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이와 읽기를 중시하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⑨] 독서
        2017년 02월 17일 03:4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딸이 초등학생일 때였다. 아내와 나는 아꿈세란 모임을 만들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꿈꾸는 세상’의 준말로 이름은 내가 제안했다. 아내는 모임을 이끌었다. 아이들을 많이 놀게 하자는 취지였다. 10여 가족 아이들은 엄마 아빠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모였다.

    삼팔선 놀이라고도 부르는 이랑타기, 제기차기, 꼬리잡기, 비석치기, 오징어놀이, 여우놀이 따위의 전래놀이를 했다. 여름엔 물놀이를 했고 겨울엔 달집도 태웠다. 아이들은 깔깔대고 엉엉대며 시간 가는 줄 몰라 했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였던 나는 꼬마들의 대장을 자임하며 놀이를 이끌었다. 할매도 늘 같이했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꼬마들 놀이터였다. 할매는 손녀와 친구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먹을 걸 챙겼다. 노느라 정신 팔린 꼬마들이 적절한 시각에 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재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딸이 조금 더 크고 나선 밤에도 친구를 불러 쿵쾅, 깔깔, 도란도란, 새벽까지 어울리다 잠들곤 했다. 간혹 친구들 집에 가서도 그리했다. 우린 응원하고 뒷받침했다. 필요할 듯싶으면 안방이고 거실이고 다 내주었다. 우리는 놀이와 어울림을 중시했다. 아이에게 으뜸은 잘 먹고, 잘 싸고, 잘 크고, 잘 자는 것인데, 놀이와 어울림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는 판단이었다. 놀이와 어울림을 통해 얻는 재미가 삶의 동력이 된다는 판단이었다.

    인간 본질을 규정하는 개념 중 대표적인 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이란 뜻이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는 개념도 있다. 물건과 연장을 만드는 인간을 뜻한다. 놀이하는 인간이란 뜻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개념도 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정의한 개념이다. 유희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을 파악했다. 놀이라는 풍부한 상상 세계가 인류를 발전시켰다고 정의했다. 한국의 놀이운동가 편해문은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고 했다.

    아이들은 뛰어놀면서 신체가 튼튼해지고 면역력이 강해진다. 아이들은 놀이로 어울려 웃고 울고 화내고 달래며 정서도 풍부해진다. 아이들 놀이는 혼자만 재밌으면 지속될 수 없다. 모두가 재밌어야 한다. 아이들은 개인 욕심을 줄이고 상대방과 더불어 즐기는 방법을 익힌다. 배려하며 협동하고, 경쟁과 갈등을 조절하고, 패배를 극복하는 방법을 체득한다. 이보다 훌륭한 교육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아이들은 놀이 과정에서 궁합이 맞는 친구를 자연스레 찾는다. 이해득실 따지지 않는 평생의 벗은 대체로 어릴 적부터 함께 뛰어놀던 죽마고우다. 아이에게 놀이란 그런 것이다.

    아내에겐 책 욕심이 있었다. 딸아이가 말을 배울 무렵부터 책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자란 다음엔 수시로 용산도서관에 데리고 다녔다. 세상을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게 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린이 월간 잡지 『고래가 그랬어』도 구독했다. 『고래가 그랬어』는 교육운동가 김규항이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2003년 창간한 어린이 교양지였다. 아이들에게 어른의 생각을 심어 주려 하지 않고, 아이들이 아직 빼앗기지 않은 소중한 인간적 자질들을 재미와 즐거움 속에서 드러내도록 돕고자 창간되었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지, 동무와 어울려 놀고 이웃과 소통하며 연대하는 일은 왜 중요한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일은 왜 필요한지, 이야기 나누는 어린이 교양지를 표방했다. 『고래가 그랬어』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과 함께하는 마음이 교양이라 했다.

    책은 세상을 넓고 깊게 이해하는 통로이자 삶을 풍성하게 채우는 반려였다. 나 또한 동조했다. 아이 옆에서 책 읽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자연스럽게 책과 익숙해지라는 의미였다. 손잡고 서점에도 갔다. 어느 날은 딸아이 잠자리에서 『돈키호테』를 읽어 주다가 같이 낄낄대기도 했다. 딸아이 졸음이 오히려 더 깨 버렸다. 20장, 돈키호테가 물레방아 절굿공이 쿵쿵대는 소리에 밤새 떨다가 막상 그것을 보고 기절하는 장면에서였다. 피곤한 날엔 읽어 주다 먼저 졸기도 했다. 그러면 딸은 “에~ 에~” 보채며 나를 깨우곤 했다.

    한1

    초등학교 때 딸이 학교 숙제로 만든 독서신문

    다행히 딸은 책을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해 3월부터 12월 사이 79권의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학년 때엔 학년에서 가장 많이 읽기도 했다. 딸의 책 습관은 아직 변치 않았다. 작년 2월부터는 ‘종점수다방’에서 또래들과 독서 토론도 하고 있다. 수‘다방’으로 오해한 어느 노인이 커피 안 파느냐 물어보기도 했다는 종점‘수다’방은 용산 후암동에서 아내가 이끄는 풀뿌리단체다. 관련해서 아내가 수다방 카페에 올린 글이다.

    종점수다방 아이들의 세상 만나기

    청소년기에 접어든 딸이 이런 얘기를 했다.

    “나랑 정치 성향이 맞는 친구가 있어. 다른 아이들은 도통 말이 안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도 없고 개념도 없어. 그런데 그 친구는 나랑 잘 통해.”

    기특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은 아이의 생각을 이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종점수다방. 청소년 독서 토론이다. 마침 태어난 지 6~7개월 되어 보이는 아인이를 업고 종점수다방에 놀러온 박승희 선생님을 만났다. 박승희 선생님은 전에 논술 강사를 하시던 분으로 중학생 3학년 딸아이에게 책을 읽히고, 토론하는 방법을 익히게 하고 싶다는 나의 생각에 흔쾌히 동의하시고, 아이들을 모아 보라고 하셨다.

    딸의 친한 친구인 혜정이, 후암초 동창 현근이, 대성이 이렇게 4명이 시작했다. 한 달에 2권 이상의 책을 읽고 찬성과 반대를 나눠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견해 보였다. 책 읽기가 낯설었던 남자 아이들도 책을 읽어오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을 땐 나도 같이 펼쳐보았다. 암 투병 하시다 일찍 돌아가신 나의 엄마가 생각났다. 선생님도 일찍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는지 독서 토론 시간에 울먹였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면서 친구들 몇몇이 더 합류했다. 테이블이 부족할 정도로 꽉 찼다. 선생님이 팀을 갈라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에 딸은 몹시 섭섭해 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강정마을에 대한 영화를 함께 보고, 연극도 봤다. 스스로 만든 송년회에서 회포를 풀었다. 이제 새로운 친구들이 들어오고, 고등학교가 달라지는 몇몇 아이들은 헤어질 준비를 한다.

    아이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지, 나는 누구인지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그런 여유를 주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사회. 아이가 어릴 땐 체험 교육과 감성 교육을 시키는 여유를 부리다 초등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 성적 향상을 위한 공부 외에 다른 것을 권하지 않는 사회에서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일까.

    종점수다방에서 1년 동안 진행한 독서 토론도 이런 성적 향상만 권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어도 ‘세상을 만나는 법’을 계속 알려주고 싶다. 물론 아이들이 원하는지 먼저 물어봐야겠지만 말이다. ㅋㅋ

    끝으로 종점수다방에서 1년 동안 독서 토론에 참여한 딸의 소감을 소개한다.

    ————-

    엄마 : 딸, 독서 토론을 하기 전과 하고 나서 어떤 점에서 달라진 게 있는지 궁금해.

    딸 : 가장 좋은 점은 독서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읽지 못했을 좋은 책들을 맛보았다는 거지. 다른 애들은 스쳐 지나갈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됐어. 다른 애들보다 내가 좀 우위에 있다는 자만도 생겼지 ㅎㅎ. 좀 구체적으로 달라진 걸 말하자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된 점이지. 어떠한 쟁점을 파악할 때 단면적으로만 생각하고 주장을 가졌던 반면에 책을 많이 읽고 이쪽은 이렇게 생각하며 저쪽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니까 사고력이 깊어진다는 게 뭔지 알게 되었던 거 같아. 또 책을 혼자 읽으면 나만의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는데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도 느끼는구나, 또 ‘나 이외의 생각은 다 틀렸어!’ 이게 아니라 ‘다르다!’라는 것을 알게 만들었어. 친구들 생각을 듣는 것도 재밌었어. 약간의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 내 주장을 밀어붙이면 카타르시스 같은 것도 느꼈어.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정말 재밌었어. 가능하면 계속하고 싶어. 그래 그래. 뇨뇨뇨. 이제 영화 보자.

    종점수다방에서 아이들이 1년 동안 읽은 책시기 : 2012. 2 ~ 2013. 1

    누가 : 중3 아이들 (누리, 혜정, 혜인, 미선, 현근, 대성, 승준, 동이, 민준)

    Who am I / 공자, 지하철을 타다 / 장자, 사기를 당하다 / 10대와 통하는 정치학 / 나무를 심은 사람 / 어린 왕자 / 원자력 에너지 찬반 토론 / 카프카의 변신 / 엄마를 부탁해 / 사이시옷 / 하버드 박사의 경제학 블로그 / 에드가 엘렌포우 단편선 / 헝거게임 /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 모모 / 달과 6펜스 / 안철수의 생각 /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 수레바퀴 밑에서 / 호밀밭의 파수꾼 / 위대한 개츠비 / 고도를 기다리며 / 오래된 미래 / 멋진 신세계 / 이기적 유전자 / 한국 단편소설 Ⅰ,Ⅱ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