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도 겁먹는
    도봉산 포대능선 Y계곡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⑫] 친구
        2017년 03월 17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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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망월사로 가족나들이 하다’ 

    일찍 잤고 일찍 깼다. 새벽 5시였다. 박수정의 『여자, 노동을 말하다』를 읽다가 담배와 커피를 들고 옥상에 올랐다. 할매는 열무겉절이를 하고 있었다. 한강 노들 텃밭에서 따온 거였다. 할매는 내가 듣든 안 듣든 아랑곳 않고 얘기보따리를 풀었다. 며느리가 시집 와서 이불 한 번 안 빨았다고 했다. 단골 소재였다. 할매는 걸핏하면 아들과 며느리가 집안일에 무심하다며 핀잔 놓았다.

    탓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당신이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는 사실을 자랑하고픈 의도였다. 얘기는 손녀의 일상으로 옮겼다가 옥상에서 가꾸는 채소들로 이동했다. 할매는 수다쟁이였다. 아버지 살아계셨으면 서로 도란도란 참 좋았을 텐데……. 내 피의 반쪽을 물려주고 가족 돌본다며 고생만 하다 먼저 간 아버지가 아리게 그리웠다. 나머지 반쪽인 할매라도 이렇게 길게 수다를 하며 오래오래 살아야 된다는 염원이 사무쳤다.

    옥상에서 시원스레 바라보이는 남산의 녹음이 어느새 짙푸르렀다. 곳곳에 하얀 아카시아 꽃이었다. 어린 시절의 요깃거리요 장난감이었다. 이맘때면 아카시아에 매달렸다. 허기에 허겁지겁 먹느라 벌레가 섞여 들어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억센 가시에 찔려 피를 보기도 했다. 코는 강렬한 향기에 취했고 혀는 달콤한 맛에 취했다. 꽃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잎으로 놀이를 했다. 아카시아는 잎줄기에 8~18개의 작은 잎이 달린 날개 형태였다. 손가락으로 튕겨 한 번에 누가 더 많은 잎을 떨어뜨리나 겨루는 놀이였다.

    요깃감과 놀이는 계절마다 달랐다. 때론 사루비아 꽃을 따서 단물을 쪽쪽 빨았다. 며느리밑씻개 잎도 먹었다. 시큼한 맛에 시금치라 불렀다. 까마중에 잔디씨도 놓치지 않았다. 쌉싸래한 찔레 새순도 맛있었다. 남산에 들어가 마도 캤다. 쪄 먹으면 감자 같고 생으로 먹으면 물컹한 콧물 같던 느낌이 생생했다. 덤으로 지네도 잡아 한약방에 팔았다. 동네 곳곳의 개천을 뒤졌고 쇠붙이와 전선줄도 주워 고물상에 갔다. 서울의 골목을 시멘트로 바르지 않았을 때라 땅이 살아 있었다. 그렇게 챙긴 동전으론 1원짜리 눈깔사탕이나 10원짜리 건빵을 사 먹었다. 누런 봉투의 건빵 봉지 속엔 낱알이 38~40개 가량 들어 있었다. 집에 가서 동생들과 공평하게 나눴다.

    한1

    삼형제, 앞줄 왼쪽이 둘째 철우고 오른쪽이 막내 영준이다. 1970년대 초반 어느 날 남산 2호터널 입구 육교 위에서

    남산 3호 터널을 뚫는다며 집들을 대규모로 헐었을 때였다. 아이들은 무너진 집채들에 달라붙어 벽돌과 철근을 분리했다. 끙끙대며 건재상에 가져가 돈으로 바꿨다. 열심히 매달리면 수백 원도 가능했다. 당시의 아이들에겐 적잖은 액수였다. 아카시아 꽃에서 시작한 추억 여행은 비석치기에 자치기와 딱지치기, 오징어놀이, 다방구, 팽이치기, 구슬치기 따위로 흘러갔다. 밤마다 골목이나 누구네 골방에 모여서 귀신 얘기 하다가 부르르 떨었다. 동네 빈터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놀던 기억, 빈터에 불을 놓고 깡통 돌리던 겨울 기억, 여자애들이 고무줄놀이 하면 손가락 사이에 면도칼 숨기고 몰래 다가가 톡 자르곤 냅다 도망치던 추억…….

    7시가 됐다. 깨우러 내려갔다. 간밤에 딸은 8시에 나가자 했다.

    “오늘 산에 갈 거야”

    깨워도 안 일어나기에 물었다.

    “어~, 일찍 갈 거야”

    좀 더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다시 작가회의가 2010년에 출간한 『내일을 여는 작가 58』을 꺼내 시간을 죽였다. 45분이 지나 반숙을 준비했다. 8시에 다시 깨웠다. 이번에도 안 깼다. 더 자게 놔뒀다. 그리곤 45분 뒤 또 깨웠다. 역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럼 아빠 혼자 갈 거야.”

    “그래~.”

    빨리 깨우려는 의도였는데, 황당한 답이 돌아왔다.

    “오늘 아빠, 너랑 산에 가려고 고등학교 졸업 기념 등산에도 안 갔단 말이야.”

    나는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

    미안했던지 딸은 바로 일어났다.

    5월 25일 일요일, 오늘 나는 중요 일정 두 개를 쨌다. 하나는 용산고 34회 졸업 30주년 기념 등반이었다. 또 하나는 청우회의 경복궁 야유회였다. 청우회는 전태일 죽음 이후, 그의 친구들과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이 만들어 투쟁했던 70~90년대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의 친목 모임이었다. 회원은 아니지만, 내가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전태일재단의 중요 일정이었다. 둘 다 포기한 이유는 딸과의 산행 때문이었다. 두 일정엔 내가 없어도 되지만, 동반산행은 내가 없으면 성립이 불가능했다.

    목표는 도봉산 포대능선이었다. 웬만한 어른도 겁먹는 Y구간이 있었다. 산에 들어서자 아이는 속도를 내며 뛰었다. 산길을 뛰기 시작한 것은 8차 동반 산행이던 지난주부터였다.

    “다리는 앞으로 나가는데 숨 쉬기가 힘들어. 가슴이 간지러워.”

    딸은 뛰다가 헉헉대고, 잠시 쉬다 또 뛰며 헉헉대고, 또 잠시 쉬고……, 딸아이는 산의 정령들과 훌륭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체력과 인내심을 동시에 얻었다. 덕제샘에서 물 한 잔씩 마시고 갈증을 달랬다. 이번엔 푯말에 적합이라 도장 찍혀 있었다. 딸과 나는 웃었다. 절에 도착해서도 우물물을 마시며 잠시 쉬었다. 망월사 우물바위는 언제 봐도 늠름했다. 다시 산을 올랐다.

    “한잠 자고 싶어.”

    딸이 몹시 졸린 듯했다. 절까지의 걸음걸이와 확연히 달랐다. 새벽 1시 45분에 잤다고 했다. 한 시간 더 재울 걸 일찍 깨웠다 싶었다.

    “왜 늦게 잤냐”

    “전화로 친구 연애 상담을 하다가 늦게 잤어.”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친구는 양성애자였다. 연인도 여학생에 양성애자였다. 친구가 연인과 헤어져야 할지 말지 고민했단다. 연인이 이성 친구와 극장에 가고 음식점에도 간 걸 확인한 때문이었단다. 성적 차이도 원인으로 작용했단다. 친구는 공부해도 성적이 안 좋고, 연인은 공부를 잘한댔다. 오랜 상담 끝에 친구는 연인과 헤어지기로 했단다. 나는 노파심에 말했다.

    “누리야. 본인이 커밍아웃 하기 전엔 아빠든 엄마든 어떤 친구에게도 걔가 누군지 말하면 안 돼. 스스로 공개하기 전엔 성 정체성을 보호해야 하는 거 알지? 혜정이한테도 얘기하면 안 되는 거야.”

    “그거야 잘 알지. 걱정하지 마. 근데 혜정이도 알고 있어. 전에 같이 만났거든.”

    딸은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타인이 폭로하면 안 된다는 아웃팅 문제를 알고 있었다. 딸이 말을 이었다.

    “내 상담은 친구 고민을 들어주는 것이었어. 전화기 잡고 오랫동안 들어줬어. 친구가 어떤 결정을 하든지 나는 동의한다는 말도 해 줬어. 내가 그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어”

    나는 딸을 칭찬했다.

    “아주 잘했어. 힘들어 할 때 누군가 옆에서 고민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상담이 되고 치유가 될 수 있지.”

    천천히 오르며 몸 눕힐 만한 크기의 적당한 바위를 찾았으나 없었다. 포대능선 입구까지 가서야 발견했다. 딸은 눕자마자 코를 ‘흐으~, 흐~’ 가늘게 골며 잘도 잤다. 15분 재우려던 생각을 30분으로 바꿨다.

    어느 학자가 고등학교 1학년은 하루 9시간 자야 적당하다 했다. 딸내미에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였다. 휴일에라도 보충해야 하는데 극성스런 아빠와 산에 온답시고 7시간밖에 못 잤다. 곤하게 자던 딸이 꿈틀 했다. 개미가 몸에 기어올랐다. 얼씬대지 못하도록 멀찍이 쫓아냈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에 바람을 만들어 줬다. 딸은 25분 만에 깼다. 다리 네 쌍의 빨갛고 조그만 곤충들 탓이었다. 최근에 살인진드기란 악명으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작은소참진드기 아닐까 걱정하며 살폈다. 다행히 다른 종류였다.

    “몸이 너무 좋아졌어.”

    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드디어 Y계곡에 들어섰다. 내리막에선 내가 앞섰고, 오르막에선 딸이 앞서게 했다. 혹시나 아이가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밑에서 온몸으로 받치려는 의도였다.

    내리막에서 딸은 더듬더듬 겁을 냈다. 쇠기둥과 난간이 있다 해도 아득하게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두 눈 아래로 펼쳐지는 끝 모를 벼랑은 어른도 아찔했다. 등산모임의 일원인 듯한 몇몇 중년 여성이 무섭다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딸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무서워. 발이 짧아서 안 돼.”

    키 작은 딸은 난간을 붙들고 애를 먹었다. 노년기에 접어든 남성이 딸의 뒤를 바싹 따라 내려오며 이래라 저래라 도움을 줬다. 대견하다며 칭찬도 했다.

    웬만한 어른도 겁먹는 포대능선 Y계곡을 딸아이가 씩씩하게 오른다

    내리막에선 겁먹던 딸이 오르막에선 씩씩하게 금방 올라갔다. 낭떠러지가 눈에 어른대지 않아서였다. 나는 딸이 벼랑 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밑에서 안내했다. 딸은 Y계곡을 벗어나며 자신이 타고 온 구간을 뒤돌아보곤 몸서리쳤다.

    “으으~. 다시는 여기 안 올 거야. 아빠가 여기 오자고 하면 그냥 집에 있어야지. 엄마는 여기 오면 울 거야.”

    나는 피식 웃었다. 자운봉 밑에서 김밥을 먹으며 딸에게 제안했다.

    “고등학교 3년간 언제 또 와 볼 수 있겠냐. 온 김에 신선대도 오르자.”

    “왜? 다시 올 수 있지.”

    딸은 대답하며 웃었다. Y계곡을 건넜다는 사실에 자신감과 성취감이 붙은 듯했다. 스스로 뿌듯한 모양이었다. 신선대에 올랐다. 딸은 역시 오르는 건 잘 했다. 하지만 올라서서는 무섭다며 다래넝쿨처럼 나에게 엉켰다. 그 모습에 등산객 몇몇이 웃었다. 바위에 앉아 경치를 음미하다 사진 찍고 내려왔다.

    오늘은 등산로에 집중하느라 준비한 대화를 놓쳤다. 미토콘드리아 DNA를 소재로 여성의 권리와 주체성을 얘기하려 했다. 1개의 인간 세포엔 수백수천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들어있고, 1개의 미토콘드리아 DNA엔 수십 개의 유전자가 들어있다 했다. 그걸로 인류의 가계도를 확인할 수 있는데, 여성을 통해서만 유전된다고 했다. 남성을 통해선 조상을 파악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권력과 부를 독점한 채 부계사회를 형성하고 남성 중심 족보를 쓰고 심지어 결혼과 동시에 남성의 성을 따르도록 하는 제도가 엉터리란 의미였다. 여성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라 격려할 생각이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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