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가는 사고뭉치?
    [아트살롱]Mirth and Girth 사건②
        2017년 04월 11일 09: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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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Mirth and Girth : 시카고 일대, 혼란에 빠져’ 링크

    워싱턴의 죽음과 시카고

    해롤드 워싱턴(Harold Washington)은 시카고 최초의 흑인 시장이었고, 1987년 11월 23일(65세) 급작스레 사망했다. 그는 시카고에 존재하던 다양한 모순을 뚫고 당선된 사람이었다. 그가 두 번이나 당선되기 위해 시카고 전 지역사회와 모든 진보적 소수 민족 및 소수인종 집단이 연합해야 했다. 이것은 전에 없었던 연합이었고 역사적인 승리였다. 그렇다고 그 연합이 실제로 튼튼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럴 만한 시간이 충분치 못했던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시카고 시민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따르고 사랑했지만, 그의 죽음이후 시카고 시민사회에 잔존했던 미세한 균열은 다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장례식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열린 관을 지나서 걸어갔다. 그들 가운데 넬슨(David Nelson)도 있었다. 시민들은 그를 잃은 슬픔과, 그를 이을 ​​적절한 후임자가 없다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해롤드 워싱턴이 주창했던 것들은 대부분 분열, 부패 그리고 권력을 얻으려는 속임수로 인해 파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흑인 공동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장과의 친밀감을 이용했으며, 워싱턴을 지지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은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그와 자신들과의 관계를 왜곡했다.

    그래서 넬슨의 <Mirth and Girth> 사건이 일어났을 때, 넬슨의 그림에 화를 내는 사람도 많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 사건을 ‘이용’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자신이 워싱턴의 기억을 지키는 진정한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 인기를 끌기 위한 기회만을 엿보았다. 반면 시의원들은 정말로 시장에 대한 기억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충정은 폐쇄적이고 사적인 전시를 공적인 스펙터클로 만들어버렸고, 서투르고 수준 낮은 작품에 대해 악명 높은 노이즈 마케팅 기계를 작동시키고 말았다.

    사실 이 사건은 언론에 노출되지 않을 수 있었고, 지역사회 지도자들과 학교 지도자들 간의 문제로 조용히 처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다. 오히려 그 대신에, 미디어는 완전히 동요했고, 다양한 소요와 시위를 일으키도록 실제로 조장했다. 미술평론가 해롤드 헤이든(Harold Haydon)은 시의원의 행동에 대해 시의원들이 과도한 반응을 보였으며, 해롤드 워싱턴 시장이었다면, 이 사건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정작 시의원의 부적절하고 과도한 행동(시위를 조장하고, 학교에 대한 시의 지원금 철회의 협박 및 학교에 대한 폭력적 위협, 작품 강제 철거 및 파손 행위 등)은 오히려 인종적 긴장을 유발하고, 거의 폭동을 선동하기는 데 이르렀던 것이다.

    Mirth and Girth 이전 상황

    그런데 이 사건은 시카고의 흑인 대 백인 그리고 흑인 대 소수 민족 사이에서 발생한 극적 분별 사태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림을 둘러싼 충돌이 있기 이전에, 전국적 주목을 받은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바로 스티브 코클리(Steve Cokely) 사건인데, 이 사건은 사실상 그림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시기상 너무 연이어 터진 사건이라 사람들은 그림의 사건과 스티브 코클리 사건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코클리 사건은 사실 흑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실제로 넬슨의 그림에 대해 공격적으로 반응하도록 하는 결정적 동기를 부여했다. 유진 소여(Eugene Sawyer) 임시시장의 보좌관이었던 스티브 코클리(Steve Cokely)는 1985년 8월부터 1987년 11월까지 이슬람 흑인 국가에서 강도 높은 반유대주의적 강연을 했다. 심지어 그는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에 사는 유대인 의사들이 흑인 아기에게 에이즈 바이러스를 주사한다고 주장했고, 나중에 ‘유대인의 세계 지배’라는 음모론을 유포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코클리(Cokely)의 해고 사유가 되었다. 소여가 이 결정을 내리는 데 무려 일주일이 넘게 걸렸으며, 막상 그가 해고를 당했을 때, 흑인 사회 중 일부 파벌들은 격분했다. 그들은 코클리의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지역사회의 중요한 인물 인 허버트 마틴(Herbert Martin) 목사는 코클리의 진술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고 지지하기도 했다. 그림 사건 이전에 흑인과 유대인 사이에 잠시 존재했던 단결은 그렇게 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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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코클리 관련 이미지

    물론 이런 긴장은 시카고에서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레이건 시대 8년 동안 인종적 혐오 발언과 긴장은 점점 심해졌다. 그 사이에 백인 권력 기반이 약했던 유대인들이 ‘희생양’이 되는 경우도 빈번히 발생했다. 코클리 사건은 인종 간 긴장과 시카고 정치의 난상을 보여주는 사건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이 넬슨의 그림 사건 바로 일주일 전에 터진 사건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림 사건은 흑인 지역사회에서 코클리 사건이 일어난 데 대한 일종의 복수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시의원 스트리터(Streeter)는 실제로 넬슨의 사건과 코클리 사건을 연결 지으면서 실제로 넬슨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인터뷰를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스트리터의 추측과 달리 넬슨은 유태인이 아니었다.

    물론 이와 다른 주장도 있었다. ‘코클리의 발언이 수정헌법1조에 의해 보호받지 못했는데, 넬슨의 그림은 왜 보호받아야 하는가?’와 같은 식의 주장 말이다. 스프링필드 주의회 흑인 간부회인 코커스(The Black Caucus)도 ‘코클리 (Cokely)가 해고당했다면, 토니 존스(Tony Jones) 총장도 해고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은 단순히 비유적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모든 논리적 사고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의원 스트리터는 “대법원이 말한 그 법이 무엇이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 그림은 결코 다시 벽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사건은 정말로 그의 주장대로 흘러갔다.

    넬슨: 우상파괴주의와 동성애 혐오?

    사실 넬슨(David Nelson)은 시카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별관심도 없었다. 다만 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해롤드 워싱턴의 이미지를 결합한 포스터가 불편했고, 거기에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라.”라는 카피 문구를 달아둔 것이 몹시 불편했을 뿐이다. 기독교인이었던 넬슨에게 이 이미지는 우상숭배적이었고, 신성모독적이었다. 그는 워싱턴을 하늘에서 끌어 내리려고 했을 뿐이었다. New Art Examiner와의 인터뷰에서 넬슨(Nelson)은 ‘이 도시에는 헤롤드 워싱턴이라는 특정 신이 있으며, 자신은 마치 풍선에 하는 것처럼 거기에 구멍을 내고 싶었다’고 하면서 자신을 우상파괴주의자라고 했다. 심지어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초상 역시도 우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독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넬슨은 동성애 혐오적 면모도 갖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학교에서 열린 경연에 게이 남성 에로티시즘 이미지가 걸린 데 대해 매우 심한 불쾌감을 드러낸다. <Mirth and Girth>에 워싱턴의 이미지를 그가 혐오했던 동성애적 요소로 구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사실 “Mirth and Girth”는 시카고에 있는 과체중인 게이 남성들을 위한 클럽의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야만적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마이클 브렌슨(Michael Brenson)은 이 그림이 SNL(토요일 밤의 라이브)에 등장한 제약 없는 풍자마냥 감성이라고는 싹이 말라 있는 그림이라고 평했다. 그림은 시카고의 역린을 건드렸고, 시민들의 폭풍 같은 복수심과 분노를 일으켰다.

    그런데 정작 넬슨의 이미지는 넬슨의 의도와 달리 게이 남성의 행동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게이들은 대개 복장도착자나 크로스 드레서처럼 여성의 속옷을 입지 않는다. 넬슨의 성적 소수성에 대한 이해 부족 덕분에 워싱턴은 게이로 표면화되면서 동시에 여성성으로 표면화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더 복잡해진다. 인종차별주의, 여성차별주의, 성차별주의가 그의 그림에 얽히고설킨 것이다.

    백인 남성들은 수세기 동안 흑인 남성의 사내다움을 훼손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특히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흑인 지도자의 중요성과 힘을 부정하려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흑인 남성성에 대한 거세 이미지 조장이다. 이런 식의 인종차별의 문화가 작동하면 반게이적인 면모를 지니기 마련이다. 백인 남성의 권력에 위협을 주는 흑인 남성의 힘을 부정하려면 백인 들은 흑인 남성의 남성성을 거세하는 이미지를 써야 했고, 흑인 남성은 그러한 백인의 전략에 더 강한 남성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남성성을 수호해야만 했다. 이것이 백/흑 인종주의의 남성판이다. 이 때문에 많은 흑인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동성애 혐오증을 내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오른손에 들린 부러진 연필은 그러한 거세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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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손의 연필이 부러졌다가 다시 편 문제의 연필

    물론 그 그림에 글을 썼던 많은 언론인들은 그 문제를 부각시키고 싶어하지 않았고, 넬슨의 ‘우상파괴주의’에 많은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정작 그 그림은 우상파괴적이지도 않았다. 먼저 워싱턴은 우상도 아니었다. 우상이란 자신의 확고한 위치로 타인을 ‘압도’하는 사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상이란 ‘전통적으로 확고부동하게 고정된 그리고 존경받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카리스마적 권력자’를 말한다. 그래서 우상파괴는 이런 권력 앞에서 억압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시행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그런 권력자의 신성함에 위해를 가함으로써 해방의 효과를 가져오는 행동이다. 물론 넬슨의 마음속에서 워싱턴은 이런 종류의 힘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워싱턴은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영향력을 위해 오래도록 힘겹게 힘을 쌓았지만, 그의 권력기반은 늘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그는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게이, 진보 등의 그룹을 대표했지만, 이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는 불안했으며, 그만큼 자신의 권력 기반도 취약했다. 이런 맥락에서 ‘넬슨의 그림이 과연 우상파괴적인가?’하는 논쟁이 촉발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cese)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은 굉장한 반발에 직면했으나, 정작 그는 가톨릭교도로서 예수라는 ‘인간’의 ‘인간적’ 고뇌를 이야기하려 했지, 우상파괴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름다운 주유소 주유원으로 등장한 고다르의 <안녕, 마리아 Hail, Mary>도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에 직면했지만,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사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창의적 접근에 불과했지, 신성모독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아마 이 사건과 가장 유사한 사건을 꼽으라면, 아마도 멕시코시티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롤랜드 드 라 로사(Roland de la Rosa)의 그림 사건일 것이다.

    1988년 멕시코시티의 현대 미술관에서 멕시코 예술가 롤랜드 드 라 로사는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얼굴과 드러난 가슴을 “국모”이자 “메스티조의 성처녀(성모)” “라 과달루파나”로서 알려진 성모 과달루페의 이미지와 겹친 몽타쥬 이미지를 전시했었다. 격분한 시민 그룹이 미술관으로 들이닥쳤고, 작가를 폭행하려고 미술가의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드 라 로사(De la Rosa)는 출국을 종용받았으며, 박물관(미술관)의 감독은 사임을 강요당했다. 덕분에 예술적 자유의 한계에 관한 4개월간의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 모든 사례에서 작가들은 집단적 환상 또는 상상과 긴장을 연출하려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작업을 진행한 것이었다. 가톨릭 성직자인 모리스 신부는 1988년 7월 타임지에서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 대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자신의 사적 문제의식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작가들의 작업은 개인의 사적인 문제의식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드 라 로사는 멕시코 문화의 위선을 반영하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과달루파나의 그림이 멕시코의 주유소 벽면에 마릴린 먼로의 광택있는 누드와 나란히 서 있기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이미지의 혼돈 속에 어머니/ 성자/ 성모/ 창녀가 종종 서로 얽혀 있다. 성스러운 종교적 그림과 누드 그림이 벽면에 나란히 있는 멕시코인들의 이중기준을 고발하려던 것이 드 라 로사의 실제 의도였던 것이다.

    멕시

    드 라 로사의 그림을 찾을 수는 없었으나, 아마 위의 두 이미지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해롤드 워싱턴은 사람들이 그를 일관되게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지 못했고, 그만한 권력을 확보하지도 못했다. 흑인 지역사회는 실제로 넬슨의 초상화가 자신들의 기억을 모욕하고 잠재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회화를 그린 이면에 명확한 목적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 그림은 훨씬 더 경솔하고 굴욕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넬슨은 스콜세지도 고다르도 아니다. 그의 미성숙한 그림은 오직 도발을 위한 도발에 불과한 것에 그쳤다.

    예술의 자율성이 예술의 나르시시즘으로 연결되면 예술의 사회적 고립은 피할 수 없다. 반면 예술의 비판적 부정성이 사회에 대한 책임성을 방기할 경우 그러한 부정적 자유는 폭력이 된다. 최근 맥심 표지 사진이 문제가 되어 전량 회수되는 사건이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그림 <더러운 잠>이 훼손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 고스란히 보복의 이미지가 등장했다. 릿터라는 잡지 표지에 이자혜 작가 이미지가 실렸는데 피해자가 보는 것만으로 2차 가해가 된다고 전량 폐기 회수한 사건이 있었다. 최근 예술잡지 <B-art> 역시 한 코너가 문제가 되어서 전량 회수를 결정하고 회수 중에 있다.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가 부당한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면서 사회적 책임과 비판적 긴장을 유발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표현의 자유’와 ‘표현의 폭력’이 절대적-적대적 이항 대립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검열의 강화와 폭행의 지속 사이의 단순하고 극단적 이분법을 오갈 뿐이다. 예술가의 자율성이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 이 단순한 양극성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할 순 없을까?

    (다음 글에 계속….)

    필자소개
    <비아트> 에디터. 부산민주시민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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