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의 추억② - 간첩식별법
        2012년 08월 14일 11: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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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년이었던가? 간첩 김동식 사건은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당시 30대였던 김동식은 남쪽 인사들에게 자신이 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첫 만남에서부터 과감히 밝히면서 포섭을 시도해서 신세대 간첩으로 표현되었다. 김동식이 만난 사람은 지금은 야당의 중견 정치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등과 함운경, 허인회, 황광우 등 이른바 운동권의 젊은 차세대 리더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김동식이 안기부에 연행된 이후 위에 거명된 인사들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상의 ‘불고지죄’로 줄줄이 연행되었다. 김동식이 간첩인 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당사자들은 김동식을 ‘정신병자이거나 안기부나 보안사 등에서 자신을 시험하고자 보낸 프락치로 생각해서 외면했을 뿐 북에서 보낸 간첩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김동식이 간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유일하게 안기부에 신고했던 황광우는 한겨레 신문에 ‘김동식이 간첩이 아닌 5가지 이유’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요즘도 트위터에 우리민족끼리의 내용을 리트윗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박정근 사건’ 등 웃지 못할 사건이 계속 터지고 있지만, 당시 ‘간첩 김동식 사건’은 여타 형법에는 없는 국가보안법 상의 불고지죄가 얼마나 어이없는 조항인지를 만천하에 폭로한 사건이었다.

    당시 나는 불고지죄로 구속된 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나도 불고지한 적이 있다’는 글을 쓴 바 있는데, 바로 유신 시절의 나의 ‘아픈 기억’에 대한 이야기였다.

    74~75년도 쯤이니까 초등학교 3-4학년 때였을 것이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오신 아버지께서는 북한 방송을 자주 듣는 편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무시무시한 유신시대였다.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는 자, 담배값을 물어보는 자’ 등 간첩식별법 10가지를 외우면서 ‘반공 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으로’ 무장해 있던 나에게는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간첩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간첩식별법 10가지 중 하나인 ‘이불을 뒤집어 쓰고 북한 방송을 듣는 자’에 해당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단정하기에는 좀 미심쩍은 부분도 있었다. 아버지는 이불을 뒤집어쓰기 보다는 당당히 방에서 그냥 듣곤 하셨기 때문이다.

    유신 시대의 어린 소년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잠을 설친 날도 여럿 있었다. 마침내 ‘간첩 아버지를 신고한 자랑스런 어린이’가 되어 초등학교 운동장 단상에서 교장선생님한테 표창장을 받는 꿈까지 꾸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끝내 아버지를 신고하지 못했다. 감히 자신의 아버지를 신고할 정도의 용기가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간첩신고 포상금 최대 3천만원의 유혹도 천만다행으로 나의 용기를 북돋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하다 2년간의 수배생활과 감옥생활을 거친 후에 후반에 감옥에서 나와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시골집에서 보내고 있을 때, 아버지에게 이렇게 여쭌 적이 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북한 방송을 들으셨어요?”

    이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복잡하지 않았다.

    “당시에 우리나라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알고 싶은데, 우리 방송에서는 강도, 도둑 이야기나 교통사고 난 이야기 밖에 나오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냐. 그때 북한 방송을 들으면 남한 소식이 생생하게 나오니 그걸 통해서 남한 사정을 알게 되는 거지!”

    이것이 아버지가 북한방송을 열심히 들은 이유였던 것이다. 당시에 ‘막걸리보안법’이라는 말이 유행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막걸리 한 잔 하다가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불만 한 마디 잘못해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당신의 궁금증을 해소할 길이 없어 과감하게 북한방송을 청취했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 옆에서 본의 아니게 북한방송을 들었던 나는 ‘용인자연농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행된 삼성 이병철 일가의 만행 – 끝내 이주를 거부하는 주민을 장마철에 불도저를 동원해 집 주위를 조성함으로써 수해로 집이 침수되도록 만들어 쫓아낸 사건’은 어린 나이에 너무 충격이 컸던지 지금도 그 아나운서의 목소리까지 기억할 정도로 생생하다.

    유신시대는 심지어는 아버지까지 간첩이 아닌가 의심하고 감시할 것을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역할에 충실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진정한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끝내 용기가 부족하여 아버지를 당국에 신고하는 패륜적 죄악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아이에게도 패륜을 강요하던 당시 유신 시절 대한민국의 어디에선가는 그런 패륜적 죄악이 많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장, 진보신당 동작당협 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친구였던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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