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문제 있습니까?
[왼쪽에서 본 F1] 뿌리 깊은 편견
    2017년 04월 17일 08: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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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이름 있는 F1 드라이버인 니코 훌켄버그가 일부 F1 팬들에게 ‘미소지니’(misogyny. 여성혐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류의 일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보다 열등한 제2의 성으로 인식하는 모든 언어와 행동)라고 지적, 비난받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표면적인 문제의 발단은 훌켄버그의 전 소속 팀인 포스인디아의 새로운 타이틀 스폰서 발표였습니다. 포스인디아는 BWT를 새 타이틀 스폰서로 받아들였고, 팀의 얼굴이 된 BWT는 다른 모터스포츠에서 그랬던 것처럼 핑크색을 바탕으로 하는 스폰서십 리버리(livery 상징색)를 포스인디아의 레이스카에 덧씌웠습니다. 지난 몇년간 무채색을 바탕으로 했던 포스인디아의 F1 레이스카는 2017시즌을 맞아 눈에 쏙 들어오는 화려한 색깔을 갖게 됐습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16시즌까지 포스인디아에 남아 있다가, 2017시즌을 맞아 르노로 이적한 니코 훌켄버그의 트위터 메시지가 문제가 됐습니다. 훌켄버그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새로 BWT의 스폰서십 리버리가 더해진 포스인디아 VJM10의 사진을 올리면서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을 남겼습니다.

“이것이 내가 팀을 옮긴 이유다.”

물론, 농담입니다. F1에서 별다른 문제 없이 팀을 이적한 경우, 이전 소속 팀과 드라이버 사이에는 큰 문제가 있을 리 없습니다. 훌켄버그와 포스인디아의 경우는 특히 사이가 돈독했습니다. 포스인디아도 며칠 뒤 훌켄버그의 농담에 반박하는 또 다른 농담 성격의 글을 팀 공식 SNS 채널에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당사자들은 이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일부 팬들은 반박했습니다. ‘핑크색’ 리버리를 비웃은 것은 농담이라도 미소지니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왔습니다. 모터스포츠, 특히 F1은 남성의 스포츠고, 핑크색은 여성적인 색이라는 고정 관념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훌켄버그의 얘기는 적어도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였다면 조금 다른 반응이 주류를 이뤘을지도 모르지만, 주로 영어권의 팬들에게는 훌켄버그의 트윗이 최소한 ‘경솔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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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WT를 타이틀 스폰서로 삼으면서 핑크색으로 도장된 포스인디아 VJM10

얼마 뒤에는 하스 소속의 드라이버 로망 그로장이 훌켄버그에게 맞장구를 치면서 ‘포스인디아 팀원들도 꼭 레이스카 리버리와 같은 색 옷을 입었으면 한다’는 뉘앙스의 농담을 자신의 트위터에 담았습니다. 아무래도 맞장구를 친 내용이고 조금 더 간접적이어서 후폭풍은 많지 않았지만, 그로장의 트윗에 대한 평가도 냉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장황한 논쟁을 시작할 생각은 없지만, 훌켄버그와 그로장이라는 두 명의 20대 F1 드라이버에게서 ‘모터스포츠 세계의 뿌리 깊은 고정 관념’을 발견했다는 것만은 꼭 지적하고 싶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적어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왔기 때문에 쉽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품고 있는 생각만 본다면 여전히 차별적인 편견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난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F1은 내적으로 차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과거 몇 차례 그랑프리에서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 레이스에서 그리드걸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은 병풍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무대를 빛낸 남성 드라이버들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꽃장식처럼 여성이 ‘사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 자체로 차별적입니다. F1 2017시즌 개막전인 호주 그랑프리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고, 앞으로 당분간 큰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포스인디아의 새 레이스카 VJM10의 리버리를 본 일부 남성 팬이 “남자는 핑크지!”라는 댓글을 남길 때도, 그 안에는 차별적인 현실에 대한 자조가 섞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차는 남성의 것이고, 핑크는 여성의 색이라는 고정 관념이 남아 있어 나온 얘기일 테니까요. 아직은 F1은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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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2017시즌 개막전 호주 그랑프리의 그리드걸

그나마 F1에 분명한 핑크색 리버리가 나왔다는 사실은 고무적입니다. 물론 과거의 F1에 핑크색 리버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사용된 핑크색은 다른 색이 주를 이루는 도장에 보조 색상으로 사용되거나 무채색에 가까운 무난한 핑크(?)색이 사용되곤 했었습니다. 2017시즌 포스인디아의 분명하고 화려한 핑크색이 초유의 시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BWT의 핑크 리버리가 모터스포츠에 처음 사용된 것도 아닙니다. 인기가 많은 투어링 카 챔피언십인 DTM에서도 이미 몇 년 전부터 BWT의 스폰서십과 함께 핑크 리버리가 사용됐었습니다. 이번에 포스인디아가 채택한 리버리도 DTM의 BWT 핑크와 같은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DTM에 이어 F1까지 BWT가 핑크색이라는 새로운 리버리로 주목받으며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리버리는 리버리일 뿐입니다. 핑크색 리버리가 하나 자리 잡았다고 해서, 뿌리 깊은 편견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변한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다만,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는 데 의미를 둘 뿐입니다.

몇 차례 그리드걸 대신 ‘그리드보이’가 동원되는 시도가 이뤄지고, FIA가 주관하는 WEC(세계 내구레이스 챔피언십)에 그리드걸이 퇴출된 것도 그런 작은 변화의 일부입니다. 그런 와중에 10개 F1 팀 중 두 팀의 리더가 여성이 되었고, 몇몇 젊은 여성 드라이버들이 F1 드라이버를 성장 발굴하는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모두 작은 변화의 일부일 뿐이지만, 의미를 과소평가하기만 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4행정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지고 첫 장거리 주행에 나섰을 때, 테스트 드라이버이자 엔지니어로 레이스를 목표 지점까지 완주시킨 것은 여성이었습니다. 자동차는, 모터스포츠는, F1은 남성의 것이라는 편견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잘못된 것이라면, 아무리 오래 걸릴 것처럼 보여도 고쳐나가기 시작해야겠죠. 모든 작은 변화를 의미 없다고 무시한다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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