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인슈타인 등이
    10월 혁명을 긍정한 이유
    [러시아혁명 100년③] 파장과 영향
        2017년 02월 08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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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혁명 100년 -2 링크

    (계속) 한데 크론슈타드 봉기나 거의 동시에 (1921년 초반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비극인 탐보브 지방 농민들의 전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란 등등 여러 아쉬운 사건들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혁명에 대한 국제적 지지는 과연 무엇 때문에 이토록 높았는가?

    사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지지는 아마도 1920-30년대의 가장 대중적이며 가장 세계적인 운동 중의 하나였다. 공산주의자들만이 러시아 혁명을 보면서 영감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독립된 인도의 총리가 된 자와할랄 네루는 그 정치 신념상 식민지형 사민주의자에 가까웠지만,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나 소련의 사회, 경제 정책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

    유럽에서 혁명과 소련에 대한 긍정적 관심은, 아인슈타인과 비트겐슈타인, 벤야민, 그리고 로멘 롤랑이나 레온 페이크트완게르와 같은 기라성 같은 비판적 지성인들의 공동 분모이었다. 아인슈타인 같은 당대의 양식과 양심의 화신은, 볼셰비키들의 반대파에 대한 탄압책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도 레닌에 대해서는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 (….) 그와 같은 인간들은 확실히 인류 양심을 보존해주고 있다”고 평가해주었다.

    Albert Einstein

    Albert Einstein

    공산주의와 관계없는 인도주의자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의 10월 혁명에 대한 긍정적 시각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공산주의의 “폭력성”에 대해 명확히 비판적이었던 간디는 왜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숭고한 자기희생 정신”을 흠모했는가? 인도주의적 세계주의자인 타고르는 왜 1930년 소련 방문 이후에 소련을 “이 세상에서 비길 바 없이 흠모할 나라”라고 규정했는가?

    인도주의자, 세계주의자, 평화주의자, 그리고 식민지 해방 투사들이 볼셰비키들과의 그 어떤 의견차에도 불구하고 혁명과 초기의 소련을 긍정하고 흠모한 근본적 이유는 10월 혁명의 대단한, 그 당시로서는 거의 미증유의 급진성과 해방성에 있을 것이다.

    혁명이 복합적인 만큼 그 해방성도 매우 다층적이었다. 예를 들어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바로 주고 남녀 사이의 완전한 평등을 바로 법제화시킨 10월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의 여성 투표권 쟁취 투쟁을 지지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1946년이 돼야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선진국 프랑스는 전간기에 여성들을 “시민”으로 대접하지 않았지만, “영원한 후진국”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분위기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 – 적어도 법적으로 – 같은 위치를 누리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여전히 그 식민지에서 법적으로 백인과 비백인들에게 차별 대우를 하고 있었는데, “노농의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트로츠키나 그루지야인 스탈린의 고위직 역임과 인기는 여실히 “민족차별 철폐”의 실체성을 보여주었다.

    전간기 같으면 유럽의 부유한 열강에서도 무상 의료나 무상 교육은 여전히 머나먼 꿈이었는데, 가난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이미 실현됐다. 소련의 대학을 방문한 외국 손님들은, 수많은 민족적 소수자들을 포함한 노동자, 농민 출신의 학생들의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는가? 소르본이나 케임브리지에서는 아직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인데 말이다.

    특히 인도를 포함한 식민지 출신들에게는 볼세비키들의 반제 투쟁 지지는 “복음”과 같은 소리로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평화주의자들에게는 레닌과 다른 볼셰비키들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대한 비판이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대체복무제 실시 등은 크게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루지야나 체첸에 대한 강제적 영토 편입이나 농민 반란 진압 등의 “흠”은 있어도 혁명 직후의 소련은 좌파뿐만 아니라 수많은 진보적, 인도주의적 인사나 식민지 지성인들에게는 “미래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코민테른

    제2차 코민테른 대회가 1920년 7월 19일 겨울궁전 앞 궁전광장에서 주최한 대중집회의 한 장면.

    10월 혁명의 파장과 영향

    러시아 바깥에서의 10월 혁명에 대한 지지가 상당히 폭넓고 깊었던 만큼 혁명의 세계적 영향도 매우 대대적이었다. 우리가 10월 혁명을 “20세기의 핵심적인 사건”이라고 성격 규정하는 이유도, 단순히 10월 혁명이 내건 사회주의적 이상의 미래 지향성뿐만 아니라, 바로 그 세계적 영향에 대한 정당한 평가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는 10월 혁명은 세계체제의 주변부를 확 바꾸어놓았다. 러시아와 직접 인접하기도 한 아시아에서는 그 영향은 가장 빨랐고 직접적이었다. 중국에서는 처음에 소련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이, 그리고 나중에 소련과 같은 비시장적인 개발의 방식을 선호하고 사회주의 이상을 “중국화”시킨 공산당이 집권한 것부터 세계사적 대사건이었다.

    “시장”, 즉 핵심부의 독점 재벌들이 아닌, 평민들의 신분 이동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있었던 업적주의적 관료집단인 공산당의 간부집단이 지휘, 통제하는 방식으로의 “적색 개발주의”는, 그 한계도 분명하긴 하지만 어쨌든 기존의 서방 본위의 자본세력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의미하기도 했다.

    관료 주도 개발주의 국가인 중국의 (구매력 기준으로 계산된) 총국민생산이 이제 미국까지 능가한 요즘 같은 상황은, 장기적으로 10월 혁명의 영향이 가능케 한 “주변부 세력의 세계적 반란”의 한 형태일 것이다.

    10월 혁명이 담고 있었던 각종 민족해방운동자들에 대한 연대의 메시지는, 중국이나 북한의 국가주도집단에 의해서 보다 민족주의적 방식으로 해독됐다. 계통적으로 10월 혁명과 연결돼 있는 , 반제 민족주의를 그 이념적 중핵으로 하는 북한의 지도집단이 지금도 서방세력이 주도하는 봉쇄정책에 맞서며 커다란 생존능력을 발휘해온 것은, 민족주의화된 10월 혁명의 이상들이 가진 잠재력을 확인해준다.

    인도는 독립해도 급진적 사회 변혁의 길로 가지 않았지만, 그 계획 경제나 혼합경제로의 1990년대 초반까지의 지향은 분명히 소련으로부터 받은 이념적 영향과 무관하지 않았다. 역시 이념적으로 다르지만, 이란이나 바트당 시절의 이라크, 시리아, 1990년대까지의 이집트 등지에서의 국가 주도 개발의 시도들이 적지 않게 중국과 소련, 인도를 참고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장기적으로는 10월 혁명이 “제3세계 운동”의 모태 역할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세계체제 주변부에 대한 10월 혁명의 역할”이라고 할 때에 10월 혁명의 사례를 “제3세계”의 각종 혁명 세력들이 비판적으로, 현지 상황에 맞추어서 참고, 활용해왔다는 점도 간과해서 안 된다. 예를 들어 체 게바라는 이념적으로는 마르크시즘을 지향했지만, 급진화된 노동계급이 없는 쿠바에서는 1917년 10월과 같은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무장봉기 아닌 농촌 기반의 유격 전쟁 전략을 활용했다. 나중에 이런 전략은 니카라과 등지에서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한데 혁명의 성공을 위해 10월 혁명의 교훈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을, 최근에도 세계체제 주변부에서의 혁명의 과정을 관찰하면서 여실히 느끼곤 한다. 만약 1918년 벽두에 레닌과 볼셰비키, 좌파사회주의혁명당 등이 입헌회의 (Учредительное собрание)라는 부르주아 의회주의 기관을 과감하게 해산시킴으로서 부르주아 의회주의와의 완전한 단절을 이루지 않았다면 과연 혁명의 성취들을 온전히 보존하여 혁명을 완수할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 혁명 시기의 자코뱅 독재도 보여주듯이 급진적 전위의 독재라는 “비상상황”만이 결국에 혁명이 변혁시킨 질서를 착근, 고정시켜줄 수 있다.

    최근 베네수엘라에서의 의회주의를 이용한 우파들의 좌파정권 전복 작전을 볼 때에, 의회주의 원칙을 바꾸지 못한 것이 차베스 정부의 아킬레스건이 아니었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차베스는 신자유주의 시대 주변부 대중들의 저항을 이끈 굴지의 지도자이었고 10월 혁명의 사례도 분명히 나름대로 참고하고 있었지만, 좋은 의미에서의 혁명적 독재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 결국 그 정권의 하나의 약점으로 작용된 게 아닌가, 싶다.

    주변부에서의 혁명은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계획이었다. 1919년 유럽 여러 곳 (헝가리, 독일의 바이에른, 아일랜드의 일부 지역 등등)에서의 소비에트 혁명의 패배를 직면하게 된 레닌은, 식민지적 착취/차별과 자본주의적, 그리고 전자본주의적 억압들이 복잡하게 얼키고설켜 이중삼중의 억압 형태로 나타나는 식민지와 준식민지에서의 해방 운동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920년의 제2차 코민테른 대회 이후로는 식민지지역에서의 민족해방운동들과의 제휴 방침이 결정돼 반제운동에 새로운 동력을 넣게 됐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코민테른의 가장 핵심적 사업은 물론 무엇보다는 독일 등 핵심부 공업국가에서의 혁명준비이었다. 그런 혁명들의 성공이야말로 후진국 러시아 등 주변부 국가에서의 비시장적 개발과 사회변혁의 전진을 결정적으로 도울 수 있었다. 한데,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핵심부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결국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소련 내지 동구와의 체제경쟁에 돌입한 자본주의 황금기 시절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복지국가 발전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체제내화를 도모했다.

    소련으로부터의 압박이 서구형 복지국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엄연히 사실이다. 그러나 복지국가라는 노사 타협 속에서는, 레닌이 늘 비판해온 온건 사민주의 세력들이 더더욱 우향우 해왔다. 레닌의 비판을 받았던 “배교자” 카우츠키 등은 적어도 성실한 개혁운동이라도 했지만, 오늘날 사민당들이 흔히 신자유주의적 개악들을 주도하기도 한다. 혁명이 실패된 핵심부 국가들이 대단히 보수화된 셈이다.

    물론 보수적 사민주의자들을 지지하는 노동대중들이 10월 혁명의 “폭력성”이나 소련 같은 국가 체제에 내재돼 있는 비민주성이나 권위주의에 대한 환멸 등으로 급진성을 잃었다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다. 실은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등 스탈린 시대 폭정에 대한 폭로들이 1970-80년대에 대중적 보수화에 상당히 기여했다는 분석들이 있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태리와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들이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인 흐루쵸브에게 스탈린 비판과 폭정 폭로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한 것도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 폭로들이 남유럽 노동자, 지식인들의 대량적 공산당 탈퇴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물론 스탈린의 폭정은 혁명적 폭력이라기보다는 반혁명적 폭력이었음에 틀림없다. 한데, 너무나 일찍, 꽃피기도 전에 지고 만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실패, 그리고 소비에트의 권력을 당 관료 집단이 사실상 대체한 행태가 스탈린식 폭정이 가능하게 된 풍토를 만든 것도 사실이다.

    왜 1917년 10월 혁명이 가져다 준 사회 전반의 민주화는, 꽤나 일찍, 즉 이미 1920년쯤에 관료집단에 의해서 거의 압살될 수 있었는가? 왜 소련은 민중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나라라기보다는 결국 수직적인 권력체계가 작동되는 관료국가로 전락돼야 했는가? 결국 소련의 매력성을 크게 파괴한 소비에트식 민주주의 발달 실패의 원인과 과정이야말로 우리들의 10월 혁명 연구의 한 초점은 돼야 한다.<계속>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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