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관사 운전수당의 사연
    [철도이야기] 1969년 천안역 사고
    By 유균
        2017년 04월 12일 10: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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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기관사에게 운전수당이 얼마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는 이가 의외로 적습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운전수당이 얼마인지 뚜렷하게 기억할 만큼 가치가 없어 그냥 여러 가지 수당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지금은 금액이 그리 크지 않아 관심도도 낮아졌지만, 1969년 4월 기관사특수수당(열차운전직특수수당)이라는 명칭으로 새로 만들어질 때는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그 금액이 대략 월급의 두 배였다고 기관사 선배님들은 전설처럼 말합니다.

    물론 급수별로 차등 지급되어 기관사 모두가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닐 테고, 그 후 급여가 올랐지만 적어도 1970년대 기관사는 대략 본봉의 반 정도 되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관조사에게는 당시에도 ‘일반적인 수당’처럼 느끼는 정도의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단했던 기관사특수수당은 대략 30년 동안 ‘올랐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유지되었습니다. 아니, 물가와 비교하면 무지하게 떨어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합니다. 그러다가 2002년 2.25 파업 후에 비로소 운전수당이 10만원 정도로 현실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번의 조정을 거쳐 현재 운전수당은 직급과 상관없이 기관사 22만원, 부기관사 10만원이며 승무일 수가 17일 이상 근무했을 때 받습니다. 그리고 기관차 사무소에 근무한다고 무조건 받는 것이 아니라 승무를 하시는 분에 한하여 지급됩니다. 따라서 3조2교대로 근무하는 운용원이나 운용팀장, 기관차 사무소장 등은 받지 못합니다. 이 조건은 기관사특수수당이 생길 당시도 같았습니다.

    유1

    ※ 위의 철암역은 천안역의 오타이며 열차운전원은 운수직이 아닌 기관사와 기관조사입니다. 5급갑=9급, 5급을=8급공무원.

    기관사특수수당이 생긴 이유를 찾기 위해서 애 좀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이를 제대로 알고 있는 기관사 선배님들이 없을뿐더러, 기관사들 사이에 구두로만 전해져 대부분 내용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들은 내용을 정리하면 가난해서 구멍가게를 겸업하다가 잠이 모자라 졸음운전을 하는 바람에 사고를 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인한 바로 졸음운전과 전혀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신문기사를 모두 읽었지만 ‘졸음’에 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정작 문제라면 자동폐색 방식인 듯합니다.

    사고는 1969년 1월 31일 오전 11시 52분경에 천안역 남방 800m 지점에서 부산발 서울행 #10열차, 청룡호가(기관사 이규태, 44세, 대전열차사무소 소속) 천안역 기외정차로 서 있던 남원발 서울행 #102 완행열차를 추돌하여 50여 명이 사망하고 백여 명이 중경상의 피해를 봤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배상열 운전사령의 구술에 의하면

    그 원인이 자동폐색식이라고. 그 이전에는 없었어요. 69년 이전에는 규정상에는 자동폐색 방식이라는 게 있었는데, 우리나라(경부선)에 자동폐색 신호장치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그 규정만 있었지, 실제 현물이 없었잖아요. 그러다가 경부선을 자동폐색식으로 한다 해가지고 신호기를 전부 세워 놓은 거 아니에요. 세워 놓아서 시행령이 안 떨어졌으면 폐색기에도 이렇게 X자 해놓던가 신호를 넣지 말아야 되는데 그대로 살려 놓은 거예요.

    이러한 내용을 듣고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동폐색 방식이 아니었으면 종전의 방식(연동)이거나 대용폐색일 테고 그렇다면 기관사는 분명히 운전명령고시서를 받았든지 아니면 당시 무전기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역에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통보했을 텐데, 게다가 102열차가 기외정차하고 있으면 출발신호기가 정지일 덴데 어떻게 출발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과했다면 전적으로 사령이나 소정리역의 잘못이고 기관사는 덤터기 쓴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꽤나 발품 팔았습니다. 나중에 신문에서 확인해 보니 자동폐색식과 관련해서 선배님이 잘못 기억을 하는 듯하네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석연찮은 점이 남아있습니다.

    이 관계자는 철도 당국자가 애초에 부인한 것과는 달리 지난달 28일 지역적으로 종래의 폐색방법으로 환원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다고 밝히고 29일에는 다시 자동폐색 방법으로 돌아왔다고 덧붙였다. 철도청 사고조사반은 또 대전철도국 운전사령이 사고 당일 재래식 방법으로 환원하라는 지시를 단독으로 내렸었는지 여부를 조사 중이다. (69년 2월 3일 동아일보에서 발췌)폭설이 와서 철도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서행운행을 건의했음에도 윗선에서 정상운행 명령을 지시한 것이다. 이 당시에는 경부선의 선로용량이 모자라 ABS[1], ATS[2]를 통해 운행량을 늘리려 했고 열차 시격이 고작 2~3분대였음 감안하면(게다가 ATS는 설치 전)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천안역은 서울철도국, 소정리역은 대전철도국 산하에 있었으며 서울은 자동폐색방식, 대전은 재래식 폐색방식을 사용한 듯하며, 해당 지부장의 강력한 항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짐작건대, 뭔가 더 켕기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상의 내용은 찾을 수가 없네요. 좌우지간 고위관료들은 모두 피해 갔고 기관사 이규태씨는 징역 2년, 소정리 역무원과 운전사령은 금고 10월을 받았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종합하면 5일째 폭설이 내려 전국적으로 교통이 마비되었고 자동폐색 방식은 이미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청룡호는 ‘주의’로 출발, 시속 80km로 운행을 하였으며 천안역 남방 1km 지점에 위치한 원방신호기가 ‘정지’를 현시했음에도 이를 확인하지 않은 것을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102열차가 기외정차한 이유는 천안역 구내에 2개 열차가 1시간씩 연착하여 들어가 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고의 원인은 확인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를 못 하는 것이 ‘사고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상(賞)처럼 왜 기관사가 수당을 받을까?’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이를 당시 신문기사 내용으로 추정하면 기관사의 ‘사기 진작’이라고 표현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한 관계관은 아무리 철도운영을 기계화한다 할지라도 수백 명의 인명을 맡고 있는 철도 기술자들에 대한 처우개선이 되지 않는다면 제2의 천안 철도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오히려 더 커질 뿐이라고 걱정하고 있었다.그는 현재와 같이 15-6년 근속한 1등기관사들의 한 달 수입이 승무여비 등 겨우 2만 3,4천원 할 뿐 아니라 3,4십년 근속해도 겨우 운전과장밖에 안 되는 좁은 승진의 문을 넓혀주는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 한 이들의 충실한 근무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조건은 비단 기관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기타 철도기술 분야 종사자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철도의 기계화에 앞서 해결되어야 할 결함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번 사고는 또 기관사 등 철도 기술자들에 대해 경제적인 보수의 개선뿐만 아니라 이들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는 각종 노동심리의 조건 개선도 불가피하다는 산 교훈을 주고 있다. (1969년 2월 4일 동아일보에서 발췌)

    유균 : 그러면 이규태씨라는 분이 사고를 내서 파면을 당했고 그 기관사로 인해서 다른 기관사들은 봉급이 올라갔고 그런 결과가 된 거네요?

    배상열 : 그렇죠. 그 당시에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이규태에게 고맙다’고 그러라고. 그 사람이 하여튼… 그렇게 당했지만, 운전계통으로서는 엄청난 돈을 그 때문에 얻게 된 거 아니에요.

    박정희 정권 시대에는 그래도 철도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일이라도 했는데, 그 딸은 오히려 철도노동자에게 핍박만 했으니 지금 현상은 당연한 결과이겠지요. 청출어람(靑出於藍)이 아니고 청출지감(靑出之監 : 청와대를 나와서 감옥으로 간다) 이네요.

    월급명세서2

    사진설명 : 1966년 입사, 1972년 1월은 기관사가 된 이후 첫 번째 수당으로 5천원 정도였으며 다음 달부터는 1만원 정도의 수당을 받았다고 함.

    1970년도의 서울 소비자물가 : 쌀(20리터)이 692원, 밀가루(22kg 한 포대)가 773원, 쇠고기(600g) 500원, 무(한 관)가 160원, 배추(한 관)가 222원, 마늘(100개)이 720원, 세탁비누(450g)가 40원이었다). 1968년 소주2홉 출고가 55원, 1974년 서울역~청량리 30원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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