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시의 반격 :
    노동 혐오에 맞서는 무기
    [노동·문예 노트] 계급언어 권리언어
        2017년 04월 10일 09: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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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계간 『오늘의 문예 비평』(104호, 2017년 봄호)에 「노동시의 반격」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평문을 필자가 수정/보완하여 레디앙에 기고한 것이다. 좀 길지만 나누지 않고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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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워진 노동, 여전한 노동

    정치의 계절이 도래했다. 각자의 생활에 바쁜 시민(들)이 주말마다 ‘광장’과 ‘거리’를 지킨 덕에, 침몰했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조금씩 사회적 인양의 절차를 밟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촛불’이라는 이름의 집단지성은 부도덕하고 비합리적인 권력을 타파하고 주권자의 힘(Power)을 슬기롭게 융기시킨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촛불(The People)의 민심을 특정 정파나 이념적 진영 논리로 왜곡시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시민/주체의 광장행을 촉구한 ‘연대의 심상’은,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적 정치 프레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의제(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촛불의 열망은 정치제도의 혁신이나 권력 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모순을 변혁하고자 하는 근본적 질문을 생성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는 소수의 자본가나 권력자가 사회적 생산수단과 지배형식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수다한 역사적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정치적 민주화나 경제적 민주화는 폭발적 ‘혁명’을 통해서만 입안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작금의 사태와 현실에서 보듯, 주권자의 권리와 공평한 분배 역시 대의적 정치 표현으로만 완수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가 중핵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경제 민주화’는 선거철만 되면 반복되어 부상하는 ‘노욕의 레토릭’과는 무관한 말이다. 굳이 마르크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주체/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산과 소비의 공정한 교환 작용이다. 하지만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자본가 집단의 경제적 교환 방식은 여전히 공정하지 않다.

    이러한 불공정한 경제적 교환 체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합의된 사회적 작용 방식이 있다. 바로 ‘노동(자)조합’이다. 노조는 어긋난 부의 증식/분배 시스템을 전복하고 변혁할 수 있는 정치적 교섭 형식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혹은 ‘노조’라는 말은 금기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노동 혐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다. 실제로 소수의 진보정당과 일부 정치인을 제외하면 ‘노동’이라는 키워드가 현실정치의 핵심 공약이나 대안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촛불 광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인들은 불균등한 부의 처분 방식을 논할 때조차도, ‘노동’ 혹은 ‘노동(자)조합’이라는 용어 사용을 꺼려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정치의 영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일상의 자리에서도, ‘노동(자)’은 ‘혐오’(1)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노동(자)이라는 말은 고위험 직군 산업노동자의 육체적 고단함과 삶의 질적 수준 저하를 환기시키는 표현으로, 혹은 자신의 신체를 구속하고 마모시키는 ‘혐오의 행위’이자 ‘회피’의 대상으로 오해되고 있다. 노동의 성격과 사회적 조건 변화에 따라 정보노동, 인지노동, 비물질노동 등의 용어와 논의가 등장한 지 오래되었지만, 이런 편견은 여전하다.

    왜 그런 것일까? ‘노동’은 무엇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언급하기 어려운 ‘터부의 언어’이자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노동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이라는 용법은 점차 지워지고, 폐기처분되어야 할 모욕적 술어가 되고 있다. 노동 혐오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회적 의제로 공유하기 위해서는 경제학적 측면과 함께, 문화정치학적 논의가 동반되어야 한다.

    노동(자) 혐오, 혹은 계급언어의 박탈 전략

    근대 초기, 노동은 주체를 구속하는 일련의 규범 혹은 도덕률로 기능하였다. 저 유명한『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베버)이 묘파하고 있듯,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윤리는 주술화되고 신성화된 주체 관리 방식 중 하나였다. 노동자의 몸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노동의 가치’를 한층 상승시킨 것.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는 노동자의 지위가 고양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노동 자체의 위상이 조작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탄광 어린이

    20세기 초 탄광에서 일하는 미국 어린이들(사진=한국노동사회연구소)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대공장은 독립적으로 일할 수 없는 개인들, 혹은 순응하는 인간들을 양산하고자 했으며,(2) 노동윤리는 이를 위한 효율적인 신체 규율 기제로 기능하였다. 즉, 노동윤리란, 자본가(들)의 갈망과 행동 원리에 입각하여, 노동자를 ‘근면/성실’이라는 통제된 관습 속에 배치하는 상징질서의 구축 과정이자, 주체 관리(management)의 수사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자본가에 의해 관리되는 노동을 주체의 “도덕을 고양시키는 경험”이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동윤리의 생산’에 관한 바우만의 글을 함께 읽어보자.

    잠재적 노동자들이 자유의 상실에 저항함에 따라 노동윤리의 가르침이 더욱 뜨겁게 설파되었다. 설교의 목적은 그 반감을 다스리는 데에 맞추어졌다. 노동윤리는 하나의 수단이었고, 그 수단이 이르려고 하는 목적은 공장제도에 순응하고 그에 따라 독립성을 잃게 하는 것이었다. (…) 이제 성실한 노동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삶의 방식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돈을 더 많이 버는 수단으로 선전되었다.(3)

    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노동윤리는 “노동자들”의 “자유”를 통어하는 수단으로 “뜨겁게 설파”되었고, 이는 근대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문화적 기제로 작동하였다. 물론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는 더 이상 금욕적 노동윤리에 포섭되지 않는다. 때로는 세속의 논리를 가동하기도 하고―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시장자본주의 시스템의 폭력적이고 투기적인 축적 방식에 저항하기도 한다. 노동(자) 해방을 위한 정치적 대반격이 노동자간의 결속과 조직적 연대를 통해 현실화된 것이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과 계급투쟁의 조직성이 극대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70년대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출 주도형 산업화가 가속화되었고,(4) 이 과정에서 자기 삶의 자리(시간/공간)와 공정한 몫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의 취약성과 ‘노동(자)로서의 계급적 정체성’이 새롭게 인식되게 되었다. 노동자의 계급인식은 계급언어의 획득과 함께 구성되며, 계급언어는 현실 변혁의 직접적 목소리를 분출하는 조건/계기가 된다. 예를 들어, 영화 <파업전야>(이재구 외, 1990)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1995)은 노동자의 저항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삼십 여 년이 지난 지금, 현재의 삶은 어떠한가. 주류 경제학에서 제시하는 통계 수치를 검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노동 환경이 1970~80년대보다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전 지구적 세계화에 따른 자본/노동의 이동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노동자 계급의 내적 분화와 노동조합의 분열 역시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계급적 주체와 비계급적 타자, 내부 노동자와 외부 노동자 등의 경계 구획은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을 와해시키고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에 균열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 미래 산업의 방향과 가치를 논하는 자리에서도 ‘노동의 종언’ 담론이 ‘노동의 정치’적 요구를 압도하는 모양새다.(5)

    이와 같은 상황에서 노동(자)에 대한 혐오(excitable)는 더욱 심화되며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혐오는 근대 자본주의의 혹독한 육체노동의 잔상에서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즉, ‘노동(자) 혐오’는 개인의 정서와 육체를 마모시키는 3D업종에 대한 기피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 혐오(초기 자본주의 시대와 같이) ‘노동윤리를 통해 노동자의 감성 체계와 노동조합의 조직 역량을 통제할 수 없는 시대의 새로운 노동자 관리 장치이다. 1970년대 이후의 노동 총공세(총파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 노동자의 계급적 정체성 인식과 연대 의식은 독점적 자본(가)에 굴복하지 않는 ‘강력한 무기’로 기능해왔다. 노동자 계급의 자기 인식은 그래서 ‘저항의 프롤로그’가 된다.

    이에 비해, 자본가의 ‘관리언어’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거칠고 폭력적인 집단으로 재현한다. 노동이라는 용어, 혹은 노동자라는 이름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부르주아적 교환 방식의 안정성에 균열을 주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연대=저항’의 등가 관계와 상승 효과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것을 우선 전략으로 삼는다. 노동 혐오 현상을 경제학적 주제만이 아니라, 문화정치학적 차원에서 함께 분석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가 집단은 ‘노동 유연화’라는 기업친화적 명분을 통해 노동자의 신분과 자격을 찢고 분할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내부 노동자와 외부 노동자는 상대방의 ‘이름’을 타자화하면서 연대의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그렇다면, 노동, 혹은 노동자에 대한 혐오는 노동자 주체의 계급언어를 박탈하고자 하는 치밀한 경영 전략과 다르지 않다. 언어는 의식을 구성한다. 계급언어의 박탈은 계급의식의 소거와 탈색에 영향을 미친다. 더 이상 노동자라는 계급의식을 지니지 않도록 하는 것이 노동 혐오의 가장 내밀한 사회 통치 전략이다.

    계급언어의 환수: 노동 혐오의 탈계급성과 정치적 레토릭

    노동 혐오와 관련해서, ‘언어―의식―정치’에 관한 논의를 조금 더 진전시킬 필요성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매끄럽고 순수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특수한 ‘이름’을 부여하고 입안하는 방식에 따라 ‘권력’으로 작동한다. ‘노동자’라는 이름을 지우고 비정규직 근로자, 계약직 근로자, 파견 근로자 등의 이름을 등기하는 순간, 노동자 자신의 계급언어는 삭제되고 박탈당한다. 여러 가지 조건 속에서, 노조에 가입할 수 없거나, 법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는 취약한 노동 조건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혐오 발언은 무시무시한 ‘상처’로 기입된다.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서 “이름은 타자에 대한 신조어의 전달로, 그리고 그 전달 속에서 고유한 신조어의 제공으로 출현”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녀는 혐오 발언이 “말의 순간을 통해 상처를 입히”는 행위이며, 그리고 “그 상처를 통해 주체를 구성”하는 “어떤 호명적인 기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6) 다시 말해, 혐오 발언이란 독특한 호명 작용과 수행 효과를 동반하는데, 이는 주체의 삶과 신분을 탈색하고 소거하는 (지배자의 관점에 입각한) 신조어의 발명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노동자 계급’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근로자 개인’이라는 신조어를 개발하는 방식이다.

    노동(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 문제적인 것은, 이것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심화하고 재생산하는 ‘노예(제) 시스템’으로의 회귀적 현상을 보여주는 문화적 증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베버를 경유해보자.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노동 윤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 노동은 노예의 몫이었다. 노동은 시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는 경멸과 혐오의 대상/존재 자체였다. 당연히, 시민과 노동자는 엄밀하게 구분되었다. 물론 ‘노예제 사회’인 고대 그리스와 ‘민주 공화정’을 표방하는 현대 사회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노동 혐오의 사회문화적 함의를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차원에서 사유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시민인가, 노동자인가.

    자본(가)에게 자기 ‘시간’을 위임한 노동자의 삶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를 위한 노동을 폐기할 것을 주장한 것 역시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비판적이고 몰지각적 노동에 종속된 존재(노예)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노동을 아예 포기하거나 끝없이 유예하면 될까? 그렇지 않다. 노동(자)의 사회적 존재 양상과 관계 구성에서 시사점을 찾아보자. 노동자 주체에게 기입되어 있는 ‘(당연한 것처럼 가해지는) 착취와 불평등’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을 통해 타파되어 왔다. 하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지배 집단의 교묘한 통치술은 노동계급의 연대와 권리 주장이 발화되도록 관망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노동 혐오는 노동자 계급을 분할하고 관리하는 효율적인 ‘무기’로 기능한다. 계급과 비계급, 정규직과 비정규직, 관리하는 노동자와 일하는 노동자를 구분하고,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배분한다. 전자의 영역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들은 ‘계급 의식’을 부여받기 어렵고, 전자의 영역을 성취한 이들은 후자의 삶과 분리된 ‘신분 의식’을 고양하며 재생산하고자 한다. ‘나’(안)와 ‘너’(바깥)의 명료한 경계 구획과 타자화는 계급언어를 탈각한 새로운 ‘이름’(신분언어)을 통해 공고화된다. 버틀러는 미셜 푸코를 경유하면서 혐오 발언의 창시자는 발화 주체가 아니라, 특정한 이름으로 도래하는 권력(자)이라고 말하고 있다.

    혐오 발언을 하는 주체는 그런 발언에 분명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주체는 그 발언의 창시자가 아니다. 인종차별 발언은 관습의 적용을 통해 작동한다. 그것은 순환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말함을 위해 주체를 필요로 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는 주체나 사용되는 특정 이름을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않는다. (…) 권력은 위장을 통해 작동한다. 즉 권력은 스스로가 아닌 것으로 출현하게 된다. 아니, 권력은 어떤 이름으로 출현하게 된다.(7)

    다시 버틀러이다. 그녀는 혐오 발언의 ‘사적 책임’과 권력적 ‘작동 방식’을 구분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혐오 발언의 주체를 처벌하는 것은 ‘각종 혐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인식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혐오의 호명 방식은 복잡한 상황 맥락에 따라 다르게 운영되지만, 검열과 추방의 매커니즘은 유사하다. ‘동성애’, ‘장애인’ 등의 용법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라는 말은, 국가 자본주의의 경제 성장을 방해하고 저지하는 불온한 이름으로 호명된다. 노동자의 계급적 정체성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정당하게 융기하지 못하고 자기 검열과 배제의 논리를 따라 순환할 때, 노동 혐오는 일련의 권력(작용)으로 입안되는 것이다.

    프란츠 파농 역시 혐오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적으로 배양되는 것”(8)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혐오를 정면으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의 부재 혹은 상실에서 ‘혐오 발언’이 지속됨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파농의 지적은 개개인에게 부여된 윤리적 태도를 지적하는 말이 아니다. 버틀러가 주장한 바와 같이, 혐오 발언 생산의 법적 근거와 논리를 보증해주는 것은 국가(“국가는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이다. 노동(자)이라는 이름은 강력한 저항성과 연대의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국가는 시장자본주의의 요구를 인용하면서, 노동자의 계급적 형제애를 갈라치고 때리고 또 순화한다. 즉, 국가는 노동 혐오 발언이 막힘없이 유통될 수 있도록, 법률적이고 제도적인 보증(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자본/국가’라는 어법을 자주 쓴다. 국가는 노동자를 ‘분노―연대―저항’의 이름이 아니라, 끊임없이 ‘순응’하고 ‘생산’하는 건실한 ‘근로자’로 새롭게 호명한다. ‘노동자’라는 이름은 자기 자신에게 가해지는 강제된 업무와 착취의 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노동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계급적 존재이다. 이에 비해 ‘근로자’는 계급적 정체성을 반영하지 못한 비-계급적(신분적) 존재이다. 계급과 비-계급으로 찢어진 노동 공동체는 단일대오의 저항성을 구성하고 확장하기 어렵다.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계급투쟁의 현실적 한계가 지적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그렇다면, 노동 수탈적이고, 자기 증식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어긋내는 문화적 실천 방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동자라는 ‘권리언어’를 회복하고 창안하는 일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또 부당한 노동 탄압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언어를 발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지시하는 계급언어를 탈취한다. 이를 통해 저항의 언어를 순화시킨 신분언어로써 ‘근로자’ 개인을 탄생시킨다. 노동, 혹은 노동자에 대한 혐오가 ‘노동자의 계급언어’를 박탈하는 정치경제학적 격발 행위라고 한다면, 역으로 노동자의 계급적 정체성과 계급언어를 회복하는 노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계급언어의 환수는 노동자 계급의 권리를 자각하는 권리언어의 획득에서부터 시작된다. 권리언어는 노동자(proletariat)의 계급언어를 감지하고 지각하는 역할을 하는 한편, 비-계급적 위치에 놓여 있는 불안정한 노동자(Precariat)의 취약한 삶을 감각하고 이해하는 수행 활동을 구성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삶을 스스로 고양할 수 있는 권리언어의 발화 가능성을 구성하는 문화적 언술 양식은 무엇일까?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노동시에서 찾고 있다.(9)

    노동시, 혹은 몸의 중심: 국가/자본의 노동 혐오를 습격하는 권리언어

    대단히 역설적인 현상이지만, 한국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근대화 과정은 박영근, 백무산, 박노해 등과 같은 뛰어난 노동자 계급 출신의 시인을 출현시켰다. 한국의 진보적 문예운동사의 관점에서도 이를 의미 있게 평가할 수 있지만, 문예비평이나 학술적 접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작품 활동이 노동(자)의 계급적 정체성과 언어를 구성하는 문화적 실천 양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성혁 평론가는 『미래의 시를 향하여』에서, 노동시의 전위적 성격을 이야기한 바 있는데―노동문학의 소재주의적 논의를 극복하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비평적 작업이다―, 그가 말하는 노동시의 전위성은 노동(자)의 계급언어를 통해 저항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발아하는 노동의 현장성과 수행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시의 현장성과 수행성은 노동자의 계급언어와 권리언어를 구성하는 중요한 내적 원리가 된다.

    1980~90년대 노동시는 ‘노동’하는 주체의 계급적 정체성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관계 변화를 촉구하는 계급언어의 생산이자 공유 양식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노동자 계급의 분화와 노동조합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노동시’의 사회문화적 효용(성) 역시 쇠퇴한다. 왜냐하면 ‘프레카리아트’로 호명되는 비-계급적 존재가 증가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계급의식이 선명한 프롤레타리아나 룸펜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단순 비정규직과 달리―,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을 노래하고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자본/국가의 착취 구조와 불평등을 개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당대의 노동시’는 현실 변혁적 힘이 퇴색하거나 결여된 ‘무력한 문예양식’으로 지적받기도 한다. 근자에 나온 정세훈 시집 『몸의 중심』에 수록된 「안전망이 될 수 있을까」라는 작품에는, 이에 대한 진솔한 고민과 문제 인식이 담겨 있다.

    이런 시를 쓴다는 것이
    80년대 썼던 시를
    다시 쓴다는 것이
    안전망이 될 수 있을까

    충남 천안 유성기업 앞 굴다리 위
    여차하면 뛰어내려 목을 매겠다는
    목에 밧줄 건 천막 고공투쟁
    아슬아슬 조마조마한데

    야간노동 폐지 노사합의안 지키지 않고
    노조 파괴 공작에 나선 자본이 있다고
    분도의 시를 쓴다는 것이

    ―정세훈, 「안전망이 될 수 있을까」 부분(36-37쪽)(10)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노동자의 위태로운 삶에서 확인할 수 있듯, 노동시의 목표는 계급언어의 회복을 통해 인간의 삶을 대지 위에 안착시키는 것이다. 즉, 자본/국가의 약탈과 계급 집단에 대한 혐오와 구속(“노조 파괴 공작”)으로부터 ‘인간의 시간’(몸)을 자립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이라는 용어가 경멸과 혐오의 지시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1980년대 식의 ‘노동시’ 한 줄이 과연 자본가의 법적 조치와 정치적 공세를 넘어서는 “안전망”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특히, 노동시를 통한 계급언어의 재탈취가 ‘노동자 계급’과 ’비-계급적 존재‘를 함께 해방시킬 수 있는 언술 양식인지에 대해서는 응답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시의 시효가 만료된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시는 ‘노동’을 주제로 삼고 있는 서정시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즉, ‘노동’이라는 소재의 사회적 중량감이 노동시의 존립 근거를 보장하거나 확정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동시대의 노동시는 무엇이며, 또 어떤 세계를 지향해야 하는가. 1970~80년대 노동자 시인들이 노동계급의 언어를 치열하게 구성하고 발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노동시 역시 노동자 계급의 취약한 삶의 자리를 탐색하고 저항의 가능성을 발아할 수 있는 주체의 계급언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의 계급언어를 회복하는 작업과 함께, 계급적 존재의 권리언어를 확보하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즉, 2010년대 노동시의 시대적 감수성(Sensibility)은 계급언어와 권리언어를 더불어 담보하는 미적 실천 속에서 새롭게 융기될 수 있는 것이다. 정세훈 시인의 신작 시집 몸의 중심이 흥미로운 까닭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인식과 현상을 아우르고 성찰하면서도, 비-계급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제작 「몸의 중심」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끊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난 곳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

    ―정세훈, 「몸의 중심」 전문(26-27쪽)

    캡처

    시인은 시집 『몸의 중심』에서 노동(자)의 계급적 인식을 재확인하고 발현하는 작품을 제시하는 한편, 비-계급적인 존재에 대한 따뜻한 사유와 감성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몸의 중심이 뇌, 폐, 심장이 아니듯, 세상의 중심 역시 밤낮 없이 가동되고 생산되는 자본/국가의 경제적 심장부가 아니다. 또한 우리 몸의 중심이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난 곳”인 것과 같이, 세계의 중심 역시 계급언어를 부여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취약하고 부서진 삶의 존재와 자리라는 것을 정세훈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시대의 노동시는 노동계급의 공통된 계급적 인식을 담고 있는 계급언어를 타고 넘으면서, (노동자라는 용어를 부여하기 어려운 파견 및 용역, 비정규직, 실업자, 노숙인 등과 같은) 계급적 존재의 삶과 부서진 생의 조건까지 감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권리언어를 구성하는 미적 형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자본의 정교한 통치 전략 속에서 노동은 여전히 혐오와 경멸의 대상으로 왜곡되고 있다. 노동 혐오 발언은 지배 집단의 감성 체계와 언술 양식을 재생산하는 통치 전략, 다시 말해 국가/자본의 축적 시스템을 영구화하고자 하는 지배적 언술 체계의 ‘자동화 전략’(프랑코 베라르디 비포)과 다르지 않다. 시는 지배 집단의 이러한 자동화된 정보 생산 체계를 정지시키는 ‘미적 파업(sabotage)’을 감행한다. 특히, 노동시는 국가/자본의 통치 전략을 노골적으로 위반하고 어긋낸다는 점에서, 노동 혐오에 맞설 수 있는 우리의 핵심 무기가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노동시는 자본/국가의 규범과 질서가 어떻게 운영되고 영속화되고 있는지를 ‘몸’(현장성과 수행성)으로 감각하는 반자본주의적 실천 양식이다. 노동시는 ‘몸의 중심’, 혹은 우리 사회의 “아픈 곳”의 신음소리를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는 섬세하고 인간적인 촉수를 지니고 있다. 이제, 노동시를 거점으로 노동 혐오 발언에 대한 새로운 반격을 준비할 차례이다. 나와 당신의 ‘시’는 이미 장전(Reload)을 마쳤다.

    <참조>

    1. 마사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특정 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 사용된다. 혐오 발언이 문제적인 것은 지배 집단이 피지배 집단을 배제하거나 추방하는 언어심리학적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사 노스바움, 조계원 옮김, 『혐오와 수치심: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민음사, 2015, 200-201쪽.

    2. 앙드레 고르의 다음과 같은 표현은 참고가 된다. 애덤 스미스는 많은 공장주들이 “반(半)은 천치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려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며, 마르크스 역시 자본에서 자동화된 작은 공장에서의 노동을 노동자들의 정신적·육체적 능력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근대 자본주의의 대공장은 “괴물들” 혹은 “독립적으로 일할 수 없는” 개인들, “바짝 야위고 뒤틀린”, “소진된”, “거의 군대와 같은 규율” 순응하는 인간들을 양산해내는 장소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 이현웅 옮김, 『프롤레타이라여 안녕』, 생각의나무, 2011, 33쪽.

    3. 지그문트 바우만, 이수영 옮김, 「노동의 의미: 노동윤리의 생산」, 『새로운 빈곤: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푸어』, 천지인, 2012, 40-44쪽.

    4. 구해근, 신광영 옮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2002 참조.

    5.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는 박형준, 「정치적인 것의 만회」, 『오늘의 문예비평』(96호, 2015)를 참조할 것. “노동계급은 ‘노동의 유연화 정책’에 의해 심각하게 분열/분할되었으며, 또 동시대의 노동운동은 시민과 대중의 동반지지 효과를 창발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즉, 노동운동만으로는 더 이상 삶의 혁명을 추동하는 봉기의 자원이나 ‘사건’을 구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 ‘노동의 종말’은 기실 ‘노동의 정치’에 종언을 고하는 ‘탈정치적 예언록’이었던 셈이다.”

    6. 주디스 버틀러, 유민석 옮김, 『혐오 발언』, 알렙, 2016, 55쪽.

    7.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74-76쪽.

    8. 프란츠 파농,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2003, 68쪽.

    9. 물론 그것이 반드시 ‘노동시’와 같은 문학일 필요는 없다. 예들 들어, 장-피에르 다르덴 & 뤽 다르덴 감독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노동자의 권리언어가 어떤 방식을 통해 구성되고 집약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노동문학의 다양한 장르 중에서 ‘노동시’가 중요한 까닭은 ‘노동시’의 현장 감각이 직핍한 언술 형태로 표출되는 데 있다. 그것은 현장성과 수행성의 시학에 근거한다.

    10. 정세훈, 「안전망이 될 수 있을까」, 『몸의 중심』, 삶창, 2016.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을 인용할 경우 본문 인용문에 쪽수만 표기함.

    필자소개
    문학평론가,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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