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해진 상실, 우아한 위로
    [영화이야기]드니 빌뇌브 <컨택트>
        2017년 04월 03일 08: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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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운수노조 박영흠 교육국장의 영화 관련 칼럼을 연재할 예정이다. 영화에 관한 내용이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담을 예정이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도 포함되어 있으니 참조하시길.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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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창작물은 아주 간단한 영감에서 출발하곤 합니다. 어쩌면 <반지의 제왕>은 흰 수염의 노마법사가 평원을 질주하는 한 장면에서 시작됐을 수도 있죠. 또는 도깨비, 바닷가 방파제에 마주 선 소녀와 남성의 이미지에서 드라마 <도깨비>의 서사를 만들기 시작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건 어떤가요?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는 빛의 속도라는 절대적 한계에 속박된 인간이, 인간에게는 무한에 수렴하는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 상대성이론이라는 물리학 이론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흔히 하드SF라고 부르는 일군의 창작물들은 하나의 과학적 사실에서 출발해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하죠. 2016년 드니 빌뇌브 감독의 우아한 SF <컨택트>는 ‘페르마의 원리’에서 출발합니다.

    영화는 지구에 12개의 외계우주선이 도착하면서 시작합니다. 흔한 블록버스터 외계인들과 달리 이들은 백악관을 레이져로 쏴 박살을 내거나 유독성 가스 구름을 방출해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들이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는 것 마냥 그냥 지상 가까이에 떠있을 뿐입니다. 외계 우주선이 도착한 지점과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모든 국가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외계인의 방문 목적과 혹시 모를 피해, 또는 이득을 계산하기 위해 그들과 접촉합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와 군의 계획에 따라 차출된 두 명의 과학자의 시선으로 이 두 외계종족의 만남을 따라가게 되죠.

    컨택트

    주인공인 루이스 뱅크스 박사는 언어학자입니다. 그녀는 인류가 헵타포드라고 이름 붙인 이 외계인과의 소통을 위해 외계인의 언어를 분석하고 그들의 언어를 배워가게 됩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테드 창의 원작 ‘네 인생의 이야기’는 정말로 그런 얘기죠.) 하지만 헐리웃 상업영화인 컨택트에는 극적 고려에 의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덧붙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외계인의 방문에 따른 인류의 혼란이나, 외계인의 메시지를 오독한 인간들의 반목이나, 주전파들의 “외계인을 죽여라!” 주장과 그로 인한 위기 등.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영화적 요소를 장식으로 치환하고 딸을 희귀병으로 잃은 뱅크스 박사의 외계언어 습득 과정을 오롯이 이야기의 핵심에 두고 진행합니다.

    뱅크스는 외계인들의 언어를 익히는 과정에서 ‘오해’라는 요소를 줄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극중 뱅크스 박사가 예시로 말하는 호주에 처음 도착한 영국인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배주머니에 새끼를 넣고 다니는 희한한 동물의 이름이 뭔지 물었을 때 받은 ‘캥구루’라는 답변은 실은 그 동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게 무슨 말이냐?’라는 뜻의 원주민어였다는 에피소드처럼, 인류가 외계인의 언어를 오독하는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는 거겠죠. 선물을 주러왔다라고 손을 내미는 외계인의 촉수를 공격의 의미로 알아듣고 포격을 가할 만큼 인간의 지성이란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인간의 언어와 헵타포드의 언어를 일대일로 대응해가며 일종의 외계어 사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뱅크스 박사의 경험, ‘딸을 낳고 키우고 잃는’ 기억이 계속해서 끼어듭니다. 이런 편집은 결말에 가면 이유가 밝혀지지만 영화는 이 과정을 매우 불친절하지만 우아하게 묘사하죠.

    과거, 현재, 미래

    그런데 헵타포드어를 깨우쳐 갈수록 뱅크스 박사는 햅타포드들이 그 언어체계의 특성에 기반해 인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인지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류는 시간을 선형의 인과관계로 인식하지만 헵타포드는 시작과 끝이 없는 원형의 언어체계를 통해 시간을 인식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죠. 이를테면 헵타포드에게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시제, 모든 시간을 동시에 인식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공간을 인지하듯 헵타포드는 시간을 인지하는 거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집안 컴퓨터 단말기 앞에 앉아 있지만 진도 앞바다를 공간적으로 인지하고 있죠. 그리고 당장이라도 차를 끌고 그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햅타포드는 과거라는 어떤 시점, 미래라는 어떤 시점을 동시에 인지하고 있고, 원한다면 그 시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뱅크스는 이들의 언어체계를 습득하면서 헵타포드의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사실 우리가 뱅크스 박사의 과거 경험으로 생각하며 보고 있던 그녀와 딸의 이야기들은 사실 ‘과거의 경험’이 아닌 ‘미래의 경험’이었던 것이죠. 미래의 경험, 인류에게는 모순인 이 표현이 헵타포드에겐 모순이 아닙니다.

    주인공과 우리들은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미래를 알게 된, 또는 딸의 고통스런 투병 과정과 죽음을 동시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뱅크스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고통스러운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바꿔 딸을 낳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과정을 인정하고 정해져있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여기서 이야기는 페르마의 원리로 들어갑니다.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정상적인 대한민국 교과과정을 이수한 성인이라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페르마의 원리는 빛이 물과 같은 매질을 통과할 때 생기는 굴절과정에서 정해진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최단시간의 경로를 선택하여 이동한다는 원리입니다. 제가 비슷하게라도 이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빛이 수면을 통과하는 경계면에서의 굴절각은 매질의 차이로 발생하는 빛의 속도 차에 근거해 가능한 모든 경로 중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빛이 선택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영화로 돌아가서 인류의 선형적 시간 인식으로 얘기하면 이 과정은 빛이 출발하여 수면에 닿고, 정해진 굴절각에 의해 휘어지고, 최종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우연히도 가장 짧은 시간을 소모하는 경로가 됐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헵타포드적으로 설명한다면 빛은 이미 자기가 도착해야 할 목표지점을 알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가장 빠르게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선택’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어느 쪽이 더 과학적인가요?

    출발 전부터 목표지점을 알고 있는 인생, 그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영화에서 뱅크스 박사가 택하는 결론은 이 영화와 우리 인생 사이에 놓인 거대한 등호처럼 느껴집니다. 어쩌면 어떤 이들은 이 결론을 보고 무척이나 보수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듯합니다. 거대하지만 무기력한 순응처럼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의 모습을 조금 더 큰 시야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전부 뱅크스 같은 선택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우린 모두 이별할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존재들입니다. 언젠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겠죠. 저도 저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이곳에 두고 떠나갈 겁니다. 정해진 결론(목표지점)을 알면서도 우린 매순간 내가 살아가고 싶은 대로(최단시간에 따른 거리)로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이 이야기를 만든 테드 창과 드니 빌뇌브는 페르마의 원리에서 인간의 인생을 본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울 줄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한 단면. 거대한 긍정.

    4월이네요. 3년 전 거대한 상실을 경험한 우리들은 어떤 이야기를 접해도 그날 뉴스에서 보았던 그 바다의 이미지를 잊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컨택트의 창작자들이 의도하지는 않았을 상상의 결론에 저는 도달하게 되더군요. 이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 위로 같았습니다. 결국 남은 건 우리들의 선택입니다. 목표지점을 바로보고 가장 쉬운 최단거리로 뛰는 것이 아닌 자신을 굴절시켜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경로를 선택하는 페르마의 원리처럼. 그것이 고통이라도.

    필자소개
    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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