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중간고사 무사히 통과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⑩] 시험
        2017년 02월 24일 04: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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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9 ‘놀이와 읽기’ 링크

    4월 30일(화)

    새벽 1시 못 미쳐 귀가했다. 딸애는 침대 안쪽에서 영어책을 든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불렀더니 으~응, 눈을 반쯤 떠 힘겹게 대답하곤 바로 감았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고 편하게 누워 자.”

    손에서 책을 빼고선 눕게 했다. 딸은 그대로 엎드렸다. 똑바로 눕힌 다음에 이불을 덮어 줬다. 완전히 잠들지 않고 있었다. 첫 중간고사라 긴장 상태인 듯싶었다. 시험공부를 많이 못 했단다. 영어듣기 시험 준비가 아직 안 끝났단다. 6시에 깨우면 되냐니까, 4시에 깨우라 했다.

    아침에 눈을 떠 급하게 시간을 보니, 6시였다. 숙취 탓에 알람을 듣지 못했다. 부리나케 일어나 깨우러 갔다. 다행히 거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아내가 깨운 듯했다. 나는 다시 누웠으나 깊게 잠들지 못했다. 비몽사몽이다가 7시 30분에 일어났다. 딸은 헤어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시험 망쳤다고 스트레스 받지 마라. 오늘 것 망치면, 내일 것부터 잘하면 되니까.”

    “알았어.”

    딸은 방으로 돌아가 영어 공부를 했다. 빈칸을 채워서 가야 한댔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엄마, 신발 어디 있어”

    아내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빠르게 바깥을 향해 외쳤다.

    “누리야! 문제 잘 읽고 잘 듣는 거 알지”

    “응, 걱정 마.”

    대답이 돌아왔다. 대문 여닫는 소리도 들렸다. 시험 첫날이었다.

    출근길에 카드로 60만 원을 긁었다. 이달 생계비를 100만 원밖에 구하지 못해 별 수 없었다. 집에 가져다 줘야 할 돈은 160만 원이었다. 네 식구, 그것도 고등학생이 있는 살림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인데도, 아내는 신통하게 꾸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카드 사용액이 한도인 500만 원에 육박했다. 앞으로는 긁을 돈이 없었다. 나는 매달 초 갚아야 하는 카드 대금을 최소한도인 10%만 갚고, 나머진 높은 이자를 물며 이월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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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2일. 첫 중간고사를 앞둔 딸아이는 내 사진에 자신의 결의를 담아 보냈다

    5월 1일(수)

    여유롭게 자고 정오에 일어났다. 씻고 밥 먹고 청소하고, 딸이 공부할 수 있도록 안방을 정돈한 뒤에 서울역 광장으로 향했다. 124회 세계노동절이었다. 메이데이라고 불리는 5월 1일엔 세계 각국에서 기념 대회가 열렸다.

    기원은 1886년 5월 1일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미국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했다. 자본가 계급과 정부는 경찰을 앞세워 총질을 해댔고,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 지도자 8명은 재판에 회부돼 4명은 사형당하고 1명은 감옥에서 자결했다. 세계 노동자 조직은 그 투쟁과 죽음을 기리기 위해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결의했다. 첫 대회는 1890년 열렸다. 세계 노동자의 연대를 다지고, 해당 국가의 당면 사안을 결의하는 날이었다.

    한국의 올해 노동절대회는 서울역에 집결해서 먼저 행진을 하고, 서울시청광장에서 집회로 마무리됐다. 집에 돌아와 막걸리를 마시며 딸의 공부를 도왔다. 과학 공부를 하던 딸은 우주의 현상을 어려워했다.

    딸과 나는 참고서를 펼치고 우주의 현상을 함께 공부했다.

    딸과 나는 참고서를 펼치고 우주의 현상을 함께 공부했다.

    “아빠, 밀도가 높으면 분자가 많고 낮으면 원자가 많아진다는 것이 이해가 안 돼.”

    “밀도가 높으면 뭔가 많이 차 있다는 거지. 저 벽은 흙과 돌로 밀도가 꽉 차 있어서 햇볕도 뚫지 못하잖아. 저걸 생각하면서 들으면 될 것 같은데. 밀도가 높으면 자외선이 다 뚫지 못하니까 분자가 많지 않겠냐. 밀도가 낮으면 자외선이 사방으로 갈 거고, 자외선을 받은 분자가 원자로 바뀌는 거지. 물 분자가 산소와 수소 원자로 바뀌는 것처럼 말이야.”

    나름대로 설명하면서도 말이 되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딸이 ‘아하’ 했다. 이해하겠단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리 가든 저리 가든 로마만 가면 되지. 딸은 과학 시험 범위에서 자신이 외운 내용을 내게 설명하면서 복습했다. 가정은 내가 묻고 딸이 답하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자원의 효과적 활용과 관련된 예문이었다. 그러다 나는 술기운에 취해 잠에 빠졌다.

    5월 2일(목)

    고작 막걸리 1통에 세 시간이나 잤다. 깨어나니 자정이 조금 넘었다.

    00시 30분. 그때까지 공부하고 있던 딸이 자리에 누우며 한 시간 뒤에 깨워 달라 했다. 아예 자고 4시에 일어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딸은 한 시간 후를 고수했다. 내가 깨우기로 했다. 아내는 노동절 대회에 갔다가 용산의 진보정당 당원들과 한 잔 하고 알딸딸한 상태로 잠들었다. 나는 일지를 정리하다가, 이근원이 쓴 『아빠의 현대사』를 읽다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태우다가, 하면서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더 자게 하려고 반 시간을 더 기다렸다.

    02시 20분. 깨웠다. 딸은 일어날게 하면서도 눈을 뜨지 못했다. 눈부시다며 불 좀 꺼 달라 했다. 나는 형광등을 껐다. 한 시간 뒤에 다시 깨울까, 물으니 그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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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공부하던 딸은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02시 50분. 다시 깨웠다. 물도 마시게 했다. 딸은 거실 앉은책상에서 생물을 시작했다. 3시를 넘기자 졸린다며 앉은책상에 엎드렸다. 다시 재워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딸아이는 졸린다면서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딸아이를 일으켜 앉히고 어깨를 주물렀다. 등을 긁어 주고 뒷목도 눌러 줬다.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도 누르게 했다.

    그래도 졸리면 일어서서 공부하라 했다. 딸은 일어서서 읽다가 배고프다고 했다. 라면 끓여 줄까 물었다. 먹으면 졸린다며 안 된다 했다. 그러더니 초콜릿 먹으면 흥분돼서 잠이 오지 않는다며 먹었다. 물도 마셨다. 베란다 문을 열어 주니, 그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거기로 책상을 옮겨 줬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또 담배를 태웠다. 나오니까 춥다고 했다. 문 닫을까 물으니, 공기는 차가워야 한다면서 이불을 달라 했다. 가져다 걸쳐 주었다. 딸은 아빠, 나 이제 잠 완벽히 깼어, 라고 말했다. 03시 36분이었다.

    딸은 베란다 앞에서 공부를 했다

    04시 26분. 딸이 거실에 쪼그리고 누웠다. 생물은 다 했단다. 이제 기술ㆍ가정 외울 게 남았단다. 머리가 아프고 졸리다 했다. 30분만 자면 안 되냐고 해서, 그러라 했다.

    04시 55분. 곧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05시 00분. 깨웠다. 못 일어났다. 30분 더 재우기로 맘먹고, 놔뒀다.

    05시 28분. 깨웠다. 딸은 화장실에 들어가 씻었다. 나는 이번 시험이 끝나고서 효과적 공부 방법을 논의해야 되겠다 싶었다. 딸은 평상시 영어와 수학에 집중했다. 암기 과목은 시험 때 해도 충분하다는 근거였다. 그 방식을 재검토하자고 제안해 볼 생각이었다. 암기 과목을 미리 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했다.

    06시가 넘었다. 딸은 공부하고 있었다. 이젠 내가 졸렸다. 아내에게 아이 등교할 때 깨워 달라고 부탁했다.

    10시 00분. 일어나니 아무도 없었다. 아내가 나를 그냥 자게 놔둔 듯했다.

    11시 27분.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전화기가 진동했다. 두 과목 모두 90점 넘었단다. 생물은 되게 어려웠고, 가정은 쉽지 않았단다. 나는 딸에게 일단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잔 뒤에 일어나 공부하라고 했다. 알았다고 대답하는 딸의 목소리가 밝았다. 나름대로 잘 봤다 생각하니까 전화했겠지 싶었다.

    5월 3일(금)

    밤 9시 넘어서 사무실을 나섰다. 창신시장에서 매운 족발 8,000원짜리를 샀다. 1,200원짜리 막걸리도 1통 샀다. 시험 끝난 날이라 여유가 있었다. 딸은 컴퓨터에 붙어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할매는 염색을 마치고 치우는 중이었다. 족발을 먹자 했다. 할매는 생각이 없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딸에게 할매 따라가서 상추를 받아 오라 했다. 옥상에서 키우는 상추였다.

    안방에 신문지 깔고 그 위에 넓은 사각 플라스틱 쟁반을 놓고 족발과 상추에 막걸리와 우유를 펼쳤다. 먹기 좋도록 족발을 가위로 발라 접시에 담았다. 딸은 맛있다, 맵다, 연발하며 먹었다. 매운 기운을 삭이려 우유도 마셨다. 딸은 상추에 싸서 내 입에 두 번 넣어줬다. 졸깃하고 고소했다. 살을 다 바른 뒤에 나도 먹기 시작했다. 속은 그다지 맵지 않았는데, 머리와 얼굴에서 땀방울이 쏟아졌다. 맵다고 연발하는 딸은 되레 괜찮았다. 딸애는 내 땀을 식혀 준다며 딱딱한 종이로 바람을 부쳤다. 오순도순 먹으며 시험 얘기를 했다.

    “국어와 역사가 어려웠어. 다른 애들도 많이 틀렸어.”

    대학 수능 시험 과목은 국·영·수가 기본이고, 사회탐구에서 2과목을 선택하면 된다고 했다.

    “국어가 재미없어.”

    교사의 학습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학교까진 국어를 재밌어 하던 아이였다.

    “수학은 어려워도 재밌어지기 시작했어. 역사와 과학도 재밌어.”

    시험지를 가져오게 해서 틀렸다는 문제를 분석했다. 헷갈리는 문제가 있었고, 딸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도 있었다. 내가 보아준 건 국어, 과학, 역사였다. 영어와 수학은 능력 밖이었다. 나는 고1 때 영어를 포기했고 대신 독일어로 입시를 봤다. 그땐 영어 대신 독어나 일어 따위를 선택할 수 있었다.

    “시험 끝나고 유진이 엄마 일하는 가게에서 너무 잘 얻어먹었어. 유진이 엄마가 나랑 같이 오라고 했대. 정말 맛있었어.”

    딸은 흡족해했다. 딸은 친구들이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면서 이름들을 나열했다. 그러다 너스레 떨었다.

    “아빠, 난 머리가 좋은가 봐. 이렇게 공부 안 했는데 이런 성적 나오는 거 보면 머리가 좋은 거지.”

    “허허.”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속으론 안심했다. 아이가 성적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진 않겠구나.

    5월 12일(일)

    어제였다. 딸은 혜정이랑 지영 집에서 자기로 약속돼 있었다. 한데 취소됐고, 딸은 실망했다. 지영이 과외 때문에 안 된다 했단다. 혜정이랑 둘이라도 놀지 그랬냐니까, 혜정도 학원 땜에 어렵다 했단다. 땡 잡았다 싶었다. 산에 가기로 했다. 딸이 충분히 잤겠다 싶은 10시쯤 깨웠다. 간밤의 천둥과 빗소리에 잘못 잤다며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만의 동반산행인데 놓칠 순 없었다. 좀 더 자게 놔두다 11시에 억지로 깨웠다.

    정릉에 도착해 칼바위를 올랐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딸은 바람과 꽃이 좋다며 ‘쩔어’라는 표현을 썼다. 부정적 느낌의 용어로 알았는데, 애들 세계에선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딸은 칼바위 직전까진 힘들다며 자주 쉬었다. 산행이 뜸했던 영향이었다. 밋밋한 코스를 힘들어하는 특성도 가미된 듯했다. 칼바위 능선에선 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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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아이가 신나게 칼바위능선을 오르고 있다.

    “아빠, 정신이 돌아오고 기운이 나. 나는 긴장해야 정신이 바짝 들어. 안 그러면 졸리고 힘들어.”

    딸에게 주문했다.

    “산에선 절대로 객기 부리면 안 돼.”

    딸은 작전을 바꿔야겠다고 했다. 그동안 영어와 수학 위주로 공부했는데, 그날그날 암기과목을 복습하겠다고 했다. 요즈음 친구들과의 관계는 무난하다 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절친이던 하나랑 문자를 주고받은 얘기도 했다. 누군가 카톡에서 혹시 한수민 씨 아니냐고 물었단다. 누구시냐 되물었더니, 하나라 했다면서, 둘은 몹시 반가웠단다. 하나는 아빠가 하사관이라 해방촌 군인아파트에 살던 아이였다.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놀다 가곤 했다. 그러다 아빠가 전방으로 발령 나는 바람에 전학을 갔다. 딸애는 종종 하나를 그리워하곤 했다.

    5월 13일(월)

    회의를 마친 뒤에 저녁 겸 뒤풀이를 하던 중이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딸이었고, 낮은 목소리였다.

    “아빠, 쩌는 얘기 해 줄까”

    “어, 뭔데”

    “89.1이라고 했잖아. 근데 기가에서 서술형 문제 틀린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맞게 했어. 그래서 91. 35야. 반에서 2등인 것 같아.”

    점수가 예상보다 올라가니까 기뻐서 보고하는 듯싶었다.

    “근데 어디야? 집이야”

    “아니, 학교야. 야자하고 있어.”

    딸의 첫 중간고사가 끝났다. 무난한 첫 출발이었다. 딸아이와 가족이 스트레스 받지 않아서 무엇보다 좋았다. 이 상태로만 간다면 입시산행이 즐거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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