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겉모습 아닌 내 진짜 모습
    [그림책] 『빨강』(마이클 홀/ 봄봄)
        2017년 03월 08일 10: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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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강이라는 제목을 파란색으로 쓰다

    표지에는 윗부분이 파랗게 칠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더 진한 파란색 에폭시로 ‘빨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제목이 빨강인데 왜 제목을 파랗게 써 놓은 것일까요?

    눈썰미 있는 독자들은 표지에서 더 많은 단서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표지의 윗부분을 파랗게 칠하고 있는 크레용이 바로 아래 보입니다. 그런데!!! 파란 크레용을 감싸고 있는 라벨 종이는 빨간색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검은 글씨로 빨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빨강이라는 이름의 파란 크레용이 파란색을 칠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지 아랫부분에는 올리브색, 검정색, 주황색, 연두색, 노란색 크레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황 크레용이 ‘뭐야?’라고 얘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심지어 노란 크레용은 ‘아이고.’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큽니다.

    빨강

    연필이 크레용을 이야기하다

    표지를 넘기면 새빨간 면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이야기를 들려줄 노란 연필이 나옵니다.

    “내가 아는 한 크레용의 이야기예요.”
    -본문 중에서

    노란 연필이 빨강 크레용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니까 크레용이 크레용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연필이 크레용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입니다. 잠시 생각을 해 보니 이게 참 이상하고도 기막힌 아이디어입니다.

    우선 연필의 세계는 흑백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크레용의 세계는 컬러의 세계입니다. 흑백텔레비전과 컬러텔레비전, 흑백사진과 컬러사진처럼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색깔이 사라진다면? 아마 상상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연필은 흑백의 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총천연색 라벨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노란 연필은 겉모습이 노란색이란 뜻일 뿐 연필심은 언제나 검정색입니다. 반면 크레용은 컬러의 세계를 표현하면서 자신과 똑같은 색의 라벨 옷만 입습니다. 따라서 빨강이라는 옷을 입은 파랑이라는 크레용은 존재 자체가 실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레용과 연필 가운데 누가 진짜 컬러풀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요? 이거 정말 기막힌 발상이 아닌가요?

    그 애는 빨강이었어요

    “그 애는 빨강이었어요.”
    -본문 중에서

    연필이 들려주는 크레용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림에는 검정색을 배경으로 ‘그 애’가 보입니다. 빨간 라벨 옷을 입은 파랑 크레용이지요. 그런데 연필은 그 애를 빨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애’가 빨간 라벨 옷을 입고 옷에는 분명히 ‘빨강’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빨강이는 빨간색을 잘 칠하지 못했습니다. 빨간 소방차를 아주 새파랗게 그렸습니다. 주홍 선생님은 빨강이에게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빨간 딸기들을 그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빨강이가 그린 딸기들은 여전히 아주 새파랬습니다.

    과연 빨강이는 빨간색을 잘 칠할 수 있을까요? 왜 아무도 빨강이가 파랑이라는 사실을 모를까요? 그리고 이제 빨강이 앞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진짜 나를 찾아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빨간색을 칠할 수 없는 빨강이라는 이름의 파랑 크레용은 얼마나 억울할까요? 하지만 빨강이는 자신이 억울한 처지에 있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빨강이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다른 크레용들의 요구에 따라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려고 온힘을 다해 노력합니다. 자신이 파랑이 아니라 빨강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장에서 누군가의 실수로 빨강이라는 옷을 입게 된 파랑이는 자신을 빨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크레용들도 파랑이의 빨간 옷만 보고 파랑이를 빨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빨강이와 다른 크레용 모두 빨간 옷을 입은 파랑이의 진짜 정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파랑이라는 진짜 자기 모습을 모르고 빨간색을 칠하려고 애쓰는 빨강이의 모습은 진짜 코미디입니다. 그리고 빨강이의 겉모습만 보고 불가능한 주문을 연발하고 절망하는 다른 크레용들의 모습 역시 코미디입니다. 그림책 『빨강』은 보통 코미디가 아니라 요즘 말로 ‘역대급’ 코미디입니다.

    하지만 이 코미디를 보는 독자의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편치 않습니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라벨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남자, 여자, 게이, 황인, 흑인, 백인, 혼혈, 부유층, 중산층, 빈곤층, 기독교인, 불교인, 무슬림, 우파, 좌파, 보수, 개혁, 노동자, 자본가… 사람들이 서로에게 붙이는 라벨은 끝이 없습니다.

    그림책 『빨강』은 시종일관 슬랩스틱 코미디와 만담으로 독자를 웃깁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웃다가 결국 울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라벨이 아니라 진짜 나의 모습이니까요. 진짜 행복은 나답게 사는 것이니까요.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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