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rth and Girth :
    시카고 일대, 혼란에 빠져
    [아트살롱] 예술과 사건 ①
        2017년 03월 20일 11: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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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살롱’ 코너에서 당분간 예술계에서 일어났던 의미 있는 사건들을 설명하고 살펴보는 필자의 글을 몇 차례 나누어 게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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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5월 11일, 시카고 미대(School of Art Institute in Chicago)는 한 학생의 그림 때문에 3일 동안 지옥 같은 혼돈을 맛보게 된다. 그 그림은 예술계 내부와 지역사회 사이에 깊이 파인 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고, 지역사회 내부에 숨어 있던 각종 모순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예술적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폭력 사이에 시카고 전체가 술렁였고 세계적 관심을 받았던 것이다.

    사건의 첫날, 대학원 2년차 학생인 데이비드 넬슨(David Nelson)은 오전 8시에 학교에 도착하여 몇 개의 그림을 걸었다. 그는 학교에서만 폐쇄적으로 열리는 경연인 <Traveling Fellowship Competition>에 참가했다. 매년 시카고 미대는 일정한 시기에 1주일 동안 갤러리로 변하고, 학생들은 모든 매체를 사용해서 자신의 졸업 작품을 발표할 수 있으며, 상금을 타기 위해 경쟁한다. 이 경연을 위해 학생들은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전시할 작품을 개인적으로 선택한다. 물론 사전 심사는 없다.

    넬슨은 운이 좋았다. 그는 전시를 위한 최고의 장소를 뽑았던 것이다. 바로 학교에 오는 사람이라면 절대 피해갈 수 없는 장소인 정문 입구에 인접한 벽이 전시 공간이었다. 넬슨은 5개의 그림을 매달았다. 하나는 다양한 인종 및 민족 그룹을 재현한 작은 인형을 안고 있는, 자신감에 찬 금발의 어린 넬슨(David Nelson)의 자화상이었다. 그 그림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 다른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그 작품이 악명을 떨치게 된 그림이었다. 브라, 팬티, 가터벨트, 스타킹 등 흰색 레이스 (white lace)로 된 여성용 속옷을 입은 과체중인 흑인 시장, 해럴드 워싱턴 (Harold Washington)를 조야하게 그린 그림이었다. 오른손에는 연필을 쥐고 있는 그 그림의 제목은 명랑과 비만이라는 뜻의 <Mirth and Girth>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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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th and Girth

    그런데 이 그림을 걸기 전에 이미 이 그림에 대한 정보가 새나갔다. 그래서 그 그림의 문제점을 누군가가 시의원에게 알렸고 언론도 몰려들었다. 심지어 9시 30 분경 도시의 주요 흑인 라디오 방송국 중 한 곳에서 그 회화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며 (시카고 흑인 사회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시카고 디펜더(defender) 신문의 기자가 이미 총장의 사무실에 방문해 있었다. 정오에는 모든 신문, TV 방송국 및 라디오 쇼가 그 그림으로 논쟁하기 시작했고, 그림이 떨치는 악명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며 도시를 사로잡고 있었다. 군중들이 정문 앞에 모이기 시작했으며, 학교의 보안경비는 사람들이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먹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다수의 백인 예술대생과 다수의 흑인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향해 소리지르는 일이 생겼다. 시민의 권리인 ‘표현의 자유’와 ‘인종차별주의적 폭력’ 간의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문제가 커지자 토니 존스(Tony Jones) 총장은 몇 명의 교수, 행정 및 직원을 소집하여 문제해결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곧장 회의에 돌입했으며, 도중에 그림을 비난하는 전화가 올까봐 수화기를 아예 내려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시카고 흑인 시의원 9명이 학교로 난입했고, 그림에 대한 학술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날아갔다. 사실 그날 오후 시의회는 데이비드 넬슨을 정신병리적 문제가 있는 학생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의회는 회화의 철거와 학교에 대한 시비 지원을 그림을 철거할 때까지 중단하기를 요구했다. 물론 이 요구는 ‘공식 요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성 시의원 도로시 틸만(Dorothy Tillman)과 남성 시의원 앨런 스트리터(Alderman Alan Streeter)는 학교에 진입하여 온갖 허세와 연극적인 제스처로 그림을 벽에서 떼 냈고, <Mirth and Girth>을 끌고 총장의 사무실로 난입했던 것이다. 이때 그림은 한 구석에 약 5인치의 손상을 입었다.

    그 사이 총장의 사무실에 난입한 시의원은 모두 11명이 되었고, 총장을 위시한 위원들에게 그 그림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누군가가 그러한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았으며, 총장의 사무실에 함께 있던 경찰은 그 그림이 교내에 남아 있기에 너무 “선동적”이라고 결정하여 그 그림을 압수하게 된다.

    물론 그림의 압수는 논쟁을 약화시키지 못했다. 군중은 하루 종일 계속 몰려들었다. 학기가 끝나고 졸업하는 기간 동안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었던 학생들은 처음에는 시민적 자유, 즉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많은 학생들이 넬슨이 그린 고(故) 해럴드 워싱턴의 이미지가 시 전역의 흑인 공동체 구성원들만큼이나 교내의 흑인 공동체를 매우 화나게 자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흑인 학생들은 더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학교에 대한 믿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인종주의적 정체성 사이의 모순, 특히 시민적 자유와 인종을 향한 폭력의 금지라는 모순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다.

    학생들은 계속해서 서로 논쟁했고, 저녁에 사건에 대한 언급을 해달라는 언론의 압력을 받고서 간단한 집단 성명서를 내었다. 그 성명서는 “한 예술가의 독창적인 견해일 뿐”이라는 것과 “그 그림이 집단적 견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성명서는 “그 그림의 내용이 공격적이든 아니든, 그 그림은 수정헌법 제1조에 나오는 권리의 보호 하에서 공적으로 볼 수 있도록 허락되어야만 한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기본적인 헌법적 권리의 침해는 어디서든 예술가들의 자유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성명서는 그 그림이 학교 공동체에 열려 있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폐쇄성을 가진 교내 전시 경연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첫날 늦은 저녁, 학교 측은 회화가 가져온 논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하던 중, 흑인 주의회 간부회(a caucus of black state legislator)가 학교법인, 학교 미술관 및 학교에 제공하는 모든 주정부 기금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을 발의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학교는 신속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카고 미대는 파견단을 구성하여 전세를 낸 비행기를 타고 흑인 스프링필드에 있는 주의회 간부회를 만나러 떠났다. 그들은 그 법령의 발의를 중단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그리고 둘째 날이 되었다.

    한 그룹이 스프링필드로 가 있는 동안에, 미술관 이사장인 마샬 필드 V(Marshall Field V)는 학교의 총장과 부총장을 동반하여, 법률 고문과 세 명의 미술관 행정사무직원과 함께 소여 (Sawyer) 시카고 시장을 비롯, 시장의 법인 변호사 저드슨 마이너(Judson Miner) 샤론 가이스트 길리엄(Sharon Gist Gilliam) 수석보좌관, 그리고 11명의 시의원을 만났다. 오랜 시간의 격렬한 논쟁 끝에, 학교는 도시와 그 주민들에게 회화가 초래한 고통에 대해 사과하기로 약속했으며, 앞으로 그 그림을 전시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또한 학교는 좀 더 개선된 노력을 통하여 지역 내 소수자를 대표하는 수준을 부단히 향상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시청에서와 달리, 스프링필드에서 열린 회의는 양측 모두 만족스러운 수준에서 마무리 되었다. 실제로 많은 소문과 오해가 풀렸다. 예를 들어, 흑인 주의회 간부회의 일부 회원은 그 그림이 미대 옆 미술관에 있는 르누아르의 작품들 사이에 공공연히 걸려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른 간부들은 그것이 몇 주 동안 벽에 걸려 있었고 교수와 학생들은 그것을 보았지만 비평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미술계 외부 사람들은 예술 학교에서 진행된 과정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예전 주지사가 재임하던 시기였다면, 그 그림은 학교에서 1분 안에 내려졌을지 모른다. 아무튼 학교의 대표자들은 간부회를 향해 그 그림을 결코 떼 내어 다른 곳에 전시하지 않았다고 확언해주었다.

    사실 학교가 전시로 곤란에 처한 것은 이번만은 아니었다. 예전에 어떤 학생이 냉장고 속에 죽은 쥐를 설치품의 일부로 사용한 적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학교 보건위원회가 조각품의 일부로 살아있는 쥐를 금지한 적도 있었다. 데일리 시장을 낙태 된 태아로 묘사한 그림도 있었고, 토니 존스 총장을 가슴이 드러난 성모 마리아의 품속에서 젖먹이 유아로 그린 그림도 있었다. 바로 이 그림은 바로 데이비드 넬슨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그 내용이 얼마나 논란이 있는지와 상관없이 작품을 철거하지 않았다.

    헤럴드 워싱턴 시장을 모욕하는 그 그림을 전시하도록 허락한 시카고 미대의 교수진, 학생 및 교직원들의 다수가 정작 워싱턴 시장의 선커 캠프에서 일한 바 있고, 실제로 고인이 된 시장의 열렬한 지지자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학교와 미술관 전체의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게 돼 버린 것이다. 이렇게 추락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학교는 흑인 주의회 간부회와 연합했고, 두 그룹 모두 기꺼이 시카고 대학 내부의 학생, 교직원 및 교수진 중에 소수 민족 대표성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동의에 이르렀다. 그리고 학교 역시 이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스프링필드에서의 성공적인 회의와 달리 시청에서의 미팅은 불행으로 치닫고 있었다. 시의원 중 일부는 크게 소리를 질렀고, 그들의 비합리적인 발언으로 인해 학교 행정 담당자들의 화는 머리끝까지 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불안감 역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둘째 날 늦은 오후, 인본주의를 위해 헌신하는 시민단체인 PUSH(People United to Serve Humanity)의 지도자인 윌리 배로우(Willie Barrow) 목사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인종 차별적 관행을 비난하고, 더 많은 흑인 입학생 및 흑인 대표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10명의 흑인 목사들과 나란히 국영방송에 출연했다. 배로우 목사는 회화 사건을 이 전시 사태를 흑인 사회를 향한 공격과 모욕을 일삼는 사건들 중 가장 최근에 벌어진 사건이며, 이처럼 공격적인 그림이 앞으로 다시 전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심의 정책”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 시카고 미대(SAIC)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삼 일째 되던 날, 언론은 다양한 반응을 내 놓았다. 신디케이트 시카고의 칼럼니스트 마이크 로이코 (Mike Royko)는 이 그림을 제거한 사람들을 ‘얼간이 시의원(Alderboobs)’이라 불렀고, 어떤 기자는 이 사건 전체를 ‘팬티 습격’이라 칭했다. 다른 기자는 이 사건을 ‘무장 시의원(Alderposse)’에 의한 ‘예술 습격(Art Raid)’이라 불렀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 사건은 유머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사건을 점점 격해지는 도시 내 흑/백 분리의 긴장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사건은 이제 국내외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교수진과 교직원은 사건을 시시각각 처리하기 위해 정말로 학교에서 살아야 할 지경이었다. 시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항의를 했으며, 시의회와 합의한 문서를 공개한 데 대해, 학교 행정직원들이 너무나 약하고 의지가 박약해서 시의원에게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다른 사람들은 학교가 어느 정도 그러한 그림의 창작을 장려했다고 고발했다.

    행정직원들에게 이날은 정말 힘든 날이었다. 왜냐하면 학교에 대한 폭파 위협이 있었고 학교를 향해 1000명의 강철대오를 이룬 집단들이 진군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거리시위를 PUSH의 배로우(Barrow) 목사가 주도했다. 학교는 이런 상황에서 계획대로 졸업을 진행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물론 학교는 졸업식에 적어도 천 명의 참가자는 확보했다고 생각도 했다. 아무튼 PUSH의 시위자들이 계획대로 예술학교에 도착했고, 때맞춰 많은 군중들도 거기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학생들도 졸업식장인 데일리 광장(Daly Plaza)에 모이려는 예술가들의 출입을 요구했다. 학교 측은 교내에서 모든 집단이 충돌하고 과격한 충돌이 일어날까봐 두려웠다. 걱정을 덜기 위해 학교는 보안을 강화하고 더 많은 도시 보호를 요청했다. 졸업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다행히도 큰 문제는 없었다.

    졸업식 당일 학교와 미술관은 요새처럼 보호 받았다. 경찰차와 사복 경관들과 이를 지원하는 부대가 도처에 있었다. 모두가 살얼음판 위에 있었다. 학교 행정국은 일단 졸업식이 끝나면 학생들이 흩어지고 긴장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건으로 제기된 문제가 비록 해결되지는 않을지라도, 일단 졸업식만 끝나면 무사히 그해 여름학기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업식이 끝나고 나면 깊은 슬픔과 상처는 남기 마련이다. 학교 공동체는 갈가리 찢어졌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그 어떤 집단적 동의를 생산하지도 못했고, 그들이 어떻게 협상을 해야 했는지에 대한 집단적 동의도 없었다. 흑인 교수진, 흑인 교직원, 흑인 학생과 그들에 반대편에 있는 백인들 사이의 관계는 극도의 민감해졌고, 스스로도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많은 라틴계, 아시아계 및 기타 소수 민족이 이 문제의 모든 면에서 소외되었고, 자신의 입지를 논의하기 위해 독립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지역사회에서의 학교의 위치는 심각하게 도전 받았고, 인종적으로 다양한 도심의 중심에 위치한 사립 엘리트 예술 학교의 내재적인 모순이 드러났다.

    이 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물러서서 그 과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엇이 불만인지를 신중히 살펴보아야 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상처 입은 것을 치유할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그제야 사건의 복잡성이 모든 차원에서 드러날 수 있다. 사건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사건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다.  (다음 글에 계속….)

    해럴드 워싱턴해럴드 워싱턴(Harold Washington, 1922년 4월 15일 ~ 1987년 11월 25일)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처음으로 시카고의 시장(1983~1987)을 지낸 미국의 정치인이다.

    필자소개
    <비아트> 에디터. 부산민주시민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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