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우선주의’ 속의 미국
    국익의 논리 극복하고 노동권 등 보편적 관점 필요한 때
        2017년 03월 30일 08: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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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운수노조의 국제.통일 담당자인 임월산 국장이 앞으로 국제적 이슈와 흐름, 사건과 사람 등에 대해서 칼럼을 연재하기로 했다. 국제연대와 국제주의적 접근은 호기심의 영역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노동과 삶을 조건짓는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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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한국에서는 좌우를 막론한 많은 사람들이 그가 표방하는 ‘미국 우선주의’에 우려를 표했다.

    국방부와 보수 세력은 미국이 한미동맹을 후퇴시키고,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국내 수출자본은 한미FTA 재협상과 미국 시장 진입 장벽에 대해 걱정했다. 진보 진영은 한국의 국익에 반하여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미국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사드는 미국으로, 평화는 한국으로.” 미국을 위한 사드가 한국의 평화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국민의 투쟁을 호소한다.

    트럼프 정권에 대한 부르주아 엘리트들의 도전이나 미국 국민들의 저항에서 볼 수 있듯 ‘미국 우선주의’는 합의된 기조나 이념과는 거리가 멀다. 보편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특정 자본의 관점에서 파생된 ‘미국’에 대한 하나의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 전망에는 미국 사회구성원 일부는 포섭되고 일부는 배제된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제시하는 ‘미국 우선주의’에서 ‘미국’은 무엇인가?

    트럼프

    미국 국가에 대한 이론적 접근

    브루스 커밍스는 (니코스 플란차스의 이론을 빌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계급 내 집단들을 중재하고 노동자 민중을 아래로부터 포섭하는 것을 국가의 역할이라고 정의한다. 이에 따라 그는 미국이 첨단 기술을 보유하며 1930년대부터 세계시장을 목표로 한 국제적인 자본과 쇠퇴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국내시장에 기반한 (따라서 노조를 혐오하는) 지역·국가자본 간의 갈등이 조정되는 무대였다고 강조한다.

    전자는 전통적으로 세계시장의 통합에 부합하는 다자기구의 집단적 거버넌스를 중심으로 하는 경향을 띤다. 후자는 미국 생산품을 위해 국내시장을 지키고, 특정 외국시장을 장악하며, 외부적 위협으로부터 국토를 보호하기 위한 독자적인 행보를 선호하는 경향을 띤다.

    자유주의자들은 보통 이 두 개의 이념을 (책임성 있는) 국제주의와 (책임성 없는) 고립주의로 지칭한다. 하지만 커밍스는 전자가 국제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유)세계에 대한 헤게모니를 추구하고 후자는 미국의 경제적 영토의 확장을 추구하는 만큼, ‘제국주의/국제주의’와 ‘팽창주의/민족주의’가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 이래 자본주의 체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따라 자본계급 내 집단들의 성격은 뚜렷이 변했다. 철저히 초국화된 현대의 국제자본은 통합된 세계시장뿐만 아니라 생산-공급-소비의 세계적 조직화를 추구한다. 후자는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국내뿐 아니라 외국시장에서도 국외자본과 경쟁하며 보다 유리한 무역조건을 추구한다.

    신자유주의적 국제주의 프로젝트의 잿더미에서 트럼프가 국가자본의 수호자로 일어나는 현 시점에 커밍스의 이론은 유효해 보인다. 이 분석에 커밍스는 행정부(대통령과 그 내부자들)의 역할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를 추가한다. 표면적으로 국가 전체를 책임지는 대통령은 사실상 국가의 여러 부서 중에 ‘국가 관료제를 우회하여 사회와 직접 접촉하고 이데올로기와 애국주의의 수사, 개인적인 스타일, 즉 일종의 카리스마를 사용해 정책에 대한 지지를 조직함으로써 그의 목표에 전체를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자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 자본주의의 한 전망과 그에 부합하는 외교정책 기조의 표현이다. 동시에 일부 미국인을 그 전망에 동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트럼프는 민주주의와 자유세계, 반공과 봉쇄의 논리를 사용했던 냉전 시기 행정부들과 유사하다.

    미국에서 미국 우선주의의 의미

    지난 12월,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미국 우선주의’의 국내적 의미를 두 개의 규칙으로 요약했다. ‘미국산 제품을 사고, 미국인을 고용하라.’ 트럼프는 미국 기업의 해외 이전을 유도한 것으로 간주되는 자유무역협정을 공격하고,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유발하는 국가와 해외로 생산지를 이전한 미국 기업의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이 규칙을 실천하고자 한다.

    많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인을 고용하라’는 슬로건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목표는 경제 전반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제조, 석유와 채굴, 건설 등과 같은 특정 경제부문을 활성화하여 경제성장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석유, 채굴, 건설업의 규제 완화와 민간위탁 인프라 사업이 계획되어 있다.

    반면 3월 16일에 발표된 트럼프의 2018년 예산안(소위 ‘미국 우선 예산안’)은 정부가 운영하는 공공의료, 교육·연구 프로그램, 문화예술, 주택, 교통, 환경보호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출을 대폭 삭감한다. 따라서 많은 미국인이 필요로 하는 공공서비스를 없애는 것뿐 아니라 수백만 명의 공무원과 공공부문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

    애초 트럼프는 최저임금을 반대하고 이민 노동자 착취로 유명한 체인식당 기업인 앤드류 퍼즈더를 노동부 장관으로 지명했었다. 또 미국 노동운동이 지난 몇 년 간 어렵게 쟁취한 노동기본권 보장 조치를 뒤집을 것으로 알려진 닐 고서치의 연방대법관 임명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트럼프의 정책은 (단기적으로 일부 부문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더라도)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목표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미국인을 고용하라’는 슬로건은 전체 노동계급 중 일부 노동자를 지목하고, 이들의 미래를 트럼프의 미국 개념의 핵심에 있는 자본집단의 이해와 연결하는 효과를 갖는다.

    여기서 트럼프와 이전 행정부의 차이를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으로서 미국 자본주의와 사회 전반의 지속성을 책임져야 할 트럼프는 기업인으로서 경제적 이해가 있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관점은 과거 대통령들보다 특정한 경제적 이해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소유하고, 그의 자녀들을 통해 아직도 상당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는 트럼프 오거나이제이션은 전 세계에 마천루, 호텔, 골프장, 카지노, 아파트, 리조트를 건축, 소유, 운영하고 있다.

    2016년 공직자 재산 공개 내역에 따르면 트럼프의 미국 내 경제적 활동은 핵심사업인 부동산과 연예 외에도 투자와 공동소유를 통해 자원 채굴, 민간 유틸리티, 교통, 의료, 식품, 유통 부문까지 포괄한다. 오바마케어(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의 철폐와 규제완화를 통한 민간 의료산업 활성화, 환경보호 규제 철폐를 통한 석유와 석탄산업 지원, 민간위탁 인프라 사업의 확대와 같은 트럼프의 정책 목표는 자신의 경제적 이해와 분명하게 겹치고 있다.

    해외에서 미국 우선주의의 의미

    취임 전 외교 부문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트럼프는 많은 착오를 반복하고 있다. 선거 초기, 동아시아에 대해서 진정 고립주의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으며, 러시아와 손을 잡을 듯 했지만 이 계획(진정한 계획이었다면)은 취임 후 크게 꺾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트럼프는 국방부와 발을 맞추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소프트파워(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와 다자주의)를 하드파워(일방적 군사력)로 대체하는 움직임과 국내시장의 보호와 외국으로의 확장이라는 논리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미국 우선 예산안’은 국방예산을 540억 달러(10%)로 늘리는 내용을 포함한다. 국방비 증액은 위에 언급한 공공서비스 삭감으로 상쇄된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믹 멀바니 백악관 예산관리실장은 ‘동맹국과 잠재적인 적국에 이것이 스트롱-파워(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행정부라고 강조하는 것’이 예산안의 목표라고 밝혔다.

    트럼프는 또한 국방예산 자동삭감제도(시퀘스터)를 폐지하고 미사일방어체계에 대한 투자 확대를 지지한다. 선거 초기 무기생산자들이 우려한 것과 달리 현재 트럼프는 군산복합체를 ‘미국’의 중요한 일부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트럼프는 가격흥정에서 좀 세게 밀어붙일 수 있지만(올해 초 록히드가 F-35 전투기 가격을 인하도록 압박한 바 있다) 거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세다. (트럼프가 보잉에 투자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을 막론하고 미국은 국방예산을 지속해서 늘렸다. 그리고 정권마다 접근법이 조금씩 달라도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나토와 유엔 같은 다자기구에 의존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다자주의가 미국의 파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직 배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국방예산 증가를 무역관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조속한 사드 배치 추진을 용인하고 미사일방어체계의 강화를 지지하는 것은 중국에 강력하고 보복 가능한 상대의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와 팽창주의를 뒷받침하는 하드파워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 보인다.

    미국 우선주의와 미국 노동자

    이민자, 유색인, 무슬림과 원주민, 성소수자와 여성 등 미국 내 여러 사회집단은 트럼프의 ‘미국’ 바깥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경계선을 구체화하는 사람은 트럼프 선거캠프의 주요 이론가였던 스티븐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이다. 극우 매체인 <브라이트바트>의 설립자인 배넌은 경찰폭력 피해 유색인 청년에서부터 여성, 오큐파이 활동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에 대한 비하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KKK와 같은 백인우월주의단체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은 일부 미국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미국 우선주의’에서의 ‘미국’의 구성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거기간에 트럼프는 ‘우리’ 대 ‘그들’이라는 구도로 이들을 동원했다. 즉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 이민자, 멕시코인과 중국인 노동자,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무슬림 테러범죄자에 대한 공포에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특정 산업의 일부 노동자들이 트럼프의 전망에 속해있지만, 트럼프가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는 미국’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력으로 성장할 산업들이다.

    트럼프 반대

    지난 2월 LA에서의 트럼프 반대 시위 모습

    취임 2개월에 불과하지만 트럼프가 상상하는 미국의 실현은 매우 불투명하다.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세력 양자의 공세 아래 내각 구성이 늦어지고 있고, 하급 관리의 공석도 많다. 트럼프가 내정한 노동부장관은 임명되지 못했고, 국가안보보좌관은 러시아와의 부적절한 접촉 의혹으로 지난 달 사임했다. 향후 10년 안에 추가적으로 240만 명이 의료보험 혜택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트럼프의 주요 공약이던 의료보험개혁 법안은 하원에서 철회됐다.

    트럼프가 처한 위기는 주로 그가 실현하려는 미국에 대한 엘리트계급 내의 저항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위기로 인해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고 있다. 트럼프의 지지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3월 27일 현재 트럼프의 국정 운영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지지율은 36%에 불과하다. 반면 57%는 잘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 간격은 계속 벌어지는 추세다. 또한 과거에 노조나 사회운동 경험이 없는 많은 미국인들이 트럼프의 의료보험, 교육과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워싱턴D.C.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응집한 수십만의 집회 참가자 중에는 경제적 위협에 처해 있는 공공부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많다. 이러한 시위는 특정 정체성이나 인권에 관한 운동으로 보이지만 긴축과 민영화를 추진하는 군국주의적 국가에 맞선 공공부문노동자, 빈민과 사회 약자의 투쟁이라 더욱 근본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제임스 페트라스는 평가한다.

    이 투쟁이 성장하려면 트럼프의 ‘미국’에서 배제된 노동자 집단들이 여성과 성소수자, 이민자, 반인종주의, 반전 운동 진영들과 구심력 있는 연대체를 구성하고 양질의 일자리와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공통된 목표에 기반을 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이 대안을 기반으로 하여 트럼프를 지지했지만 그 정책의 실패로 환멸을 느끼는 노동자들에게도 호소력 있는 포용적인 미국에 대한 전망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점진적으로 형성돼 가는 미국 노동자와 진보진영의 연대전선을 지지하는 것은 ‘미국 우선주의’ 정책에 도전하려는 한국 진보진영에 있어서도 중요한 과제이다. 이를 위해 사드 배치나 한미관계에 대한 비판에서 단순한 국익의 논리를 극복하고 노동권의 보장, 평화 세계의 실현과 공공서비스의 확대라는 보편적인 관점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필자소개
    공공운수노조 국제·통일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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