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방의 노동상담 이야기
    “상담은 변화를 품은 씨앗”
        2017년 03월 31일 04: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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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음성에서 노동상담 활동을 하고 있는 조광복 노무사의 ‘변방의 노동상담’ 칼럼 연재를 시작한다. 그 첫 글로 상담에 대한 고민과 칼럼에서 담고자 하는 내용을 중심을 필자가 정리했다.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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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딱딱한 이야기부터

    내 얘기부터 해야겠다. 나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충남 천안에서 개업 노무사사무소를 운영했다. 이때는 사업주 일과 노동자, 노동조합 일을 함께 했다. 그 후 2008년부터 2010년 초까지는 충북 청주에서 민주노총 지역본부와 함께 설립한 호죽노동인권센터 일을 했다.

    그리고 2010년 청주노동인권센터(대표 김인국 신부)를 설립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그리고 청주노동인권센터가 중소영세공장 밀집 지역인 음성 지역에 상담기관(음성노동인권센터)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여 2015년부터는 음성 지역으로 파견을 가 인근 지역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청주노동인권센터는 노동자들에게 수임료를 받지 않고 법률지원활동을 하며 대신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금으로 운영한다. 상근활동가는 나를 포함해 5명이다. 음성노동인권센터는 청주노동인권센터가 결의해 설립했지만 지역 주민들이 운영진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자체 회원을 늘려 별도로 1명의 상근활동가를 채용해서 임금을 지급한다.

    노동인권센터에서 나는 지역과 상담을 기반으로 노동인권 활동을 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 따라서 내 활동은 ‘지역’과 ‘상담’에 특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상담, 법률지원, 노조 조직화 지원, 문제의 개선 내지 해결을 위한 작은 싸움, 지역사회에 노동인권 문제를 알리기 위한 일, 노동인권 교육, 실태조사와 정책 제기 들이다. 이 모든 활동은 직간접적으로 상담과 연결되어 있다. 즉, 내 관심사는 상담을 노동인권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음성

    음성노동인권센터 개소식 모습(사진=음성신문)

    이 연재 글의 제목에“변방”이라는 말을 넣은 것은 실제 내가 변방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첫째, 내 활동은 소수의 모델이다. 지역에서 독립된 ‘단체’의 지위를 갖고 노동상담, 노동자 지원 활동을 하는 모델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은 지난 수십 년을 더듬어보면 가톨릭노동사목·도시산업선교회 등 종교단체 중심의 활동(1970년대~80년대), 노동상담소·노동자의집 등이 주축이 된 노조 조직화와 노조 민주화 지원 활동(1980년대~90년대 초)을 거쳐 민주노총이 설립되고 법적 지위를 확보하면서(1990년대) 급격히 쇠퇴했다. 지금은 명맥만 남은 정도가 됐다.

    둘째, 주류 혹은 일반적인 상담 영역 바깥에서 활동한다. 현재 노동상담 활동을 대표하는 곳은 민주노총, 한국노총과 그 산하 조직일 것이다. 그곳에 상담이 집중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노동상담은 변호사, 노무사 중심의 법규상담·법률지원 활동과 조직활동가 중심의 조직상담·지원 활동으로 구분돼 있다. 또 주목 받는 곳이 있다. 노동조합 조직 또는 비정규직노동단체 등이 지방정부로부터 위탁 받아 운영하는 이른바 지자체 비정규노동센터다. 이들 센터는 전국적으로 30개소 안팎인 것으로 안다. 지자체센터도 상당수가 노무사를 채용하고 있고 당연히 노동상담 내지 법률지원 업무를 하고 있다.

    사실 이 글이 잘 써지질 않았다. 소수의 모델이면서 주류의 영역에서도 벗어나 있는 경험이 도대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여러 번 ‘나는 왜 이 글을 쓰려고 하는가?’라고 스스로 물어봐야 했다.

    변방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사전은 변방을 “가장자리가 되는 쪽”이라 풀이한다. 그런데 모든 변방은 둘 또는 여러 영역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이를테면 바다와 육지의 경계는 갯벌이다. 즉, 갯벌은 바다의 변방이면서 동시에 육지의 변방이기도 하다. 산과 평지가 만나는 경계는 숲이다. 숲은 산의 초입이고 동시에 평지가 끝나는 곳이다. 산과 평지의 변방이라는 얘기다. 갯벌과 숲은 대번 ‘생명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생태의 보고라 하지 않는가? 경계 혹은 변방의 노동상담 활동은 다양한 영역과 접해 있어서 마음먹기에 따라 풍부한 일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장점이자 매력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쉽게, 단 한 번에 파괴될 수 있는 곳이 숲이고 갯벌이다. 즉, 예민하고 취약한 곳이다. 갯벌은 거기를 방조제로 막아 관광지로 조성하겠다는 결정 하나로 없어진다. 수백 년 우거진 숲이 벌목 때문에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다. 노동상담 활동의 변방 또한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쓰는 근육이 다르다”는 말을 하곤 한다. 노동조합 투쟁, 노동조합 조직화를 중심으로 한 상담 활동과 그 바깥쪽의 노동상담 활동은 쓰는 근육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 같은 사람이 노조 조직화를 중심에 놓고 상담을 한다면 할 게 별로 없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다시피 그 많은 상담 중에 노동조합 조직이 가능한 상담은 아주 적다.

    법률상담 내지 법률지원을 목적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노동상담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버린다면 2% 부족한 것 아닌가 싶다. 그 상담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과 곡절이 있을 것이며,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인가 말이다. 그 사연과 곡절, 사회적 의미를 끄집어내어 다수의 공감을 얻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특별할 것도 없는 이게 내가 생각하는 변방의 노동상담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게 뚝 떨어진 상담 하나를 스토리가 있는 드라마(?)로 펼쳐 놓는 일은 조직운동 중심의 근육과 잘 안 맞는 측면이 있다. 조직운동 중심의 사고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직으로도 힘으로도 일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좀 더 다른 예민함과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조직으로도 힘으로도 일할 수 없는 영역에서 조직운동 중심의 언어, 습관, 사고 등등을 동원하여 상담을 할 경우 금방 그 역동성 혹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점에서 내가 했던 상담활동은 파괴되기 쉬운 아주 취약한 영역에 있다. 이런 경험을 나눠보는 것도 약간의 의미는 있지 않겠냐고 자기 주문을 반복한 끝에 글을 써보자 용기를 낸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글을 쓰면 재미는커녕 아까운 공간을 할애해 준 레디앙에 누만 끼치게 될 터이니 기억에 남는 사례를 중심으로 상담 이야기를 할까 한다. 노동자들의 사연도 들어가겠지만 상담 과정에서 내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또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했을 때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인지를 많이 얘기해보겠다.

    특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들이 있는데 아마도 앞으로 쓰는 글에 이런 태도가 밑바탕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로 아래의 내용들이다.

    나는 상담과 노동인권 활동 과정에서 펼쳐지는 일들을 정형화할 수 있거나 칼로 무 자르듯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하나의 상담이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선지 상담활동을 ‘변화’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있다. 이 글의 부제인 ‘상담은 변화를 품은 씨앗’이라는 말은 내가 갖고 있는 상담 태도랄까 거창하게는 상담 철학이랄까 하는 것이다.

    내가 상담을 하면서 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관계’이다. 노동인권센터는 조직력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취약하다보니 어떤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많은 정성을 들이는 것이 ‘관계를 조직하는 일’이다. 관계를 조직한다는 게 좀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관계’가 ‘변화’에 기여하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그런 말을 썼다. 내가 생각하기에 ‘관계를 조직하는 일’의 최저치는 ‘동원하는 일’이고 최고치는 ‘공감 내지 감동을 조직하는 일’이다. 지구 46억 년 역사 이래 변화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동시에 ‘관계’ 없이 변화한 것도 없다. 실제 그렇지 않은가?

    처음엔 깨닫지 못했던,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는‘자기 존중’에 관한 것이다. 상담활동가들이 상담활동 과정에서 지나치게 상처 받거나 자기를 소진시키지 않고 자기 존중의 길로 나아가길 진심으로 원한다. 자기 존중이야말로 상담을 풍요롭게 하고 좋은 삶을 살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너무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경향이 있어 더욱 그렇다.

    예전에 노동조합 상급조직들이 주관하는 노동법교실에서 강의를 하면 주최 측에서“동지들 법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투쟁으로 돌파해야 합니다.”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 반대로 지금은 지나치게 법 전문가들이 주목받는 측면이 있다. 즉, 현실에서 법 의존도가 심화됐다고 볼 수 있다. 법을 배척하려는 태도와 법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모두 법을 고정적인 혹은 기계적인 관점에서 보는 문제가 있다. 현실 노동상담에서 상담활동가는 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 문제도 중요하다 생각한다.

    상담을 시작하면 어느 때까지는 직간접으로 (노동조합 등의) 조직화에 관여하는 일이 있다. 또 어떤 문제 해결 과정에서 내가 책임을 지다 어느 때에 이르러 그 책임을 내려놓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내가 초기 상담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내 자신과 센터를 소(沼)와 같은 거라 생각했다. 소(沼)는 계곡물이 흐르다 잠시 머무르는 곳이다. 소(沼)의 역할을 잘 하는 것도 상담의 중요한 몫이라 생각한다.

    그 동안 내가 해왔던 상담은 가장 큰 결함이 있었다. 중요한 하나가 빠졌기 때문이다. 고통 받는 노동자들이 자기를 치유하고 자기존중으로 나아가도록 안내하는 영역이다. 물론 내 역량이 감당할 수도 없거니와 내 분야도 아니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은 틀림없다. 상담활동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이건 현재 진행 중인 내 고민이다.

    필자소개
    청주노동인권센터.음성노동인권센터 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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