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의 종언'에서
    다시 '노동의 정치'로
    [노동·문예 노트] “탈정체화의 정치”
        2017년 03월 07일 08: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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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평론가 박형준 선생의 새 칼럼 <노동·문예 노트> 연재를 새로 시작한다. 첫 글은 계간 <오늘의 문예비평> 96호, 2015년 봄호에 「정치적인 것의 만회」라는 제목으로 수록했던 비평문을 일부 수정한 글이다. 분량이 다소 길지만 나누지 않고 게재한다.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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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면의 무력감으로부터

    불면의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의 연속이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사멸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를 맡았지만, 자신 있게 문장을 구사하기가 쉽지 않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공의 철탑 위에서 위태로운 생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삶과 죽음의 벼랑 앞에서조차 비인간적인 실정법을 적용하고 있는 자본의 냉정함 앞에서, 우리는 그저 처절한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

    불면의 무력감을 발병시키는 또 다른 이유는,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 구조가 도저히 역전할 수 없는 게임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정교한 통치술에 대항하는 비평의 응전은 그래서 ‘질 수밖에 없는 시합’(1)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등판하여야 하는 비평가란, ‘승리투수’가 아니라 ‘패전처리 투수’의 임무―자본의 질서를 전복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를 부여받았는지도 모른다.

    칼 마르크스가 일찍이 지적한 바와 같이, 노동자는 생산양식을 구축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자본이 없다. 그래서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다. 자본가에게 노동자의 노동력이란 강제성을 부과하여 재생산해야 하는 생산원료에 불과하다. 노동계급은 스스로 ‘숙련공’이 되는 방식으로 자본의 경영 시스템을 거스르기도 했지만, 오히려 자본가는 숙련공의 지위를 해체하고 노동 공간과 기술을 평준화하는 방식을 통해 이를 봉쇄하였다.(2) 즉, 근대 이후의 임금노동자는 노동의 잉여가치를 약탈하는 자본(주의)의 전횡을 전복할 수 있는 생산양식을 구축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격파’하거나 ‘탈취’하지도 못하였다. 물론,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과 같이, 생산양식을 공동 소유하는 대안적인 생산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계급의 저항’을 뚫고 진격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전환)’을 되돌리거나 꺾을 수 있는 새로운 생산양식에 대한 발명이나 혁신은 아니다.

    이와 같이, 노동자 집단은 자본의 생산양식, 혹은 그것에서 추출되는 생산물과 생산력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삶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생산 공정의 기계화와 자동화를 통해 ‘노동의 시간’을 줄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노동 시간의 증가와 감소가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 실질적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초기 산업자본주의의 역사적 증례에서도 이미 확인한 바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무엇일까? 힘겨운 노동의 과정 속에서 가끔 누릴 수 있는 노동현장 내의 ‘복지(여가)’를 추구하는 것일까,(3) 혹 그렇지 않다면 노동자의 계급적 신분을 일시에 탈바꿈할 수 있는 ‘대박의 꿈(도박―로또)’일까?(4)

    해답은 그 어느 쪽에도 있지 않다. 노동계급의 실리주의가 대안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히려 묵시록적 계시와 같이, 현 단계의 자본주의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절멸시키는 ‘혁명적 계급투쟁’에서 모색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도래할 파국’만이 자본의 생산양식을 탈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까? 이와 같은 물음은 노동계급의 연대와 투쟁의 가능성을 되묻는 데서 다시 시작된다.

    사라진 연대: 분할/분열의 노동 지형학

    한국 노동계급의 운동성이 정치적 역량과 매개되면서 가파르게 상승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동구권의 몰락 이후 노동운동이 점차 패퇴의 길로 기울어져 가는 양상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개별 노동운동가들의 실천 강도나 현실 변혁 의지가 쇠퇴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의 노동운동가들이 보여주는 ‘결연한 의지’는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허면, 노동운동의 패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노동계급의 ‘연대’가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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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의 모습(사진=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물론, 노동계급이 ‘거대한 골리앗’의 악력(연대)을 갖고 자본/국가의 컨베이어벨트를 움켜쥐던 시기가 있었다. 1987년의 ‘노동 봉기’(총파업)가 그것이다.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이 급변하였던 탓도 있지만, 1970년대 후반 이후 줄곧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성장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직장 내 노동자의 ‘정체성’과 ‘연대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지식인 친구’를 갈망하던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계급의 연대와 투쟁(사)에서 큰 분기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계급의 내부 결속을 견고하게 한 것은 물론, 노동자의 외부 연대 역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해근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과정을 서술하면서, 전태일의 ‘순교’(희생)는 “한국 노동계급 형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여러 의미에서 전태일의 희생은 한국 노동계급 형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 그들의 가슴속에 저항과 반항의 정신을 심어주었고, 그때까지 집단적인 목표를 위해 노동자들을 고취하고 동원할 수 있는 성스러운 상징과 존경할 만한 전통이 없었던 한국의 노동계급에 강력한 상징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또한 급속한 수출주도형 산업화과정이 만들어낸 노동문제가 산업영역에 감추어진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폭발적인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산업노동자들이 사회적 갈등과 사회변혁의 핵심 세력으로서 역사의 장에 들어선 것이다.(5)

    ‘프롤레타리아’(6)로 명명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공세란 ‘계급의식’과 ‘정치투쟁’, 그리고 노동계급의 ‘연대’와 정치세력과의 ‘결속’(7)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산업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는 노동계급이 “사회 변혁”의 핵심 세력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1980년대는 ‘노동의 대공세’를 가능하게 했던 혁명의 시기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소비주의와 외환위기가 심화되면서 노동시장은 양극화되었다. 물론 자본가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고통의 현상학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노동 유연화’라는 ‘표어’(지그문트 바우만)를 통해 사용 가능한 경영 전략(노동의 통치술)의 발명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분할과 분열 양상은 전지구적인 현상으로 도래하였다. 이른 시기에 ‘기로에 선 노동계급’을 예고했던 구해근의 약사(略史)에서 확인할 수 있듯,(8) 한국의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는 노동계급의 “내적 분화”가 다양한 방식과 층위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후, 노동계급은 급격한 “분해”의 과정에 겪는다. 대기업 노동자와 소기업 노동자, 노동의 내부와 외부,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의 분할 양상이 그것이다. 자본/국가는 합법적인 장치(법률과 제도)를 통해 노동계급을 분할하고 분해(分解)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노사정위원회’의 ‘비정규직법’이다.

    이제 노동계급은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과 범주로 묶일 수 없게 되었다. 자본/국가의 공모 관계가 획책하는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자 내부를 ‘분열’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내/외부 역시 분할한다. 이 결과, 노동의 외부는 끊임없이 타자화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주민과 내국인, 고졸과 대졸, 여성과 남성, 육체노동과 사무노동, 본사직원과 파견직원 등, ‘노동’은 지역과 국경의 경계를 넘어 무한히 이동한다.

    심각한 것은, 노동계급의 내적 분열이 노동자의 계급적 동질성을 붕괴시키며 노동계급의 조직적 역량을 와해시킨다는 점이다. 즉, 노동계급의 정체성과 연대가 파기되는 것.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날의 노동계급은 연대에 필요한 신체와 영혼을 잃어버린 “탈영토화된 계급”(9)이다. 개인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정규의 직’을 걸고 경쟁해야 하는 노동자와 예비노동자는 위태로운 삶의 벼랑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산업노동자든, 인지노동자든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정규직은 늘 ‘고용’의 불안정성에 시달리며, 비정규직은 언제나 ‘해고’의 공포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또 자본/국가는 이와 같은 ‘경쟁 체제’를 사적 능력주의로 탈바꿈한다.(10) 이는 개인의 능력이 ‘취업’과 ‘고용’을 결정하는 가장 큰 조건이자 변수라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하지만 스펙과 능력만으로 실업과 고용의 불안정성이 극복되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에 기반한 ‘능력주의’는 국가/자본이 구축한 ‘허위적인 노동윤리’와 다르지 않다. 서구의 노동윤리가 노동자들의 몸과 영혼을 통제하고 착취하는 종교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직장에서 엄수해야 하는 노동의 도덕률이야말로 노동자를 구속하고 자본/국가의 영토 속에 포섭하는 효율적인 기제이다.

    이와 같이 정규/비정규의 분할은 노동의 유연화로 표상되는 경영 전략인 것만이 아니라, 정규 바깥의 공간 속에 ‘비정규’를 배치하는 ‘배제’와 ‘관리’의 통치술이기도 하다.(11) 이것은 포드주의나 케인스주의, 혹은 테일러주의와 같은 경영 시스템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감시/통제 시스템이다. 바우만은 이를 두 가지 층위에서 설명하고 있다. 자본가는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소모시킨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파놉티콘 훈련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노동자를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으며, 또 노동계급의 연대까지 와해시킬 수 있다. 노동계급의 정체성은 “상호 의사소통과 조화와 통합”(연대)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그래서 노동자의 정체성을 소모하고 소거할 경우, 노동계급의 “집합”적 “수행”(12)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 결과, 노동자의 계급의식은 퇴조하고, 노동의 ‘연대’는 불가능한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계급의 안과 밖: ‘프롤레타리아’와 ‘프레카리아트’

    초국가적 차원에서 노동계급의 분할/분열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과거와 같은 노동계급의 연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13) 여기에서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의 한 대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르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은 “자본의 권력과 정대칭의 관계에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화는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노동자들의 독자적 능력이 파괴될 때만 완성된다”고 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계급은 독자적 능력으로 자본과 싸워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사회적 ‘노동’, ‘생산’을 개인들로부터 분리된 외재하는 실체로서 거의 신비화하여 경배하는 일에 계속 사로잡혀 있었다”(14)는 문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노동계급, 혹은 노동자의 집합이라 명명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의 개별적 능력(독자성)을 강조하거나 극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각각을 매개하고 묶는 ‘단결 효과’ 속에서 강력한 정치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의 능력은 ‘프롤레타리아’의 단결력(연대)을 상실하지 않을 때 더욱 강화된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노동계급의 분할/분열은 초국가적이면서도 프랙탈하게 진행되고 있다.(15) 자본주의는 “그 자체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관련해서만 기능하는 생산력에 따라 이해관계, 능력, 자격조건을 결정하는 노동계급(넓게 말하면 임금근로자)”(16)만을 선호한다. 그러나 자본이 원하는 ‘자격조건’을 갖추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며―개인이 능력과 성과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정이다―, 또 힘겹게 그 자격을 취득한다고 하더라도 영구적인 ‘고용’과 ‘성공’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본에 의해 고용된 노동자, 혹은 프롤레타리아는 연대와 투쟁이 아니라, 생존의 경쟁 구도 속에 ‘자기 스펙’을 확대하고 포장하는 선택지(각자도생)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자유 경쟁’은 개인의 노동윤리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자본/국가의 포섭 장치 속에서 공회전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불안정한 현 위치를 표시해주는 얼룩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노력’과 ‘성장’이 우리 삶의 ‘고용 불안’과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결국 환상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프롤레타리아’라는 절대적인 노동계급 범주는 무너진 지 오래이다. 통상 프롤레타리아는 ‘노동하고 있는 계급(working class)’과 동일시되었지만, 이제는 ‘프롤레타리아=노동계급’이라는 등식조차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정규고용 노동자와 비정규 노동자, 그리고 실업자로 분할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노동윤리나 가치와 무관하게 프롤레타리아는 정체성의 혼란과 계급적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를 완성된 ‘계급’이 아니라, ‘비-계급’적이거나 ‘형성 중인 계급’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기에서 나온다.(17) 아예, ‘노동자계급’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는 존재, 즉 ‘고용/실업’이라는 기준과 렌즈로는 포착되지 않는 불안정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프롤레타리아가 본래 지니고 있는 불안정성이 ‘노동’의 공간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 때, 그들은 ‘노동할 수 없는 장소’나 ‘일시적인 노동을 이어가는 장소’로 추방된다. 즉, 노동계급의 외부로 배제되어 노동과 비노동의 경계를 배회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안정한 ‘비-계급’적 존재를 ‘프롤레타리아’와 구분하여 ‘프레카리아트’라고 부른다. 조정환은 역저 인지자본주의에서 이와 같은 흐름을 깔끔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는 후기산업사회의 계급 재구성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착취할 수 있는 불불의 노동시간을 축소시킬 것임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한다. 정규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임시적으로만 고용되는 비정규직 노동자 혹은 실업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발전된 자본주의일수록 이 경향은 뚜렷하다. (…) 노동하고 있는 계급인 working class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이상 동일시될 수 없게 된다. 실업자는 순환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라, 구조의 효과로 인해 점점 확장하는 존재로 된다. (…) 그래서 대개 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자본에 저항하는 투쟁보다는, 한편으로는 자본의 정리해고 위협으로부터, 다른 한편에서는 실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압박으로부터 자신의 입지를 지키려는 실리적 의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18)

    프롤레타리아와 프레카리아트, 즉 노동계급과 비계급의 상대적 격차는 더욱 커진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획은 국지적인 측면이나 순환론적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문제로 확장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상황과 현실은 외부자와 이방인에 대한 관심을 촉발한다. 노동계급의 공간과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자. 다시 말해, ‘프레카리아트’의 취약성이 가시화되는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는 노동자(계급)로 정식 임관하지 못하거나, 임시적으로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취약한 존재이자, 불안정한 존재이다.

    이와 같은 존재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한데, 조정환은 이들을 “상 빠삐에(sans papier, 신분증 없는 사람들)”라고 부른다. 그는 ‘상 빠삐에’나 ‘프레카리아트’가 “경제적 시민권”이 “박탈”된 불안정한 존재라고 정의하며, 그 “불안정성은 고용 차원을 넘어 생활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상 빠삐에’나 ‘프레카리아트’는 ‘쓰레기가 되는 삶’(바우만)에 놓인 잉여 존재나, 포함하며 배제되는 ‘호모사케르’(아감벤)와 다르지 않다.(19)

    헌데, 노동조합이나 노동정당은 무엇을 하고 있나? ‘프롤레타리아’, 혹은 ‘프레카리아트’에 가해지는 자본/국가의 착취와 폭력을 대의/방어하는 것이 노동조합이나 노동정당이 아닌가? 왜 이들은 해방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노동’과 ‘정치’의 동지애적 연대와 단결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노동의 유연화 정책’에 의해 심각하게 분열/분할되었으며, 또 동시대의 노동운동은 시민과 대중의 동반지지 효과를 창발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즉, 노동운동만으로는 더 이상 삶의 혁명을 추동하는 봉기의 자원이나 ‘사건’을 구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통적인 맥락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기대가 한풀 꺾인 지금, “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자본에 저항하는 투쟁보다는, 한편으로 자본의 정리해고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는 실리적 논리에 쉽게 투항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규직 노동조합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과 폐지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르

    앙드레 고르와 그의 책

    정치적인 것의 탈환: ‘노동의 종언’에서 ‘노동의 정치’로

    그렇다면,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저 유명한 결별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노동계급의 삶이 더 이상 회복하기 힘든 상태에 놓여있음을 자조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후기산업사회의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계급의 지위와 공간을 배타적 경계수역으로 설정한다. 노동운동은 ‘정치적인 것’의 급진성을 사유/실천하기보다는, 현실적인 ‘실리(實利)’를 확보하는 이익단체로 전화되는 경향이 잦아졌다. 물론, 역으로 노동자 각각의 ‘자율성’(20)과 활력을 감퇴시키는 교조주의적 주장이 강화되기도 한다.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통상적 개념과 상식으로는 새로운 삶을 위한 혁명적 노선(탈주선)을 생성할 수 없다. 그래서 앙드레 고르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사명이 아니라, 오히려 프레카리아트(‘프롤레테르들’)의 계급적 사명에 더 주목하고, 또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놀랍고도 불편한 선언은, 노동자의 자율성을 창발하지 못하는 교조적인 ‘노동운동’과의 결별인 동시에, 언제나 유보적이고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적 혁명 담론에 대한 거절이기도 하다. 물론, 자본/국가의 착취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잉여가치를 강제하는 생산 시스템 자체를 격파하여야 한다. 하지만 고르는 후기산업사회의 노동 분할/분열 양상이 지속되는 한 타율적 노동을 완전하게 폐기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노동의 자율적 섹터를 확장하는 실천 방안을 지속적으로 모색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타율적인 노동의 도구와 시간을 줄이는 것이 그 구체적인 방편인데,(21) 이것은 ‘함께 노동-함’으로써 타율적인 노동의 시간을 축소하는 방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타율적 노동을 극복하고자 하는 앙드레 고르와 수동적 혁명을 넘어서고자 하는 조정환의 기획이 이 지점에서 조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의 시간을 나눈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이는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시간제 근로(제)’나 ‘인턴제도’와 같은 속악한 정책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의 향기’(김병철)(22)를 회복하는 일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식의 제안과 방향 제시만으로는 곤란하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이른 시기 ‘노동의 종말’을 선언하고, 도래할 ‘실업 위기’의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일자리를 잃거나 일자리를 찾기가 힘든 많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기술의 확산 개념이란 어떠한 위안도 주지 못한다. (…) 전세계 노동력의 죽음은 돈에 눈먼 고용주와 무관심한 정부의 손에 의해 매일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수백만의 노동자에 의해 내부화되고 있다. 그들은 해고 통지서를 기다리거나 깎인 보수에 시간제로 일해야 하며 복지수당을 받아야 하게끔 밀려나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새로운 모욕과 함께 그들의 신뢰와 자존은 날아가버린다. 그들은 첨단의 새로운 국제적 상업 및 무역 세계에서 소모품화되고 관련이 없어지고 마침내 사라져 버릴 것이다. (…) 정부는 시장 부문에서 일자리를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직면할 것이다. 하나는 범죄 계급의 증가에 대처한 경찰 증원과 감옥의 증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3부문의 일자리 창출을 지원하는 것이다. (23)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방대한 통계자료의 분석을 바탕으로 ‘프레카리아트’(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으나)의 도래를 예고하였다. 여기에서 ‘종말’의 대상이 되는 ‘노동’은 ‘일을 하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 임금노동으로서의 ‘노동’과 ‘노동의 자리(job)’를 의미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그것은 ‘기술 혁신’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밖에 없는 ‘노동’과 ‘노동 공간’을 의미한다.(24) 특히, 리프킨의 ‘기술혁신’과 ‘노동’의 관계는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은 곧 “해고 통지서를 기다리거나 깎인 보수에 시간제로 일해야 하며 복지수당을 받아야 하게끔 밀려”날 것이라는 예지는 묵시록에 가까운 것이다.

    리프킨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과 제3부문(봉사활동)의 일자리 창출을 강조한다. ‘봉사 활동’과 같은 “제3부문”에서 “일자리를 창출”하여 서비스산업 이후의 실업문제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낙관론은 중대한 비판에 직면한다.

    조지 카펜치스는 “자본주의적 역사를 통틀어서 살펴보더라도 최후의 서비스 노동자와 더불어 막을 내리는 단선적 발전 경로만 존재한다는 주장을 입증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하면서, 리프킨의 도식적인 “미래투사”(25)를 비판한다. 그는 두 가지 측면에서 리프킨이 마르크스 자본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잘못 전유했다고 말한다. 첫째,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노동조건 개선, 강제된 노동을 단호히 거부하는 삶 형태를 지향하는 노동자 투쟁”, 다시 말해 계급투쟁의 이유와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기술변동은 노동자 못지않게 자본가에게도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리프킨은 노동계급의 투쟁에 의해 ‘노동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오히려 계급투쟁의 가능성을 비현실적 대안을 통해 상쇄시키고 있다. 즉, ‘노동의 종말’은 기실 ‘노동의 정치’에 종언을 고하는 ‘탈정치적 예언록’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은 ‘종말’이 아니라, 혹시 ‘극복’의 대상은 아닐까? 이 시대의 ‘경제 위기’는 비정상적 공황 상태에 놓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위기, 혹은 이 경제적 어려움 역시도 ‘힘을 모아’ 잘 넘어서고 나면, 다시 정상적인 자본의 흐름과 노동의 질서가 복원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게 투표한 이들은 이와 같은 자본순환론의 흐름을 내면화하고 신뢰하였던 듯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본/국가의 ‘축적/착취 시스템’은 메시아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적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순환론적 경제 흐름을 통해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순환론의 바탕을 구성하는 것은 자본/국가의 통치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26)

    우리는 국가자본주의가 공회전시키고 있는 포섭 장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국’의 뒤안길을 열망하며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기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임박한 파국-론’은 어쩌면 환상에 가까운 희망일 수 있다.(27) 왜냐하면 자본/국가는 스스로를 괴멸하는 ‘자본의 종말’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의 낡은 관념형태, 운동형태, 조직형태의 환골탈태 없이는”(28) 자본/국가의 구조적 모순, 지배 질서의 체계와 규율은 파기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가 겨냥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불안정한 삶/노동을 강제하는 자본/국가의 ‘지배 질서’이다.

    우선, 노동의 불안정성 문제를 경제적 층위나 ‘고용/노동’의 문제로만 국한하는 시각에서 탈피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국가의 ‘환골탈태’는 ‘정치적인 것’의 회복을 통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노동의 종말’이 탈취한 ‘정치’의 자리를 탈환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을 분리하여 상대적 자율성의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자본/국가의 기획은 대단히 탈정치적이다. 자본/국가는 ‘부’를 위한 법률적 평등체계를 구축하며, ‘부’에서 소외된 이들의 불평등을 은폐한다. 하지만 계급투쟁을 이끌어야 하는 노동계급이 분열되고, 거대한 혁명의 담론이 붕괴된 후기산업사회에서 ‘어떤 정치’를 꿈꿀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해, 유럽의 현대 정치철학은 작은 이정표를 제시한다.

    해방의 정치: ‘셈 바깥’의 존재를 위하여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역사’와 ‘정치’의 종언 이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정치’와 ‘치안’을 구분한다. 자본/국가의 지배 질서가 구축한 통치의 기술이 ‘치안’의 과정이라면, 치안의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반동일시와 재분배 과정이 ‘정치’이다. 그러니 ‘정치적인 것’은 지배적인 문화와 정체성이 조화롭게 통합하는 장소가 아니라, 치안과 정치가 마주치는 충돌의 장이다. 정치는 ‘정치적인 것’을 통해 “익명의 이름”, 혹은 내부의 논리 속에 덧셈되지 못하는 ‘셈 바깥의 존재’를 감지하고 감각하는 실천적 구성 행위이다. ‘정치의 종언’은 “정치적인 것을 탈정치화하는 궁극의 형태”이며, 그것은 “그 기원에서부터 정치술의 역설적 원리”(29)를 내장하고 있다. 해서, “셈 바깥을 가리키는 이름, 내쫓긴 자(outcast)”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지배 질서의 분배 체계를 혁신하는 ‘정치’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나는 노동자 해방에 대해 작업하면서 그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노동자 해방은 탈정체화 작업을 통해서만, 지배가 벼려놓은 노동자들의 행하고, 보고, 살고, 느끼고, 말하는 방식들에서 벗어나는 틈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만 하나의 집단적 주체를 벼릴 수 있었다. 노동자 해방은 거꾸로 지배자들이 자기들만의 특권으로 따로 정해둔 말하고 행위하는 방식 속에 (노동자들이) 위반하며 침입함으로써 짜였다. 이 틈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정치를 탐사하려고 했다. 그 틈이 해소되는 곳에서 나는 정치를 상실하는 위험을 보았다. (…) 내가 의문시하고 싶었던 것은 ‘사회’ 운동을 어떤 ‘사회’ 집단의 표현으로 여기는 자기―명증성의 기만적 외양이다.(30)

    하지만, 이제 노동계급의 ‘연대’를 통한 계급투쟁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작금의 계급투쟁은 자본/국가가 부여해 놓은 사회적 정체성을 집합시키는 방식(연대)을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랑시에르는 ‘프롤레타리아’도 ‘셈 바깥을 가리키는 이름’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혹은 노동계급이라는 명명 방식이 지배 질서의 상징 질서를 내면화하고, 노동계급 내부의 모순과 불화 가능성을 탁화하는 것이라면, 이는 “정치를 상실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해방의 정치’는 노동계급의 분할과 분열을 해소하는 정체성의 재구축이 아니라, 자본/국가가 부여하는 사회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탈정체화”하고자 하는 감각의 재분배 과정이다. 즉, 자본/국가가 기입하는 ‘노동(자) 계급’의 아이덴티티를 기각하고, 새로운 삶의 내용과 방법을 고안하려는 실천 행위만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운동(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다른 방식의 정치는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까? 지금이야말로, 이에 대한 현실성 있는 물음을 조형해야 할 때이다.

    <각주>

    1. 지그문트 바우만은 노동의 유연성(flexibility) 문제를 이기기 힘든 게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표어”는 “고용과 해고 게임을 상징”한다면서, “이 게임에는 규칙이란 게 없지만,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일방적으로 규칙을 바꿀 권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경기가 불리해지면, 언제든지 게임의 규칙까지 바꿀 수 있는 자본/권력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지그문트 바우만, 이수영 옮김, 새로운 빈곤: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푸어, 천지인, 2010, 54쪽.
    2. 이미 포드주의나 테일러주의, 또 케인스주의와 같은 역사적 증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는 숙련 노동자의 희소가치를 일반화시키는 방식이거나, 또 노동자의 몸을 통제하는 유인 정책일 뿐이다. 종국에 이는 노동자의 무한 대체 가능성을 예고하며, 고용과 실업의 공포를 확장한다. 또 노동 현장의 기계화나 자동화는 노동 시간의 증감/감소와도 무관하지 않은데, 이는 기계화를 통한 노동 시간의 감소가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 것과는 무관함을 의미한다. 그러니 박근혜정부의 ‘시간제 근로(제)’는 현실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고용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대안적 프로그램이 될 수 없다.
    3. 알튀세주의에 입각한 문화이론가들은 ‘여가’의 특별한 형태인 ‘여름휴가’에 주목한다. 여름휴가는 노동자를 일상으로부터 해방시켜 일시적인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착취와 억압을 잘 견뎌나가도록 만드는 장치가 ‘휴가’이다.
    4. 노명우는 도박이라는 행위는 “노동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노동의 법칙을 정지시키는 마법의 세계”라고 말한다. 하지만 도박은 자본의 법칙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도박을 통한 ‘대박의 꿈’은 종국에 자본의 법칙을 추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확장된 카지노”라고 말한다. 노명우, 프르테스탄트 윤리와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이유를 묻다, 사계절, 2008, 226-229쪽.
    5. 구해근, 신광영 옮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2002, 112쪽.
    6. 노동계급의 연대가 불가능해진 상황을 ‘프롤레타리아’의 퇴장과 ‘프레카리아트’의 등장으로 해석한 연구로는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과 이광일의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 프레카리아트의 형성과 ‘해방의 정치’」를 참조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장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7. 베라르디는 ‘결속’과 ‘접속’을 구분한다. 결속이 특이성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불규칙한 형태들의 만남과 융합”으로서의 ‘타자―되기’라면, 접속은 각 요소들이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 기능성”으로만 상호작용하는 재설정 행위이다. 베라르디 식으로 말하자면, 노동계급의 연대는 ‘결속’에서 ‘접속’으로 변이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강서진 옮김, 미래 이후, 갈무리, 2013, 68쪽.
    8. 구해근, 앞의 책, 289-291쪽을 참조할 것.
    9.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정유리 옮김,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난장, 2013, 238-242쪽.
    10.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 빈곤(working poor)’에 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문제는 개인의 근면과 게으름이 아니다. 강신준은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에서, 대중독자들을 위해 윌리엄 호가스의 「근면과 게으름」(1747) 연작에 대해 상세하게 논평한다. 그는 윌리엄 호가스가 “게으른 자는 일터에서 쫓겨나 범죄자가 되고, 근면한 자는 사장의 딸과 결혼해 런던 시장이 된다”며, “이 그림”처럼 “근면하면 성공해서 잘 살 수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현실도 정말 그러한가?”라고 묻는다. 강신준,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사계절, 2012, 30-31쪽 참조.
    11.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구는 만원이다’는 표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기술적 진보”나 “경제적 진보”는 “한때 삶을 영위하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던 것을 쓸모없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리하여 경작되지 않고 버려지는 불모지의 크기를 넓히고 있다”고 말하였다. 즉, 경제적 진보를 위한 자본/국가의 질서 구축에서 어긋나는 존재는 모두 ‘쓰레기’와 같이 잉여의 처분을 받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새물결, 2008, 21-22쪽.
    12. 이는 노동을 “윤리적 기준”에서 “소비의 미학”으로 전회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니 ‘생산’에서 ‘소비’로의 대전환에 대한 대안적 사유 역시 새롭게 가다듬어질 필요성이 있겠다. 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59-63쪽 참조.
    13. 이와 같은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예를 조성웅의 「선유도 가는 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인은 “토요일 오후/ 이제 노동운동도 주말에는 집회조차 잘 조직되지 않고/ 뭘 해도 되는 일 없는 나날들입디다”라며, 소비주의에 노출되는 주말에는 노동 투쟁과 집회가 제대로 조직되지 못함을 고백하고 있다. 물론 그의 시는 패배주의적이 아니다. 시인은 “지더라도 무릎 꿇지 않을” 것이며, 그 이유는 “우리 비록 강철은 아니어도 동지가 있어 다 괜찮”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동지’에 대한 연대감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전태일 열사 탄생 60주년 기념시집인 완전에 가까운 결단은 각별하다. 이 시집의 작품평은 후고를 기약한다. 백무산·조정환·맹문제 엮음, 완전에 가까운 결단, 갈무리, 2009.
    14. 앙드레 고르는 노동자의 단결 효과를 훼손하는 것이 노동자의 독자성이라고 설명한다. 노동계급에서 홀로 벗어나고자 하는 노동자의 개별적 행보는 종국에 프롤레타리아의 능력을 감퇴시키는 “프티부르주아의 개인주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 이현웅 옮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생각의나무, 2011, 41-49쪽.
    15. 베라르디는 미래 이후와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에서, 금융자본주의가 ‘프랙탈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 역시 탈영토화, 프랙탈화되었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노동자는 연대를 위한 신체(사회체와 구성체)를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즉, 연대의 불가능성이란 노동자의 의지가 아니라 결속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신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16. 앙드레 고르, 앞의 책, 9쪽.
    17. 이광일,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 프레카리아트의 형성과 ‘해방의 정치’」, 마르크스주의연구 10권 3호, 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 2103, 116-125쪽.
    18. 조정환, 인지자본주의, 갈무리, 2011, 304-305쪽.
    19. 조정환은 “권위주의적 산업자본주의 하의 노동과 삶이 ‘고역의 삶’이었다면 신자유주의적 인지자본주의 하의 노동과 삶은 ‘벌거벗은 삶’으로 나타난다”(조정환, 앞의 책, 333쪽)고 하였다. 그는 산업노동에서 인지노동(후기산업노동)의 흐름을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의 관계 속에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만, 현대 사회가 인지노동의 자장 속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산업노동이 축소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프레카리아트라고 부르는 ‘배제된 이들’의 노동 현장/공간은 여전히 산업노동의 그것과 근접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 베라르디에 따르면, “자율성”은 “사회의 시간이 자본주의적 시간성에서 독립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노동거부’는 노동에 부과되는 강제성과 규율로부터의 탈주선을 생성하는 행위이다. 물론 자본/국가는 이를 전유하여 노동의 유연화와 프랙탈화라는 역전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137-151쪽을 참조할 것.
    21. 이것은 노동의 분할 양상과 무관하지 않다. “노동의 분할로 불가피하게 노동자들은 비인격적인 존재가 된다. 노동의 분할로 노동은 타율적 활동이 되고, 자주관리는 변화의 결과물과 상부에서 내려오는 결정들을 자주관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 앞의 책, 162-163쪽 참조.
    22. 시간의 향기, 즉 여가의 회복은 근대 ‘노동윤리’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다. 노동자 자신에게 엄격하게 적용되는 ‘노동윤리’는 근대 경영론의 발명품이며, 이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엄정한 시스템으로 기능하였다. 이에 대한 대안적인 실천(론)은 김병철의 피로사회와 시간의 향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강제하는 자유”, 즉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착취로 치닫는다”라고 하였다. 물론 그는 ‘여가’와 ‘노동시간’의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시간의 향기’를 회복하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프로테스탄트 식의 ‘노동윤리’의 자본 친화적 기능을 어긋내는 실천 행위이다. 왜냐하면 ‘시간의 향기’란 자본의 질서에 의해 구축되어 있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적극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지구적 빈곤과 고용 취약성에 노출되어 있는 21세기의 임금노동자는 ‘시간의 향기’(한가로움)를 누릴 수 없다. 일상의 굴레 속에서 서로를 감시하며 경쟁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경쟁 논리’ 앞에서 ‘자기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손쉽게 선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산양식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김병철,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와 시간의 향기(문학과지성사, 2013)를 참조할 것.
    23. 제러미 리프킨, 이영호 옮김, 노동의 종말, 민음사, 1996, 225-326쪽.
    24. 베라르디는 이를 “노동계급의 정치적 사멸”이라고 표현한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사멸은 정치세력들 간의 어떠한 투쟁의 결과, 또는 사회적 배제의 효과가 아니었으며, 현재에도 그러하다. 노동자들은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적 행위는, 전반적인 사회적 효과들을 실제로 낳고 있는 지배 과정들과 관련하여,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서창현 옮김, 노동하는 영혼, 갈무리, 2012, 276쪽.
    25. 조지 카펜치스, 김의연 옮김, 「노동의 종말인가, 노예제의 부활인가? 리프킨과 네그리 비판」, 탈정치의 정치학, 갈무리, 2014, 188-189쪽 참조.
    26. 워너 본펠드, 김의연 옮김, 「자본주의국가: 환상과 비판」, 탈정치의 정치학, 갈무리, 2014, 316쪽.
    27. 조지 카치펜스는 자본/국가의 ‘임박한 파국’은 판타지라고 말한다. 자본/국가는 스스로 종말을 고하지 않으며, 또 “속임수”나 “저주”만으로는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앞의 글, 208-209쪽 참조.
    28. 조정환은 “오늘날의 노동이 이미 고용/비고용의 틀 너머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비고용의 사람들을 고용관계 속으로 진입시킬 것인가라는 문제가 허구적 문제임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안전하게 보장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며, 이를 위해, 오늘날 전 지구적 수준에서 사회화된 노동에 기초하여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적 부를 어떻게 공통적으로 분배할 것이며 부의 공통적 생산을 어떻게 촉진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며, 이를 위해 현대 유럽 정치철학의 다양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의 만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조정환, 「인지자본주의에서 정치의 재구성」, 앞의 책, 315-353쪽.
    29.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도서출판길, 2008, 14쪽.
    30.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27-148쪽.
    필자소개
    문학평론가,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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