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바람의 쇠락?
    진보와 포퓰리즘의 어색한 만남
    [대선후보 인상비평 ④]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2017년 03월 27일 08: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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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시장이 처음 민주당 대권 레이스에 도전한다고 할 때 그가 이 정도로 승부를 걸리라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번에는 초반에 페이스메이커로 뛰면서 문재인이 취약한 부분에서 좀 더 선명한 진보 쪽으로 좌표를 설정하고, 열심히 하면서 흙수저 (그의 표현대로라면 무수저)의 이미지를 굳혀 차차기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데 목표를 둘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 예상들은 모두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그 과정에서 – 그가 차차기에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지 않을지는 아직 알 수가 없겠지만 –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드러났다. 그가 이미 문재인 지지자들과 화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처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이번 대선 정국 세 확보 운동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손가락혁명군, 즉 손가혁에 그의 운동의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손가혁은 이재명의 자발적 지지자로 현재 얼추 7,000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SNS 상에서의 활동은 문재인이나 안희정이 주지 못하는 소위 사이다 발언을 널리 퍼트리는 일도 하지만 다른 후보들을 공격하고, 비방하는 일종의 훌리건과 같은 일을 앞장서서 함으로써 다른 세력들과 충돌을 자주 일으키는 것으로 연결되는 일이 매우 잦다.

    2016년 10월 촛불 정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재명은 손가혁을 적극적으로 조직화하고 행동하도록 독려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예상대로 박원순 후보를 바로 추월하고 그를 낙마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지지율은 급격하게 상승 곡선을 그렸지만, 곧 그렇게 올라온 만큼 그와 비슷하게 급격하게 내려갈 것이라는 예상이 여러 군데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예상들은 무섭게 적중하였다.

    그런 예상을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이유를 손가혁에서 찾았다. 그들은 민주당 입장에서 볼 때 내부 총질에 매우 능한 지지자들이다. SNS 특유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일등공신의 역할을 하지만 다른 세력들로부터 혐오감을 유발시키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SNS 상에서의 선명한 글이란 분노의 표출에 기반하는 것이고, 그 분노의 표출이라는 선명성은 자극의 언어로 흘러갈 수밖에 없으며 그 자극이 닿는 종착역은 아군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극도의 이분법에 의거한 혐오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빠’는 ‘까’를 낳고, ‘까’는 멸망으로 이르는 지름길이다. ‘빠’ 위에서 세를 확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재명

    정치인이 목표로 삼는 내용을 작동시키는 것은 구동 장치다. 널리 알려지다시피 인도의 마하뜨마 간디는 그가 추구하는 사회 목표를 탈(脫)기계 문명과 공동체 질서의 수립에 두고 그 구동 장치를 비폭력-불살생에 두었다. 여기에서 어느 누구도 그 구동 장치에 대해 시비를 걸지 못했고, 그래서 그의 정치는 – 실패로 평가되든 성공으로 평가되든 관계없이 – 상상을 초월한 대중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재명은 마이너리티가 존중 받는 사회, 흙수저가 존중 받는 사회,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추구한다. 적폐를 확실하게 청산하는데 그 안에 들어갈 여러 가지 내용이 그야말로 사이다다. 적폐는 청산하고, 전두환을 사형시키고, 친일파는 청산하고, 재벌은 해체하는 등 하나같이 진보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갈증이 확실히 해소되는 발언이다. 그로 인해 젊은 진보들의 지지를 짧은 시간에 확보하였다. 뿐만 아니다. 본인은 대통령을 머슴이라 부르면서 국민을 받들겠다고 하고, 성남시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다양한 복지 정책을 앞세워 대한민국 복지 사회를 천명하니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서 지지를 급속하게 얻을 수 있는 매력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를 통해 그가 말한바 적폐 청산을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현재로서는 그 아니면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 의지가 분명히 있는 사람은 없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적어도 한 번이라도 하지 않은 진보 진영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적폐 청산을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의지 하나만큼은 민주당 주자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선명한 진보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음에도 진보 진영에서 그를 선뜻 지지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위에서 말한바 간디의 ‘비폭력-불상생’과 같은 정당성이 있는 구동 장치가 부재하고 그 자리에 박사모나 홍위병과 같은 ‘빠’들이 들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인권이란 온데간데없고, 포퓰리즘만이 판을 치게 될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이비 역사학자 이덕일에 대한 지지다. 임나일본부설 논쟁에 대해 김현구 교수를 완전히 왜곡하여 매도한 이덕일에 대한 법적 고소에 대해 법원은 학문은 학문답게, 논쟁으로 해결하라, 법적으로 붙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덕일이 옳다는 것을 법원이 판결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재명은 그 판결을 교묘하게 악용해 – 변호사니 법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 이제 친일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졸지에 제대로 된 역사학을 하는 사람은 친일 세력이 되어버렸고, 황당한 사이비 역사학은 친일 청산하는 세력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역사학 문제까지 ‘친일’의 잣대로 삼는 저 무지함과 용감함은 대부분의 지식인으로 하여금 그에게 등을 돌리는, 그래서 결국 그의 구동장치는 실로 저렴한 포퓰리즘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처음부터 너무 극단적인 길을 갔다. 그것은 안철수가 현실 정치를 전혀 배우지 않은 채 일부 참모라는 사람들에 의존하여 ‘새정치’라는 정체불명의 라벨을 가지고 와 초기 바람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내용도 없고, 그것을 구동하는 방법론도 없고, 정치를 이끌어가는 실력도 없어서 멀리 가지 못한 채 바로 몰락해버린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이재명은 거침없이 선명한 진보를 표방했으나 곧 바로 확장성이 떨어짐을 알아차려 몇 차례 본인을 중도로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말을 바꾸려 했다. 정치인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노력이다. 그렇지만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바꾸든지 그의 이미지는 급진적 진보로서 자리매김 되었고, 그 때문에 중도로 확장되는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자신이 한국의 샌더스라고 한 말은 희화화 되면서 그를 아무 말이나 하는 혹은 파시스트인 트럼프나 필리핀의 두테르테로 연결되는 현상마저 생기게 되었다.

    그가 샌더스 같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따로 분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그가 과연 트럼프와 같은지의 여부는 결국 문학적 수사의 일부이거나 현실을 무시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정치학자들이나 하는 별 것 아닌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분석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그보다 더 절실한 현실은 이재명이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진보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는데, 그 유탄을 정의당이 맞아 비틀거린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대목에서 정의당의 심상정이 취해야 할 미래는 이재명의 과거에 일부 찾을 수 있는 건 아닐까? 이재명이 선택했던 위험한 도박의 길 가운데 어딘가에서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해야 하는 대중화된 진보의 길이 있지 않을까 한다는 말이다.

    이재명이 이번에 승부를 독하게 건 것은 정치에서 다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다는 금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상품 가치는 너무나 저렴하게 형성되었다. 그래서 처음 막 시작할 때는 잃을 것이 전혀 없는 장래 유망의 정치인이었으나 싸우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선명한 것과 쌍스러운 것은 다르다. 김대중은 이재명 같이 가볍지 않았고, 노무현은 이재명 같이 저렴하지 않았다. 문재인이나 안희정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간’ 됨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치명적인 평가다.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라고 본다. 첫째는 그가 남에게는 가혹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선명한 진보적 스탠스에 비해 주변의 작은 이들에 대한 인격적 배려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재인과 박원순은 새누리와 수구 세력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한 음해를 받으며 검증을 거쳤다. 그러나 이재명은 그들로부터 공격다운 공격을 당해본 적이 없다. 그들이 제대로 된 검증을 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는 3월 25일 성남시청의 한 시간선택임기제 공무원이 시장에 대한 지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는 이유로 시청이 압수 수색을 받게 된 데 대해 엄청난 탄압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문재인과 박원순에 비하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정도다. 그는 검찰이 민주당 경선 향방을 좌우할 호남권 ARS 투표가 시작되기 하루 전, 특히 자신의 호남 지역 지지율이 2위에 오르며 상승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성남시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고 하면서 자신에 대한 부당한 수사라고 하지만, 그의 억울한 볼멘소리에 진보 진영에서 별로 귀담아 듣지 않는 것 같다. 검찰의 부당한 압수 수색에 대해 형식적으로는 모든 후보가 반대하고 검찰을 비난했지만, 여론의 온도가 그리 뜨겁지 않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현재로서는 차차기마저 위태롭다고 본다. 그가 선명한 진보를 외치며 싸웠기 때문이 아니고, 싸움하는 과정에서 비(非)인간적 태도가 너무나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독재와 싸우는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손가락으로 쑤셔 매장시키는 일보다 가슴으로 안아주고,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품격을 잃지 않고 인간의 향기를 내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대다. 선명한 진보라고 해서, 단호하게 적폐를 청산하고 국가를 개조하려 한다고 해서 인격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재명 후보가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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