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TX 374년의 투쟁, 이젠 끝을 보자
    [인터뷰] KTX 김승하 지부장과 정미정 상황실장
        2017년 04월 05일 08: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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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X 여성승무원의 해고와 비정규직 투쟁, 10년이 훌쩍 넘었다. 많은 이들이 기억을 하고 있지만 또 많은 이들은 잊고 있을 수 있는 기억들이다. 누군가 말했다. 기억하지 못하고 망각할 때 우리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지금도 진행 중인 그 KTX 투쟁에 대해 이근원 공공운수노조 연대사업실장(레디앙 대표)이 철도노조 KTX 열차승무지부 김승하 지부장, 정미정 상황실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근원 실장으로서는 세번째의 인터뷰이다. 많은 관심 부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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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자곤 했지만 막상 시간이 다가오니 먹먹했다. 해서 한번 연기했다. 같은 사업장의 노동자를 3번이나 만나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2006년 11월에는 그해 3월부터 투쟁을 시작한 민세원 지부장을, 800일이 지난 2008년 5월에는 오미선 지부장을 인터뷰하고 레디앙에 글을 실었었다.

    “우리 아직 안 죽었어요. 독하죠?” 당시 오미선 지부장과의 인터뷰 제목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죽지 않고 독하게(?) 4000일을 넘기고 있는 3대 김승하 지부장과 처음부터 지금까지 총무만 담당하고 있는 정미정 상황실장을 함께 만났다. 20대 중반을 막 넘겨 시작한 그들이 이제 40대를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이런 기막힌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민세원도, 오미선도 “당당함”을 힘주어 말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벌써 수년이 지난 얘기다.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처음 투쟁을 시작할 때 같이 한 <KTX 파업투쟁 연락망>을 보여 주었다. 43명의 연락처가 적혀 있다. “도경이는? 효미는? 지선이는”하고 한 명씩 근황을 물었다. 대부분 시집가서 아이들을 낳고 살고 있다. 다른 데 취직한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이들은 11년째 투쟁을 하고 있다. 이들이 4천일을 버텨 온 힘이 도대체 무엇일까? (인터뷰 내용은 김승하 지부장, 정미정 상황실장이 함께 얘기한 것으로 굳이 누구의 말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정미정 상황실장은 지난 2008년 오미선 당시 지부장과 서울역앞 30미터 조명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진행하기도 했다.)

    김승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불법파견, 외주화하라는 대법원 판결

    당연히 끝나도 벌써 끝났어야할 투쟁이었다. 전체 길이만 380미터, 좌석 929개, 보통 1천명 이상이 타는 KTX에 승무원은 겨우 4명이다. 그 중 철도공사에 직접 고용된 정규직은 꼴랑 열차팀장 1명이다. 혼자서 18개의 승강문을 수동으로 취급하고, 5호차와 14호차에 있는 비상사다리를 설치하고, 모든 안전업무를 취급할 수 있을까? 그런데 대법관 이인복, 김용덕, 고영한, 김소영은 그렇게 말했다.

    2008년 12월 서울 중앙지법과 이어 2011년 8월 서울고등법원의 불법파견을 인정한 승소 판결을 2015년 2월 26일 대법원이 뒤집었다. “열차팀장이 KTX 차량 전체를 순회·감시하면서 안전업무를 수행한 것과 비교하여, KTX 승무원은 이와 별도로 각 담당 구간을 순회하면서 승객 응대 등의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열차팀장과 같이 업무를 보는 3명의 비정규직은 안전과 관계없는 서비스만을 담당해야 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은 공기업들이 공공부문 선진화라는 미명하에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해당 업무를 자회사 등으로 외주화하여 사업비를 확대하는 방식에 손을 들어주었다.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정치적 판결이었다. 위장도급과 불법파견을 승인한 것이다.

    한 열차에 타고 있는 이들은 승객 응대뿐 아니라 승객 안전에 대한 역할도 부여받고 있다. 철도공사도 그걸 안다. 그 역할을 외주화하고,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은 곧 승객의 안전을 위협한다. 만약의 경우 사고가 발생해도 3명의 비정규직은 승객 응대 등의 서비스만을 하고 있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건 세월호에서 본 바로 그 장면이다. 세월호의 선박직 선원 15명 중 무려 9명이 비정규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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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정미정 상황실장 오른쪽이 김승하 지부장

    죽음을 불러 온 대법 판결

    지난 2008년 12월 서울 중앙지법은 1인당 180만원을 우선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KTX 승무원들은 코레일 지시를 받았고, 안전 업무를 담당해 왔으며 따라서 코레일 근로자로 인정된다는 판정으로써 오랜 투쟁으로 지쳐 있는 KTX 승무원들의 투쟁에 커다란 힘을 실어주는 판결이었다. 이 돈은 2012년 11월 철도공사가 낸 소송에 의해 임금지급 중단 결정이 나올 때까지 지급되었다. 지난 4년간 1인당 약 8,640만원의 임금을 받은 셈이다. 그런데 “KTX 여승무원을 한국철도공사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1,2심을 뒤엎는 대법원 판결이 나자 철도공사는 지난 4년간 지급되었던 임금 반환에 나섰다. 당연한 임금으로 지급받았던 돈을 이제 와서 내놓으란 말이다.

    이런 대법원 판결에 따라 2015년 11월 27일 최종적으로 패소 판결이 확정되었다. 작년 총선일인 4월 13일 내용증명이 발송되고, 올해 1월 법원의 지급명령서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 3월 현재 이자까지 1억원이 넘었어요. 한 달에 백만원 정도씩 오르고 있어요. 법원 직원이 집에 밤 10시 넘어서 찾아오기도 해요. 그 밤에 문이 부서질 듯 두들기기도 해서 놀라고 무서워요. 현재 3분의 2 정도는 수령한 것 같아요. 철도공사가 개인에게 소송을 건 거에요, 개인채무건이기 때문에 지급명령서를 법원을 통해서 전달하는데 법원직원이 일요일 아침이든 뭐든 가리지 않고 사람이 집에 있을 시간에 마구 전달하고 있어요. 저는 남편이 반송시켰는데 법원 직원이 “빨리 받아서 대비하시는 게 낫지 않냐?”는 식으로 협박했다고 해요.

    “집에 없다”고 하니까 “그럼 가출했냐?”고 막말을 했대요. 법원 홈페이지에 공시하면 2주간의 기간을 거쳐 자동으로 소송 진행이 된다고 해요. 그러나 현재 상황으론 사실상 결론이 난 상태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럴 경우 바로 압류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해요.

    4월 4일 대전지방법원에서 KTX 승무원 부당이득금 조정이 있었다. 다행히 판사의 인식이 좋았던지 6월 29일로 조정일자가 잡혔다. 그러나 법원 패소 판결이 나온 직후 34명 중 부산의 한 조합원이 압박을 견디지 못해 2015년 3월 1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돈에 대한 압박도 컸겠지만 복직할 날을 꿈꾸며 11년 동안 투쟁을 해온 것에 대한 정당성이 부정당한 것 등에 대한 좌절감이 컸을 것이다. 둘은 며칠 전 돌아가신 분의 2주기에 다녀왔다고 했다.

    우린 남아있는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처음에 이철 사장 만나러 갈 때 우리를 맞이한 화이바를 쓴 전투경찰을 보고 놀랐어요. 경찰에게 뜯기고, 성희롱도 당하는 등의 일을 당했어요. 이런 일을 처음 겪어서 너무 힘들어 했어요. 절반은 멘붕이었고, 그때 친구들이 많이 나갔어요. 그 다음 국회의원회관 점거하고 끌려 나갈 때도 충격이 컸어요. 우리를 압박하려고, 48시간 꽉 채워서 유치장에서 내보냈구요. 이렇게 3년간의 힘든 투쟁을 다 버티고 겪어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믿음도 있고, 강한 사람들만 남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비록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이 났지만 꿋꿋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살은 너무 충격이었어요. 그 후 모두 심리 상담을 받기도 했어요.

    정말 걱정되는 건 조합원들이 지금도 계속 불안불안한 상황이라는 거에요. 2주기는 조용하게 우리들끼리 치뤘어요. 시국미사 때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광화문 발언 때 알리기도 했어요. 처음 1주기는 가족분들도 싫어했고, 우리도 늦게 알아서 우리끼리 같이 모여 추모하고 기도하는 정도에 그쳤어요. 대법원 판결이 나고 2주 후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니 그것이 원인일 수밖에 없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조합에서 받는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도 있구요. 밤 10시 넘어서 법원에서 나왔다고 문을 두드릴 때, 내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덜컹하고 두근거려요. 우리 조합원인 언니가 자살 후, 우리가 관심을 못 가졌다는 죄의식이 있어요. 나 또한 내 삶을 사느라 언니에게 관심을 못 가졌어요. 언니가 그렇게 되고나서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안면마비도 오고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가기도 했어요. 정말 미친 년 같을 때가 있어요.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길을 걷다가 눈물이 나요.

    투쟁 중에 동료를 잃는다는 것이,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아시는가? 난 1998년 IMF 발생 직후 강제 퇴출된 동아엔지니어링의 신길수 위원장 추모사업회를 계속 해 오고 있다. 그 역시 조합원의 암담한 미래를 고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석모란공원에 묻혀 있는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다. 이미 법원의 판결이 끝났는데 길이 있을까? 34억원을 해결할 수 있는 길, 아니 그 이전에 정규직화의 길이 가당키나 할까?

    아름다운 20대를 잃어버린 사람들

    지난 2월 20일 이들은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기 위해 토론회를 했었다. 그 때 ‘4천일 투쟁에서 무엇을 잃었나?’라는 설문에 33명 중 23명이 ‘나의 아름다운 20대’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청춘은 어디로 갔고,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 뭘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어요. 그게 제일 어려워요. 그래서 토론회을 했어요. “지부장으로써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철탑에 올라가고, 삭발하고 했었어요. 지금도 물론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철탑에도 당장 올라갈 수 있어요. 그러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 날 종교계와 여성계 등에서 철도공사를 만나겠다고도 하고, 스토리펀딩 등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어요. 스토리펀딩의 목적은 계속 투쟁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 보자라는 의미에서요.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고 싶어요. 요즘 카드뉴스도 만드는데 그런 거 도움 받고 싶어요. 제대로 사실을 알리는 것, 홍보와 여러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이런 것에 도움을 받고 싶어요.

    우리의 투쟁은 비정규직문제, 안전문제, 여성문제 등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에요. 구의역 참사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정권이 교체가 되고 이런 부분에서 진심을 갖고 고민할 수 있는 새 사장이 취임을 하게 되기만을 바래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 그 쪽에서 안 받아들일 수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데, 이 문제를 많이 알려서 ‘이건 정말 심하다. 큰 문제다’라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 형성이 필요해요. 우리의 투쟁은 단순한 투쟁이 아니에요. 우리의 투쟁은 전체 비정규직과 공공서비스 부분의 안전성 확보에 있어서 절대 늦춰지거나 유보될 수 없는 투쟁이에요.

    며칠 전에도 열차가 급정거해서 승객이 넘어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그런 일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아요.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 줬으면 해요. 우린 조만간 본격적인 투쟁을 할 거에요. 그 때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해요. 만약에 1인당 1억원에 달하는 돈을 강제로 토해내도록 하는 소송이 이대로 진행되면 우리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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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다는 신념하나로 버텨 온 4천일

    말이 11년이지 실제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넘게 투쟁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그것도 34명이 싸워 왔으니 374년의 세월이 담겨져 있다. 이들의 투쟁은 2006년 3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2003년 12월 세계에서 5번째라는 고속열차인 KTX에 1기 승무원으로 입사했다. KTX는 2004년 4월 1일 개통했다. 경쟁률도 무척 세서 2004년 13.3:1, 2005년엔 136:1이나 되었다. 350명 중 1명으로 뽑힌 그들에게 철도청은 뽑을 때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준다는 약속을 깨고, 변경된 자회사인 자회사로 옮기기를 강요했다. 승무원 전원은 이를 거부했다. 승무원들은 노조를 만들고, 2006년 철도노조의 3.1 파업에 참여했다. 투쟁은 4일 만에 끝났지만 이들의 투쟁은 지속되었다. 그러자 3월 7일 철도공사는 70명에게 직위해제를 알리는 문자를 보냈다. 이어 3월 16일 이들을 대신할 승무원들을 신규로 채용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간부들의 회유에 넘어가거나 파업을 중단했다. 철도공사는 5월 19일 남은 280여명을 정리해고 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투쟁이 이어져 오고 있다.

    – 우리가 옳으니깐 당연히 우리가 이길 거라는 생각만 했어요. 그만큼 순진했던 거죠. 우리가 철도공사에 사기를 당한 거고, 잘못한 게 없고,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왜 안 되지? 우리가 당연히 이겨야 하는 데 왜 안 그렇지? 옳은 건 맞는데 왜 안 풀리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비정규직문제, 안전문제, 여성문제 등에 대해 고민하고 그걸 위해 투쟁하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역사에 기여할 수 있다면 왜 선택을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요. 시작 자체가 단체로 파업을 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맞고 우리를 지지하는 힘이 이렇게 많은 데 안 될 일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언니, 동생 등 서로 같이 하는 사람들이 힘이에요. 그 전엔 간부들이 겪는 고통도 몰랐고 난 나만 잘 투쟁하고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에요. 최근 1, 2년간 버틴 힘은 ‘우리’ 때문이에요. 이젠 한 명이라도 아프면 정말 큰일 나요.

    주위에서 “니네 아직도 그거 못 이겼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시간에 다른 데 취직했겠다”, “정규직을 공짜로 먹으려 한다.” 라는 말도 들어요. 그런 얘기들을 계속 들으니 ‘내가 틀렸나, 쟤네들 말이 맞나?’ 하는 혼돈이 오기도 해요. 내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내가 투쟁을 하는 이유가 옳은데 현실에선 계속 좌절되면서 내가 믿었던 신념에 대한 혼란이 들기도 해요.

    “아직까지도 해결 안 된 거야? 떼쓰는 거야?” 라는 등의 얘길 하는 사람들은 상황을 모르니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우린 정말 1년 뒤 정규직 약속을 받고 들어갔고, 당연히 열차안전을 위해서 싸운 건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고 싶어요.

    11년 전으로 돌아가도 또 투쟁했을 것 같아요. 어려운 길이라도 옳으니깐 가야 하는 길이니깐 아마도 투쟁을 선택했을 거에요. 그 사람의 성격이 그 사람의 인생이에요. 내 성격이 잘못된 것을 보고 참지를 못하고, 어려운 길이라도 옳으면 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니깐 아마도 투쟁을 선택했을 거에요.

    소송투쟁으로 진행된 중간에 다른 일을 하려고 해도 취업이 안 되었어요. KTX 이력을 쓰면 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그 이력을 내가 안 쓸 수는 없었어요. 그건 내 이력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깐요. 그러던 중 한 곳에 취업이 되었는데 그때도 나에게 “너 여기서도 노조 만들 거냐?”라는 질문을 받는 등 어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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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발 뻗고 자고 싶다

    이 투쟁이 한국 사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이들의 투쟁으로 인해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알려졌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 투쟁도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먼 훗날의 얘기다. 언젠가 투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을까?

    – 솔직히 그냥 두발 뻗고 자는 거에요.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거,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거에요. 대법원 패소판결 이후엔 돈 문제 때문에 이렇게 계속 투쟁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1심에서 임금을 지급하라는 결론이 안 났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지금에 와선 빚이 없었을 거에요. 그런데 그때 빚을 안 졌다고 해도, 한마디로 우린 빚이 없어도 계속 투쟁했을 거에요. 속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노동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회사 취업 때 무엇을 알아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내가 계속 투쟁하는 이유는 헛짓거리를 했다는 소릴 듣고 싶지 않아서에요. 이걸 관두는 순간 내가 투쟁해온 것들과 그 시간이 아무런 의미 없이 허비된 것으로 되어 버리니깐요. 친구가 “너 왜 거기서 빨갱이 소리 들으면서 있냐?”라는 얘기가 사실이 되도록 하기 싫어요.

    언젠가 남자 대학동기가 울면서 전화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한창 투쟁 중일 때인데 “미안하다”고 얘기했어요. “니네가 이렇게 싸우는 게 맞는 거 같다. 난 아직 용기가 없어서 그렇지만 니네가 하는 행동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얘길 들었어요. 회사에 입사 해 보니 우리가 왜 싸우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었어요.

    더 이상 나처럼 이런 문제로 투쟁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투쟁했어요.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계속 투쟁할 거에요. 독하다는 얘기 듣는데 사실 맞아요. 독해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요.

    가끔 KTX를 타서 승무원들을 보면 짠하고 불쌍한 느낌이 들어요. 아무것도 나아진 거 없고, 우리가 일했을 때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지상의 스튜어디스라고 홍보를 많이 해서 처음에 우리를 다들 부러워했는데 사실은 비정규직에 대우도 형편없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봐주는 것을 생각하며, 내 스스로가 당당하기 위해 우리들끼리 규율을 만들고 공부하고, 청소하고 등등 엄청 노력을 했는데 결국 그 노력이 아무런 결과가 없게 된 것이 아쉬워요.

    지금 관광개발에 있는 승무원들에게 우리가 싸우고 있을 때는 일부러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임금인상해주고 했는데, 우리가 소송 들어가자마자 그 쪽도 임금동결하고 업무시간도 늘어났고, 정규직도 아닌 인턴직급을 만들어서 새로 채용을 하고 인턴기간 동안 노조 가입 시 인턴기간을 늘리는 등 더 열악해졌어요. 불쌍해요. 이제 단협을 맺었는데도 우리가 처음 투쟁했을 때의 수준 정도이에요.

    줄어들길 바랬는데 더 늘어난 억울한 사람들

    물론 이들도 촛불에 함께 했다. 그리고 거대한 변화를 함께 만들어냈다.

    – 촛불에 참여하면서 ‘뭔가 되나 보다’라는 일말의 희망이 생기면서도, 다른 한편 ‘우리처럼 불합리한 사회를 처절하게 겪는 사람이 많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우리도 불합리한 상황을 몸소 체험하지 않았으면 ‘너희들 왜 그렇게 뻘 짓하고 있어?’라고 했을 거에요. 몸소 나선다는 것은 그만큼 뼈저리게 힘든 상황을 겪었다는 것이에요. 촛불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바닥을 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들을 많이 겪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론 우리 편이 많아진 것 같아 든든하면서도, 그렇게 투쟁했는데 세상은 점점 더 후퇴한 것 같다는 생각으로 힘들어요. 우리는 투쟁하면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줄어들길 바랐는데요.

    4천일이 지난 지금도 가족들이 여전히 응원하고 있을까? 지난 2월 20일 투쟁 4천일 조합원 설문조사에선 33명 중 23명이 가장 힘든 게 가족들의 투쟁 참여 반대라고 답했었다.

    – 가족대책위가 있었고, 함께 투쟁해 주시고 힘이 되어주셨어요. 저희 엄마는 지금도 철도공사 얘기만 하면 천불이 난다고 얘기하시면서도 니가 옳다고 말해 주세요. 하지 말라고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아마 부모님이 반대했다면 지금까지 남아있지도 못했을 거 같아요.

    한번은 강금실 선거대책본부를 점거하러 들어갔었어요. 선수를 뽑아서 자원을 받았는데, 자원했어요. 왜냐면 그 전에 점거하고 동료들이 48시간 동안 끌려 들어간 경험을 했잖아요. 밖에서 더 힘들게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내가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신적 고통이 물리적 고통으로 오는 경험을 했어요.

    그 때 엄마에게 전화하니 엄마는 “꿋꿋하고, 좌절하지 마라. 엄마가 너 하나 못 먹여 살리겠냐?”며 힘을 주셨을 때 너무 힘이 되고 좋았어요. 그런데 엄마는 여전히 절 믿어주시는데 아빠는 한마디도 안하셨어요. “그 때 왜 날 안 말렸냐?”고 나중에 물어봤어요. 아빠는 예전에 사용자 측으로 퇴임하셨는데, “그 때 아빠가 했던 일 때문에 네가 지금 아픔을 겪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시대요.

    KTX,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세월호

    이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가는 이들을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500만원을 후원계좌로 입금해 놀랐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 그들에게 힘을 준다. 한 때 그들을 “비정규투쟁의 선봉”이라 부른 이들도 있었다. 투쟁기금을 모으기 위해 양말을 팔면서 “아름다운 동행”이라 했었다. 그리고 그 구호는 작년 공공기관 성과퇴출제 저지를 위한 공공운수노조의 연대파업의 주제로 되살아났다. 4천일이 지나는 동안 그들의 투쟁에 아쉬움을 느낀 이들도 있고, 부채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고 있다. 그것도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세월호가 인양되는 그런 4월이다.

    후원

    이름 모를 사람의 5백만원 후원과 잊지 않는 이들의 후원 내역

    세월호를 기리는 노래 중에 “이제 4월은 내게 지난날의 4월이 아니다”라는 노랫말을 가진 게 있다. 이들에게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주는 일, 이들의 삶이 지난날의 고통을 모두 잊고, 언 땅을 딛고 새로운 꽃을 피우게 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 되어야만 한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이 사회를 위해 의미있는 일을 했다는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의 관심과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이들의 투쟁을 담당했던 최성호 변호사가 말한 것처럼 대법원의 판결은 ‘공공서비스에 대해 외주화를 용인’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철도노조가 2016년 74일 파업에 이어 민영화와 외주화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이들의 투쟁이 진다는 것, 그것은 결국 시민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들의 투쟁이 우리 모두의 투쟁이 되는 것, 그것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예의이자 더 나은 한국사회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이다.

    우리가 만난 곳의 카페 이름이 <일무디(Il Me Dit)>였다. 프랑스어로 “그가 나에게 말한다”라는 뜻이라 했다.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 말을 하자”라는 말로 읽혔다. 일단 이들의 블로그라도 방문해 그동안 이들이 겪은 수많은 역사를 한번 볼 것을 권한다. 지난 시기와 지금의 투쟁에 대해 보시기를….

    블로그 링크(blog.daum.net/ktxcrew) 후원계좌 : 우리은행 1002-953-538017 남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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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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