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득량역 이대로 좋은가?
    [철도이야기] 사랑방 같은 역이어야
    By 유균
        2017년 03월 21일 08: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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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 보니 이런 행운도 있네요. 제가 득량역에서 한 열흘 정도 근무를 했습니다. 계속 근무한 것은 아니고 근무자가 공석일 때만 가끔 하루씩 땜빵을 했습니다. 시골 어느 한적한 간이역에서 자연에 묻혀 근무하면 얼마나 좋을까? 늘 마음속으로 동경했었는데, 그런 날이 찾아오기도 하네요. 그동안 열심히 밀어주었던 보성군수와 전남본부장이 바뀌고 지원이 줄어 이제 득량역은 서서히 세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그래도 어떻게 해야 여행객의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역이 될까, 생각하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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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르게 생각하면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보여주기식 사업을 시행했기 때문에 득량역과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여 여행객에게 득량역을 다시 찾아오겠느냐고 질문했을 때 선뜻 “예”라고 대답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득량역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즐겨야지,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가는 사람들에게 그리 권장할만한 역이 아닙니다. 아마 몇 년 후에 보성역이 이전되고 보성 녹차밭, 득량 추억의 거리, 강골마을, 예당-조성 간 보리밭, 조성 조양창, 벌교 꼬막을 지금의 선로를 이용하여 교통편이 제공된다면 다시 관심을 받을 수도 있겠네요.

    먼저 득량의 유래에 대하여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조달받아 득량(得糧)’이라 불렸다는 글이 많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찾아보면 ‘조선조(朝鮮朝) 영조 13년(1759)에 여지도서에서 처음으로 송곡면, 도천면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1910년까지는 송곡면(松谷面)과 도촌면(道村面)으로 분할되어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송곡, 도촌, 양면을 병합하여 득량면(得粮面)이라 칭하고 면소재지를 송곡리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한국의 지명을 일본이 원하는 대로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일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지금 ‘득량의 유래’처럼 해석하기 어려울 거로 생각합니다. 가뜩이나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애썼는데, 그 처절하게 패한 기록을 미화시키는 지명을 유지할 리가 없지요. 따라서 지금 알려진 득량의 유래는 이를 다시 조명하고 한국의 입장에서 재해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을 살펴보면 당시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구했는데, 현재 행정구역은 보성군 조성면 우천면 고내(庫內)마을 부근이며 기차(순천→보성)를 타고 가자면 조성역을 출발해서 1㎞쯤 가면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논 중간에 보이는 산이 대략적인 위치입니다. 또 ‘박실마을’(보성군 득량면 송곡리)은 득량면 소재지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이야기 또한 아닙니다. 제가 득량의 유래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고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틀리지도 않기 때문에 일단 인정하고 어쩌면 그렇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감탄합니다.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의 소규모 기차역 공모사업에 보성군과 철도공사가 협력하여 득량역이 선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의 주변 공간을 활용하여 1970∼1980년대의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추억의 거리’를 만들었고 역 내부는 철도공사에서 꾸몄습니다. 이 때문에 진작 폐쇄되었을 역을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다시 살린 것에 대하여 직원의 한 사람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예쁘게 단장된 득량역 뒤에 직원들의 희생도 포함해서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일은 비단 득량역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도 ‘모범역’이라는 명칭으로 직원들에게 끝없는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비번자에게 노력봉사라는 명목으로 무보수 노동을 시켰으며 근무자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혹자는 ‘어차피 근무시간인데 무슨 상관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본연의 업무가 아니고 시켜서 하는 일인데 얼마나 즐거워서 일했겠습니까? 또 근무자가 없으면 그만큼 안전이 소홀해지며 이는 사고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사고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갔을 뿐이지, 범죄행위와 다름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키고,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야 해 볼 문제입니다. 뭐 어쨌든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득량역은 새롭게 꽃단장했습니다.

    그런데 보여주기 사업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행사용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축제로 며칠간 요란했습니다. 그리곤 끝입니다. 더 큰 문제는 득량역이 모범사례가 되어 많은 역에서 이를 모태로 비슷하게 따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1-2시간 정도면 더 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은데 교통편은 영 꽝입니다. 한 번 찾아온 여행객을 다시 오게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친 셈이지요.

    또 행사의 상업주의는 득량 주민들을 서로 반목시키고 싸우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저와 같은 이방인이 보기에는 크게 돈벌이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득량역 주민들은 이권(利權)에 대한 오해로 현재는 주민들 사이가 많이 벌어졌습니다. 꽃단장은 해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사업입니다. 계절마다 꽃을 바꿔줘야 하는데 이제 지원이 없어졌습니다. 풍금 치는 역장은 홍보용으로 한 번 띄워 우려먹고 버렸습니다. 추억의 거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빛이 바래고 먼지만 쌓여 갈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되어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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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동나무(출처=blog.naver.com.ori2k)

     

    가장 안타까운 것은 득량역 역사(驛舍)와 유동나무입니다. 오해가 있을까 먼저 밝힙니다만, 득량역을 새로 조성하기 위해서 역사를 허물고 유동나무를 벤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1970년쯤에는 유동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보지 못해서 표현을 못 하겠지만, 그 위세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모두 밭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역사(驛舍)는 허물기 전 겉모습을 재현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득량역을 다시 보면 이제 보일 겁니다. 만약에 허물지 않고 옆에 신역사를 지었다면, 수백 년 된 유동나무가 몇 그루만이라도 남았다면…

    정말로 바보 같은 일이지요. 다른 역에선 엄두도 못 낼 대단한 자산을 이미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또 돈을 쏟아 붇고 또 내버려두고. 차라리 꽃보다 유동나무를 심었으면 훨씬 좋았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저도 고민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지원이 없으면 희생만 따르기 때문입니다. 득량역은 볼거리가 아닌 문화를 알리고, 전통을 알리는 사랑방 같은 역할이 제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민들의 화합이 먼저고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나서서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주민들에게 발전 전망을 제시해야 합니다. 물론 한 번에 되지 않을 겁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계속 설득하고 교육이나 대화를 통해서 머릿속에 미래 청사진을 심어놔야 합니다. 득량 주민들이 주체로 나서지 않은 한 발전할 수 없습니다. 철도에서 그 일을 대신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나 더 말하면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커피 한잔 먹자며 먼저 말을 걸어주며 살갑게 다가갈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행객에게 필요한 여행 정보나 득량에 대한 자랑, 또 필요하면 사진도 찍어주고 득량에서 생산되는 감자나 옥수수를 같이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야 여행객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즉, 친절을 바탕으로 득량역에서 새로운 추억거리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했다면 어차피 기차나 버스가 올 때까지 넋 놓고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친절은 누구에게나 상상 이상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순신 장군과 관련되어 조양창에서 박실마을까지 길이 있어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좀 더 풍부하게 만들면 됩니다. 그렇다고 옛 조양창을 복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길 자체에서 이순신 장군의 숨길을 느낄 수 있고, 같은 길을 걸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만족감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차려 놓은 밥상이기에 득량역을 슬쩍 얹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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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유수열

    예전에 강골마을의 이정민(전 도의원)씨가 기획하고 진행했던 철쭉 두 그루 축제나, 축제의 반란과 같이 외형에 치우쳐서 요란한 축제보다 내면에 충실하고 한 번 찾아온 손님에게도 마음의 고향처럼 푸근함과 감동을 주어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장소로 활용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큰 건물의 득량역보다 초가집의 득량역이 눈에 들어 와야 제멋을 알게 되리라 생각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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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진은 철도 사진작가 김동민(명봉역 명예역장)님이 한 달간 복원작업을 한 것이다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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