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과 걷는 빨치산 길
    [다른 삶 다른 생각] 옛날의 그 길
        2017년 04월 13일 09: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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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여름에 레디앙에 글을 보내고, 근 몇 달 동안 연재를 쉬었다.

    그새 나는 ‘지리산생명연대’ 상근활동을 그만두었고, 또 한해의 농사를 준비한다. 무엇이든지 꾸준하고 성실히 하는 법이 없는, 내가 이 연재를 꾸준히 할지 의뭉스럽지만, 편집진의 독촉에 못 이겨 다시 시작한다.

    ‘한재’

    백운산 가운데를 가로질러 구례에서 광양으로 넘어가는 한재에서 걸음을 시작한다.

    아니, 시작하기 전에 인사를 먼저 드린다.

    신1

    신2

    정운창

    1928년 구례 문척면 출생
    철도학교 졸업. 철도노동자로 일함.
    1948년 5.10 단선 이후 야산대를 거쳐 유격투쟁 대열에 참가
    주로 백운산 지역에서 활동(특각 비서과장)
    그 뒤 봉두산, 백아산(지구 부책)을 거쳐 6.25 뒤 도당 노동부 지도위원으로 일함.
    평양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다시 입산
    재산 활동 중 곡성군당위원장, 도당 조직부 부부장(봉두산 분트책)
    그 뒤 지하활동을 위해 하산
    활동 중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음
    4.19 직후 병보석으로 풀려남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도 통일을 염원했음.

    그는 한 시대의 역사를 몸으로 기록했고,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빨치산의 딸’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이다.신3

    손영심

    1931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담양에서 성장
    1948년 광주사범학교 졸업. 보성 회천국교에서 1년 간 교편
    1949년 전남여고 편입학
    1950년 전쟁 시기 조선노동당 광주시당에서 일함
    1950.9.28 무등산 입산, 유격대 활동 전개.
    오빠 손채만, 남동생 손형만, 외삼촌 양권태 전사
    1951년 전남도당 선전부 지도원으로 일함
    1951년-52년 제1차 공세 시 전남 백운산에서 활동함
    1953년 지리산에서 유격대 활동
    1954년 지리산에서 생포.

    아구사리는 생강나무이고, 이 주변은 아구사리꽃 지천이다

    신4

    정원모

    1925년 2월 18일 생(음력)
    1933년 구례중앙보통학교 입학
    1938년 학업우등 전남도지사상 수상 졸업
    1940년 순천중학교 입학(2년 간 일본 유학, 4년만에 졸업)
    1944년 광주의학 전문학교 입학
    1945년 해방으로 구례경찰서 치안대장 임무 대행
    정태중, 정원모, 한창희,선동기 등과 함께 사회주의자 조직 ‘단풍회’ 결성
    1948년 남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장
    1948년 9월 22일(음력)
    여순항쟁 발발로 구례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봉성산에서 학살됨.

    그는 24살에 죽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24살 청춘이다.

    인사를 드리고, 소년빨치산과 함께 옛날 그 길을 걷는다

    김영승 선생은 소년빨치산으로 활동하다, 54년 3월, 전남 광양 백운산 옥녀골 부근에서 육군 5사단에 의해 총을 맞고 사로잡혔으며, 국방경비법 32조 이적행위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수형 생활을 시작했다. 총 35년 9개월 간 복역했으며 89년 9월에 출소한 뒤에는 비전향 장기수 모임인 ‘통일광장’에서 활동하시고 계시다.

    “52년 9월 중순에, 내가 그때 백운산에 있었을 땐데 우리는 전라남도 빨치산 총사령관 김선우 동지하고 같이 박영발 동지하고 이현상 동지를 만나 하룻밤 잤어. 그리고 박영발 동지를 보위하고서 이쪽 뱀사골로 넘어왔어. 그리고 이현상 동지는 53년 9월 18일날, 비천골이란 데가 있는데 거길 건너다가 매복에 걸려서 일행이 10여명 됐는데 한 사람 한사람 다 희생됐거든. 이현상 동지는 거기서 돌아가셨고…박영발 위원장은 우리가 모셔와 가지고 바로 토끼봉 밑에 임시 비트를 썼어. 이때 박영발 위원장 동지 보위대 동지들이 반야봉 중허리를 전부 다 뒤져서 천연 동굴을 발견한 거여. 그래서 글루 옮겼어.

    그 때가 53년도 10월경이었지. 거기서 생활을 하다가 54년 2월 22일에 족적 때문에 동굴이 발견돼서 희생된 거여. 고 안에 인자 무전사도 있었고 간호사, 수습 무전사도 있고 4명이 있었는데 다 죽었지. 거기에 이정례 동지라고 있었어. 박 위원장 비서 했던. 수류탄이 안에서 터져 부상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보위대 동지들이 밥을 해 가지고 돌아와 보니 다 죽고 이정례 동지 하나만 살아있었던 거여. 굴 안에서.

    그 여성 동지하고 이주현 동지 두 분이 살아가지고 화개재라고 있어. 그 화개재 넘어서 투쟁하고 다시 뱀사골로 넘어오는 길에 적들이 공세를 취해서 하산해 내려가던 사람들이랑 부딪힌 거여. 그래서 거기서 희생이 다 됐지.

    10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동굴을 이용한 거여. 그리고 그 동굴 옆에 구들장터가 있어. 그 구들장터가 있는데 적들이 없을 때는 구들장터에서 생활하고 적들이 있을 때는 동굴에서 생활한 거여. 보위대 동지들은 그 주위에서 잠복을 해. 잠복을 해서 매일매일 적들을 동태라든가 이런 걸 보고하고 밥을 짓고 했었거든. 거기서 살아남은 동지들이 한 60여명이 됐었거든. 그 양반들이 다시 규합이 돼서 야산으로 들어갔어요. 전라도 조계산이라고 있어. 거기서 있다가 55년도에 마지막 적들하고 싸우다가 전부다 전멸했어.

    그리고 그 비트 안에서 뭘 했나하면 조국 출판사를 만들어서 거기서 등사를 했어. 거기 무전기도 있거든. 거기서 공화국 방송은 다 들어. 그 방송을 듣고 등사 다 해서 각 도로 알리는 일을 하다가 마지막 공세로 희생돼 종막을 고하고 만 거야”

    신5

    백운산 깊은 골자기와 전남도당의 암호로 88능선으로 이름붙인 능선을 이리저리 가며, 소년빨치산은 옛날을 기억하고, 옛날의 일을 전해준다.

    이 골짝에는 위원장 터를 비롯해서 도당 각 부서와 인민위원회 터들이 있었다.

    동기 공세 전에 구들장을 만들고 잣나무로 귀틀집을 사각형, 직사각형으로 짜서 틈새를 진흙으로 발라 바깥 공기를 차단시키고 지붕은 서까래를 얹어 흙을 바르고 쐐를 둘렀다.공세 때 토벌대가 수차에 걸쳐 불을 질렀으나 지붕은 타고 통나무는 타지 않고 그을린 채로 1954년 봄까지 그 형태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귀틀집은 흔적조차 없고 나무와 숲만 우거져 있었다.

    88터에도 잊지 못할 사연이 하나 있다.

    1952년 1월 27일 정공대장이 88 보초능선에서 전투하다 다리 관통상을 입었다. 그래서 도당 위원장 비서 정태 동지, 주치의 행년 동지 그리고 김영승 선생이 조동만 대장을 보위하고, 임시 땅밑 환자터에 들어가다가 발각돼 적들을 물리치고 3명은 살아났으나 동만 대장은 희생되고 마는 아픔을 겪은 곳이다. 시신은 살얼음판 속에 낙엽으로 묻어주고 공세 끝나고 해동되면 다시 매장하려 했으나 이후 그곳을 가지 못했다.

    신6

    가칭 615고지. 김선우 사령관의 가묘가 있던 곳이다.

    김선우 사령관은 1946년 경부터 입산해 전남 지역 유격전을 이끌었던 구빨치 출신이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전선 이남을 제외하고 대한민국 지역을 모두 점령하였을 때 조선로동당의 전남도당이 결성되자 여기에 참가했다. 한때 도책을 맡기도 했으나 모스크바 유학파인 박영발이 내려온 뒤로는 전남도당 부위원장으로 이동했다. 1952년에는 제5지구당 부위원장이 된 박영발 대신 다시 전남도당 위원장에 오르는 등 도책과 부책을 오갔으나, 군사 작전은 주로 오랜 유격대 지휘 경험이 있는 김선우가 담당하여 유격대원들에게는 ‘사령관님’으로 불렸다.

    이현상과 박영발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남은 유격대를 이끌고 백아산에서 활동을 계속하다가, 광양군 백운산으로 아지트를 옮겼다. 1954년 4월 5일에 토벌대의 포위 공격 속에 사살되었다. 김선우 사령관을 사살한 토벌대 지휘관은 예우를 갖추어 사망 장소와 가까운 능선에 시신을 매장하도록 해주었다.

    그곳에 김영승 선생은 평양 소주 한 병과 그들에게 전하는 말을 꼭꼭 숨겨두었다.

    신7

    발걸음을 따리봉으로 옮긴다. 저 너머로 지리의 주능선이 펼쳐지고, 그 아래로 섬진강이 묵묵히 흐른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나뉘는 것이다. 그 당시 섬진강을 건너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다는 소년빨치산의 말을 들으며, 다시금 섬진강을 내려다본다.

    물살에 떠내려가 죽은 사람들, 강을 건너다 건너편 매복에 걸려 강물에서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 엄동설한에 물살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속에 강을 건너야만 했고, 건너다 싸움이 벌어지면 물살에 전사하고, 빗발치는 총탄을 맞으며 넓은 모래사장을 지나 적의 매복지를 뚫고 지리산으로 이동하며 투쟁했던 섬진강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피어린 현장이다.

    신8

    해가 뉘엇 저물어 간다. 시작점인 한재에서 답사를 마친다.

    36년을 감옥에서 지냈다는, 장기수 빵살이를 다 합치니 4000년이 넘더라는, 반드시 살아서 나가겠다고 새벽마다 냉수마찰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소년 빨치산은 마지막 말씀을 꺼내신다.

    “나와서 보니 본질적으로 변한 게 없다”

    필자소개
    대구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지리산에 살고 있는 초보 농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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