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얄궂은 운명, 그 뒤에는...
    [철도이야기] 사고예방대책의 부재
    By 유균
        2017년 03월 10일 08: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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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제주도에도 철길 있었네’

    1999년 9월 19일~24일, 태풍 ‘바트’의 영향으로 영남권에는 382㎜의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사고 당일, 24일(추석) 오전 9시 55분경에 영동선 승부역에서 542무궁화열차(동대구→강릉)와 2504단행기관차(철암→영주)가 교행을 하며 승무원 간 손 인사를 하고 10분 정도 뒤에 2504열차는 62K400 지점에서 폭우로 노반 밑부분이 유실된 것을 모르고 지나가다 전복되어 기관사 권순철씨(38)와 부기관사 박정현씨(28)가 순직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사고 나기 바로 전에 지나간 542열차 후부 객차에는 순직하신 권순철씨의 친형인 권순훈씨가 편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기관사 박정현씨는 사고 당일 2504열차의 승무 담당이 아니었습니다. 그 열차는 행로표상 고(故)장호원씨의 교번이었습니다. 24시 대기였었고 충당이 되었지만, 고(故)장호원씨는 이번 추석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첫 번째 기일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열차에 탈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박정현씨가 대신 승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박정현씨가 선을 보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또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사고 전날인 23일은 60K300 지점에서 선로가 유실되어 밤새도록 복구작업을 하여 07시 30분경 최초열차 통과 후 마무리 작업을 하고 09시 50분경에 분소장이 선로 순회하던 중 사고 발생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고 당시 영동선은 이곳뿐만 아니라 몇몇 곳에서 산사태나 낙석위험 등으로 재해우려지역은 15키로 이하의 속력으로 운행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현장

    이하 사진은 필자

    사고와 관련해서, 처음에는 빗물이 선로 위로 넘쳐 흘러 542열차 기관사가 선로반을 부른 것으로 알았고 또 형인 권순훈씨의 구술에 의하면, 맨 후부 객차에 편승을 가는데 사고 지점을 지나갈 때 왠지 쑥 내려가는 느낌이 있었다, 평시 같으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잊어버렸겠지만, 내 동생이 사망했다니까 더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542열차 기관사였던 신홍식씨에게 확인한 결과 아무런 이상 못 느끼고 무전 없이 그냥 통과했답니다.

    따라서 사고보고서나 구술 등을 종합하면 9시 57분경에 승부역을 출발하여 재해우려지역(66K600)을 지나 10시 10분경 63K400지점에서 산사태가 발생하여 비상정차를 한 다음 이상 유무를 판단하고 분천역에 ‘현장확인 하라’는 무전통보를 한 뒤 다시 출발하며 바로 사고가 발생한 듯합니다.

    위험개소와 산사태의 위험을 피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부기관사는 담배 한 개피 꺼내 다 피우지도 못하고 사고가 발생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기관차로부터 시신을 빼낼 때 채 못다 핀 담배가 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주기관차 승무원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애도하는 마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던지곤 한답니다.

    담배

    권순철씨는 4남1녀 중 3남이었으며 술은 많이 마시지 못하였으며 부인과 슬하에 아들이 둘 있었고 성격이 원만했다고 합니다. 박주현씨는 장남으로 어머님과 여동생 2명으로 역시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며 내성적이며 남을 많이 도와줬다고 합니다.

    사고 발생 후 형인 권순훈씨와 박주현(박정현씨 사촌형)가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작업자 이외는 통제해서 자세히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관차로부터 시신을 빼기 위해 문을 용접기로 절단하려고 했지만, 기관차가 이중 철판 구조로 철판 사이에 석면이 가로막아 작업이 불가능해 포크레인으로로 떼어냈다고 합니다. 박주현씨의 구술에 의하면 병원에서 시신을 확인할 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 손목시계와 운동화로 확인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영주기관차 지부장은 금호섭씨로 사고의 원인 규명에 대한 의지는 없었던 듯합니다. 오히려 철도청 영주지방청장이 먼저 모금운동을 전개하며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던 경향이 더 컸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부는 거기에 편승했고요. 1999년은 철도노동조합이 민주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으리라 판단합니다.

    장례 절차 역시 영주기관차 지부와 영주기관차 사무소는 크게 생각하지 않은 듯합니다. 이에 전태을씨는 반발을 하며 지부장에게 “노제를 지내고 지방청장에게 항의를 한 후 영주지방청장 장(葬)으로 치르자”라고 의견을 내니 지부장이 “유가족을 설득하면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여 유가족을 설득시키고 이제 약속대로 진행하자고 말하니 지부장은 몇 시간 후면 발인인데, 준비된 것도 없고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다시 댔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제천기관차에서 준비할 수 있으니 조합원들에게 문자 보내서 소집명을 내리라고 따지고 있는 도중에 누군가 조합원 중 한 명이 급하게 호출하며 “본청에서 내려와서 전태을씨를 찾고 있으니 빨리 나가라”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나가야 하냐? 난 정당하게 내 친구 장례식에 참석했다.”라고 하니 그래도 지금은 자리를 피하는 게 좋다면서 강제로 택시에 태워 내보냈다고 합니다. 그 후 장례는 사무소장 장(葬)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은 영주지방청(영주기관차사무소)에서 임시열차를 내 영주기관차 조합원들과 가족들이 추모제를 지냈지만, 시간이 지나며 참가 인원도 조금씩 줄어들었고 유가족들도 현장에 가는 것에 대하여 심적으로 매우 힘들어했답니다. 지금은 임시열차도 없어졌으며 영주기관차 승무지부 간부들과 박정현씨 친구(영주기관차 승무원)들 정도만 참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후 철도공사는 2013년 추모비가 철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며 달랑 동판 하나만 줬답니다.

    철도

    추보미

    추모비는 사고 후 1년 뒤에 영주기관차 승무원이 갹출해서 세웠으며 형인 권순훈씨가 크게 반대했다고 하여 이유를 물어보니, 이미 묘지가 있으며 추모비라도 있으면 내가 운전하며 그곳을 지날 때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못 견디겠답니다. 그래서 그 앞을 지나갈 때 눈길 한 번도 안 줬답니다. 하지만 개인으로는 반대했지만, 영주기관차 승무원이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반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동생이 사망한 뒤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먹고 살려니 그럴 수도 없고 견디기가 힘들어 혼자 술 마시는 버릇이 생겨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조치사항으로 책임자 처벌은 없었고 영주보선사무소와 영주지방철도청 시설국은 선로관리 소홀로 ‘기관경고’, 본청 시설국은 현업 관리감독 미흡으로 ‘주의촉구’로 처리되었습니다. 만약에 당시 비가 조금 더 왔다면, 아니면 단행기관차가 먼저 출발하여 여객열차 전복되어 여객에게 사상사고가 발생해도 과연 같은 결과였을까요? 또 당시 철도청장이었던 정종환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고 재발방지 대책을 살펴보면

    1. 발생지점에 옹벽 설치.
    2. 급류로 인한 노반 침식 및 세굴 우려 개소 일제 조사 후 특별관리.
    3. 재해우려 지역 엄정조사(4월, 10월) 및 해소 대책 강구.
    4. 기상악화 시 선로경계 및 운전취급 엄정.
    5. 선로 연변 정비 철저. 등으로 사고가 발생하면 늘 사용하는 대책 문구입니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미 있는 정해진 여러 가지 대책 중에서 사고 내용에 걸맞은 것으로 몇 개 골라 넣으면 재발방지 대책이 됩니다.

    그리고 해마다 두 차례씩(4월, 10월) 안전점검을 합니다. 2002년 9월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영동선 교량 3개가 유실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철도청은 “해마다 2차례 실시되는 안전점검은 평상시 열차운행에 위험이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으로 이번과 같은 수해를 염두에 두고 실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4번 세부항목 중 눈에 띄는 문구가 있어 소개하면 *위험 우려 시 열차운행 중단조치.

    하지만 달랑 이렇게만 쓰면 대책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누가 어떤 때 중단조치를 시행할 수 있는지 또 책임한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전혀 쓸모없는 대책입니다. 당시 분천-승부역뿐만 아니라 영동선 여러 곳이 붕괴의 위험이 있어 그곳을 지날 때는 15km의 속력으로 지나가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즉, 언제든지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므로 무리하게 운행하기보다는 누군가는 열차를 중단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명절 대수송 기간에 책임지고 열차운행을 중지시킬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참사는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사고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후 동종의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훗날 2007년 6월 3일 가좌역 선로침하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도 선로침하로 대형사고가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책임지고 열차운행을 중단시키지 못했습니다. 선로침하 직전에야 가좌역장이 수신호로 진입하는 여객열차를 정지시켜 가까스로 대형 참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좌역 사고에도 불구하고 같은 상황이 발생할 때 사고를 예방할 시스템이 마련되어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두 분의 희생을 부질없는 희생이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두 분의 이름을 딴 법이나 규정을 새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이 글은 ‘아! 전기협’에 대한 구술 도중 알게 된 내용으로 특별한 사연을 지니고 있어 2016년 10월에 다시 전태을, 권순훈, 박주현, 장호원, 신홍식, 이준용, 이건홍, 강영기, 김석진(영주차량)씨에게 구술하였으며 김석진씨를 제외하고 모두 영주기관차 승무원으로 근무했거나 현재 재직 중입니다. 그 중 장호원씨는 2015년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내용은 구술, 신문, 사고보고서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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