로써 ‘어차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도’로 만드는 강제가 작동하는 셈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진보정치가 사실상 한편의 인질극이 되었다. 대중운동은 일종의 오셀로 게임처럼 어느 정파가 지도력을 차지하는가의 게임으로 변질하였고 그에 따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력은 만들어지나 정작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무능의 상태로 돌진하는 모양새다.

운동은 운동, 정치는 정치라는 논리의 흐름은 최근 노골화된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은, 그리고 그곳의 을지로위원회는 좋은 활동을 하는 곳이다.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서 단기적인 성공을 보장받는다는 점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역할은 크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 방식의 문제 해결에 더욱 집중하면 할수록 진보정치 스스로가 이를 닮아가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가. 법안을 단독으로 제출하는 최소 단위로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나, 그것이 곧 법안의 통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당연히 다수당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 그런데 현재 상황에서 원내교섭단체로, 원내교섭단체에서 다수당으로 가는 일종의 비약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가지고 있는 제도적 정당의 힘을 뛰어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그만큼 더불어민주당의 을지로위원회 활동은 위협적이고 효과적이다. 하지만 한 걸음만 떨어져 생각하면, 그것을 좀 더 효과적인 정치활동으로 만든 것은 진보정당이 아니었느냐는 생각이 든다. 현장의 힘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서 구조적인 변화를 끌어내기 보다는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것에 집중한 방식을 진보정치의 정치활동으로 만든 것이 우리 스스로가 아니었느냐는 질문이다.

민노

서구 진보정당의 역사를 보면 진보정당이 집권당이 되어가는 경로는 기존의 정당을 대체했기 때문인 것은 맞지만, 그 문법을 따라 하는 방식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보수정당의 경계에 놓인 의제들, 소유권 문제나 다양한 사회화 전략을 통해서 블록을 형성하고 늘 대체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진보정당 운동은 다양한 현장에서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현장에서의 경험이 정치논리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기묘한 정치 전문가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비약을 감수하고 말한다면, 지금의 상황은 운동으로서 진보정당이 갱신하기엔 가장 어려운 조건이지만 역설적으로 민주노동당 이전에 형성된 각 정파 운동의 지도력이 안정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조건으로 최적화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진공상태를 벗어나기

10년이 넘는 진보정당 당직자의 경험에도 여전히 진보정당의 외부자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단 한 번도 진보정치 운동에 있어서 내부조직으로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일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정파 문제를 꺼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파가 나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정파가 ‘생산적인가’라는 것을 묻는 것이고 이런 갈등의 확대 재생산이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정파 구도를 만드는 것도 정파 구도를 해소하자는 것도 각 정파의 지도력을 통해서 반복됐던 경험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중운동을 숙주 삼아서숙주삼아서 정치 운동의 정파들 지도력이나 강화하는 지금 상황이 우리가 바라는 진보정치의 모습인지를 묻고 싶었다. 사실 진보정치 운동의 위기는 다양한 원인을 가지고 있을 테다. 이것이 모두 하나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면 반드시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데, 그것이 정파 간의 왜곡된 대립 구도라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이 부분을 건너뛰면 늘 지역 현장에서도 ‘그 사람은 어디 출신이래?’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기묘한 상황을 극복할 수가 없다. 적어도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원리라면 다른 것보다는 이를 중심에 놓는 실험들이 필요하다.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무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조직에 돌아가 논의해보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기묘한 결론으로 치닫는 논의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결정을 감당할 수 있는 최소의 단위에서부터 다양한 움직임들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갇혀있는 ‘내부 세계’의 논리가 아니라 적어도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끼리의 리그라도 새롭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민주노동당 당직자로서 맨 처음 한 것은 노숙인 단체들과 서울지역의 노숙인 쉼터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다닌 것이다. 서슬 퍼런 뉴타운재개발 지역에 세입자권리 찾기 설명회를 한다고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면서도 이것은 내 개인이 아니라 당이 함께 한다는 일체감이 있었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에 대해 ‘현실적이지 않아도 필요하므로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힘이 있었고, 빨갱이라 백안시하는 주민들의 눈을 마주 보면서 설득해야 한다는 당위가 있었다.

진보정당의 위기가 ‘분열’ 탓이라는 이미 낡은 진단은, 진보정당의 위기는 진보정당다운 실천의 부재 탓이라는 말로 바뀌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운동이 빠져버린 정치, 세력의 통합이 정당 만들기의 전부가 되어버린 이합집산의 경험들을 넘어설 때가 되었다. 암흑 속으로 빠져들더라도 품 안에 양초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운동 없는 ‘장미 대선’이 이를 말해주는 것은 아닌가. 더 돌아가야 한다면 제대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 민주노동당의 시기를 끝내자. 더 정확하게는 민주노동당을 만들었던 정파 간의 타협이라는 방식에서 벗어나자. 구체적인 과제와 전망으로 새롭게 밑에서부터 ‘창당 경험’을 만들어가자. 아무리 궁리해도 지금의 외통수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지키고자 하는 진보정치의 가치와 원칙이라는 바둑판은 놔두고 어지럽게 놓여 있던 바둑알을 다 치워버리는 것 말고는 모르겠다.

김상철 : 2004년 민주노동당서울시당 의정지원부장으로 당직을 시작해, 국회 천영세 의원실 보좌관을 거쳐 진보신당서울시당 정책국장으로 노동당서울시당 사무처장, 위원장을 겪었다. 최근 당직선거에서 낙선해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재정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나라살림연구소를 함께 만들었고 현재 책임연구위원으로 있다. 최근에는 공덕역 인근 경의선공유지에서 ‘26번째 자치구’를 선언하고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공동 투쟁 플랫폼을 만드는 일에 함께하고 있다.

필자소개
전 노동당 서울시당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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