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자가 경고하는
    핵발전의 진짜 문제점들
    [책소개]《핵을 넘다》(이케우치 사토루/ 나름북스)
        2017년 03월 11일 11: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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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9월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후유증을 남겼다. 지진과 이로 인한 재난으로부터 대한민국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안도감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은 경북 지역에 밀집한 원자력발전소로 쏠렸다.

    우리나라는 국토 면적당 원전 설비용량은 물론 단지별 밀집도, 반경 30킬로미터 이내 인구수 등이 모두 세계 1위다. 고리 원전은 전 세계 원전 단지 중에서 주변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산다(380만 명). 월성, 한울, 한빛 등 국내 모든 원전이 세계 최다 원자로 밀집 단지 10위 안에 든다. 만에 하나 대형 사고가 난다면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재앙이 초래될 것이다.

    원전의 문제점이나 방사능 피해에 관한 우리의 인식은 체르노빌 피해자의 처참한 사진이나 ‘무서운 이야기’ 수준의 괴담을 넘어 3.11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원전 사고로 한층 구체화되었다. 동일본대지진으로 2만여 명이 사망한 가운데 일본 정부가 밝힌 원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1,300명을 넘어섰고 6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늘고 있다.

    『핵을 넘다』에는 원전 홍보관 견학 프로그램에서 설명을 들은 초등학생이 홍보 안내원과 주고받은 대화가 실려 있다. “펠릿이 파괴되면 어떻게 되나요?” “펠릿은 지르코늄이라는 단단한 금속 피복재로 둘러싸여 있어서 괜찮아요.” “연료봉이 부서지면요?” “압력용기가 지켜주겠죠.” “압력용기가 파괴되면 어떡하죠?” “그건 격납용기에 둘러싸여 있어요.” “그 격납용기가 파괴되면요?” “튼튼한 건물이 에워싸고 있잖아요.”

    긴 문답 끝에 초등학생이 “건물이 파괴되면요?”라고 마지막으로 물었을 때 안내원은 끝내 화를 냈다고 한다. “건물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안전하다던 원자로는 결국 붕괴했다. 미디어를 통해 후쿠시마원전 폭발 과정을 시시각각 지켜본 우리는 원전의 ‘안전’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이 확인되자 불안은 실체가 되어 다가오고 있다.

    핵을 넘다

    이런 와중에 공개된 영화 <판도라>는 이해관계에 얽힌 원전 정책, 재난 사고 대처에 관한 정부의 무능력을 에둘러 비판하는 동시에 원전 사고라는 재난 현장을 처음으로 생생하게 그려 위험성을 경고했고, 최근 대선 유력 주자들 또한 원전 건설 계획 재검토부터 ‘원전 제로’ 사회까지 다양한 탈원전 구상을 내놓고 있다.

    바야흐로 탈핵을 고민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독일, 벨기에, 스웨덴,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이 탈원전을 선언하거나 가동을 서서히 중단함으로써 실천에 옮겼고, 대만도 아시아 최초로 2025년까지 ‘원전 제로’를 발표했다. 원자폭탄(히로시마, 나가사키), 수소폭탄(비키니 환초 실험), 원전 폭발(후쿠시마)이라는 가공할 재앙을 모두 겪은 세계 유일의 국가인 이웃 나라 일본의 고민도 깊어가고 있다.

    『핵을 넘다』는 일본의 저명한 천체물리학자 이케우치 사토루가 핵의 위험성부터 원전의 문제점, 미래의 대안까지 제시한 완결성 있는 ‘탈핵’ 저서다. 저자는 과학자로서의 지식과 양심에 근거해 핵 기술의 원리를 따지는 한편, 과학과 군의 유착, 원전이익공동체의 어둠 등을 비판한다. 원전이 왜 위험한지에 관한 꼼꼼한 분석과 태생적으로 지니는 원전의 반윤리성을 고발하는 대목에서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넘나드는 통찰이 드러난다.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미래의 에너지, 대안 문명까지 고민하는데 단순한 방향 제시가 아닌 재생가능 에너지로 교체하는 과정의 로드맵을 상당히 구체적인 지침으로 서술했다. 지식인으로서 미래 세대와 인류의 존속을 고민하며 ‘시간의 지평선을 길게 잡아’ 삶의 방식을 바꾸고자 하는 성찰이 돋보인다.

    원자력에너지로 변신한 핵무기, 자본주의의 주구가 된 과학기술
    원전 역사 50년의 경험… 10년에 한 번은 중대사고 날 것

    현대 세계 국가들의 힘의 원천 중 과학기술이 점하는 지위를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냉전시대에 더욱 두드러졌고 과학기술은 곧장 무기 확장과 연결됐다. 원폭을 실제로 사용한 유일한 나라 미국은 더 큰 폭발력을 위해 1954년 비키니 환초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벌인다. 실제 폭발력을 예측조차 못해 광범위한 방사능 오염이 발생했고 무려 200킬로미터 밖 롱겔라프 섬의 오염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인 채다. 이 수폭실험에 일본 어선이 휘말렸지만 피폭 사건으로 기록조차 되지 못했다. 비키니 사건은 메가톤급 초대형 무기인 수소폭탄의 공식 출현이자 피폭 사건이다.

    1차 세계대전의 독가스를 시작으로 과학자들은 군사무기 개발에 동원돼 왔다. 전차, 잠수함, 폭격기, 생화학무기… 전쟁을 위해 과학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2년 원폭이 개발됐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하지만 과학과 군사의 유착은 그때부터 공고해져 오늘날에 이른다. 미국 과학자들은 전쟁 승리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으로 무기 개발과 협력, 비인간적인 인체 실험에 대한 저항감이 사라졌다. 정부로부터 돈과 연구 환경을 보장받으며 군사 전문 연구기관에 들어갔고, 되려 적극적으로 공동연구를 제안하게 되었다(미국의 군사 연구 체계는 일본이 추진 중인 모델이기도 하다).

    이 같은 일상적인 군사 연구는 전후 70년간의 무차별적 핵 확산의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등 원폭 개발 경험이 있는 나라들은 반드시 수폭에도 손을 뻗었다. 기술이 축적되며 후발주자들의 개발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핵 기술 독점 의도가 의심되는 5개 핵 대국의 핵 확산 금지조약(1970년)을 거쳐 소련 붕괴(1991년)에 이르기까지 도합 2천 회가 넘는 무의미한 핵 실험이 지구에서 반복됐다. 핵탄두가 가장 많았던 1985년(6만5천 개)의 폭발력은 지구 65억 인구 한 명당 2톤이었다. 현재(2013년 기준)에도 핵무기는 세계에 1만7천 개가 있다. 따라서 핵전쟁의 위기도 엄연히 존재한다. 저자는 이를 피할 방법은 오로지 핵 철폐뿐이라고 말한다.

    세계의 핵 개발 노선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 1953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UN연설이다. 아이젠하워는 군이 독점하던 원자력 기술을 동맹국과 민간에 개방하겠다며 ‘평화를 위한 원자력’ 사용을 천명했다. 이제 핵무기의 ‘메가톤’에서 원자력에너지의 ‘메가킬로와트’ 시대로 전환이 일어난다. 이로부터 50년 이상이 지난 현재, 전 세계에서 원자력 발전이 이뤄지고 있으며 날로 대형화 추세다. 무기 대신 평화롭고 실용적인 과학기술을 사용하게 되어 환영할 만한 일일까? 저자는 이를 두고 ‘안전신화와 경제성을 내세우는 원전을 축으로 과학기술이 자본주의의 주구가 됨으로써 초래된 결과’라 보았다.

    핵분열의 연쇄 반응을 폭주시키면 원폭, 제어하면 원전이므로 반응 속도를 제외하면 물리적 과정은 다르지 않다. 하물며 원전은 일거에 흩어지는 원폭과 달리 장시간에 걸쳐 방사성 폐기물이 대량으로 누적되고 있다. 저자는 이를 지적하며 원폭과는 또 다른 원전의 심각한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를 간과하거나 얼버무리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니 괜찮다는 주장이 후쿠시마원전 사고를 불렀다는 것이다. 아울러 일본 및 세계 각국의 원자력 개발 현황을 살펴보고 사고 사례와 중대사고 확률 계산 등 실제 수치를 제시하여 주장을 뒷받침한다.

    원전의 ‘원죄’, 존재 자체가 지닌 반윤리성을 묻다
    경제 논리보다 중요한 것은 땅 위에서 살아갈 인간의 권리

    이 책이 지적하는 원전의 문제점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반윤리성’이다. 존재 그 자체, 가동하는 것만으로도 차별이 발생하고 인류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원전이 안전하다면서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에 원전을 건설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인구가 적고, 개발에서 뒤처진 소외 지역이 ‘제물’이 된다. 일단 받아들이기로 하면 지역 전체가 원전에 의지해 살아가게 되어 돌이킬 수 없다. 전력회사가 거액의 기부금을 내놓거나 골칫거리를 지방에 떠넘기는 구조는 우리의 송전탑 추진 과정과도 닮았다.

    또 원전은 우라늄 채굴부터 정련, 장전, 점검 수리, 처리, 폐기, 폐로 등 전 과정에서 현장 노동자들을 피폭시킨다. 원전은 그렇게 가혹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노동으로 시동된다. 세대 간 윤리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10만 년에 걸쳐 엄중히 관리해야 하는 방사능 폐기물을 우리 세대는 그저 쌓아 두기만 하고 있다. 소외 지역, 소외 노동자, 미래 세대에 원전의 문제가 이미 ‘떠넘겨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후쿠시마 사고의 경우 방사능 오염 문제마저 그렇다. 이미 고향을 빼앗긴 주민들이 배제되는 것은 물론, 여분의 방사능을 전 세계인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반윤리성을 고유한 특성으로 지니는 과학기술이란 핵(핵무기와 원전)뿐이라며 이를 추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렬히 탄식한다.

    그렇더라도 원전을 철저히 안전하게 운영하면 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과학자인 저자는 이를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기술에 절대적인 건 없다’는 것이다. 안전기준 또한 상대적으로밖에 충족될 수 없으며 어떤 천재가 엄습하더라도 원전이 절대 파괴되지 않도록 대비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한다. 원전의 내진기준이나 안전성 기준은 모두 인간이 예상하여 상정한 한도 범위 안에 있다. 일본은 원자로가 파괴될 리 없다며 35억 엔의 예산이 들어간 원격로봇을 폐기했다. 외부전원이 상실될 거란 예측도 못했고 보조엔진은 외국 기술에서 수입한 그대로 지하에 설치해 지진해일에 침수됐다. 도쿄전력은 지하수가 방사능으로 오염될 거란 지적도 무시했지만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기술이란 그것이 필연적으로 내포한 한계를 인간이 겸허하게 직시하고 철저한 조치를 취할 때에만 간신히 사용 가능해진다”는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 작업 과정에서 특정한 절차를 생략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 절차 생략이 관행이 된다거나, 건전한 비판자들을 향해 ‘발목 잡는다’며 배제하는 분위기를 경계하자는 지적은, 세월호 사태를 겪으며 안전 불감증과 재난 대처능력을 문제삼기 시작한 우리의 처지에도 비춰 봄직하다.

    정치권, 관료, 전력업계, 언론, 원자력 전문가 등 원전이익공동체로 묶인 세력의 원전 추진과 ‘안전신화’ 유포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판결이 일본에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2014년 오이원전 3,4호기 운전 정지 판결이다. 이 판결은 원전이 전기 생산이라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경제활동의 자유는 헌법상 인격권보다 낮은 위치에 놓여야 한다고 명확하게 밝혔다. 원전사고에 의해 근원적인 권리인 인격권이 박탈당할 수 있다고 보아 중지를 용인한 것이다. 원전 추진파가 전력 공급과 비용 문제를 들고 나왔지만 이 또한 묵살됐다. “만에 하나 원전 운전 정지로 거액의 적자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풍요로운 국토에서 국민이 뿌리내려 생활할 조건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후자가 더 큰 국부 상실”이라는 판결문은 역사에 한 획을 그었고 원전 문제에 관한 법적, 철학적, 도의적인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도 일본을 비롯한 국가들이 원전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에 따르면 이는 건설 초기 투자비용이 큰 원전의 특성 탓이다. 따라서 가급적 오랫동안 가동해 이익을 짜내려 한다. 또 전력회사 입장에선 정부가 사고 뒤처리를 떠맡아 준다는 장점도 있다. 원전마피아 등의 시스템이 공고하게 구축돼 있다는 점과 원전을 가동하지 않으면 방사성 폐기물 처리도 곤란해지는 점 등은 원전을 멈출 수 없는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일본 전력회사가 원전 계속 가동을 위해 정전 사태를 위협하거나 소비자에게 전기료 인상을 압박하는 실태, 정부와 관료가 환경 문제를 운운하며 이를 돕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저자는 일본 전력요금에 원전 추진비용이 숨겨져 있음을 폭로하면서, 어용학자가 이에 동원되는 시스템, 무책임한 ‘에너지기본계획’ 등을 상세히 파헤친다. 이에 따라 결론은 ‘일본은 원전을 가동할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지하자원 문명에서 지상자원 문명으로
    주체적으로 생산하고 정도껏 소비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지상자원’ 중심의 문명이다. 인류가 지하자원을 사용함으로써 생산의 변혁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석탄은 앞으로 200년, 석유와 천연가스, 우라늄 등은 50년 정도의 사용량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라는 지하자원 문명의 안이한 특성 탓이다. 그러면서 이산화탄소 농도는 최근 50여 년 동안 급속히 증가해 지구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10만 년간 폐기물을 엄중히 보관해야 하는 원전이나 추출 과정에서 이산화탄소의 20배가 넘는 온실효과를 유발하는 셰일가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지하자원 문명이 가져온 기술 체계를 고려하는 한편 그 폐해도 확실히 파악하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여기엔 환경 문제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폐해도 포함된다. 생산, 소비, 폐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체제에 모든 것을 맡기는 ‘무책임’ 민주주의, 지하자원 문명을 근간으로 발전한 이윤 중심 자본주의의 비인간성, 더 많은 소비를 요구하는 대량생산 문명의 모순 등이 그것이다.

    화력발전소도 원자력발전소도 문제에 봉착한 지금, 지상자원 문명의 구축은 우리가 고민해 보아야 할 전망 중 하나다. 지상자원이란 햇빛, 비, 바람, 바다, 초목처럼 땅 위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에너지원이다. 이것들로 태양광, 태양열, 풍력, 수력, 조력, 지열, 바이오매스 에너지 개발이 가능하다. 이런 자연 에너지들은 화석연료처럼 태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지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적정한 관리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재생가능 에너지’다.

    장점은 또 있다. 지상자원 문명의 기술 체계는 필연적으로 소형화, 분산화, 다양화되는데 이는 소비자 개인의 자립과 지방분권을 돕는다. 정도껏 생산하고 소비하며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은 곧 민주주의 본래의 정신이기도 하다. 현재와 같은 획일적인 도시 구조 시스템이 자연재해에 대규모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과는 달리, 분산화하고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스스로 전기를 생산하고 물을 공급하는 지상자원 문명에선 강한 위기 대처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 자원 고갈로 공멸하기 이전에 지상자원 시대로의 전환을 준비하자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설득력 있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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