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사의 정의’를 넘어서
    [과거와 현재] 특검 영웅화와 '노동자의 책' 사건
        2017년 02월 07일 11: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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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핵안 가결 이후 많은 이들의 관심은 특별검사의 수사 진척과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심리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검사의 수사 결과는 탄핵안 인용의 근거(대통령의 헌법 위반, 중요한 법률 위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SNS 등에서 ‘#박영수특검 힘내라!’와 같은 해시태그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실제 현재의 특별검사팀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현실 권력 중추부의 ‘국정 농단’을 가차 없이 파헤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시민의 아낌없는 응원을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리라.

    그런데 좀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천만을 헤아린 대중의 외침, 촛불의 힘이 일개 검사의 손에 수렴되는 게 맞는 일인가? 우리는 언제부터 혹은 언제까지 ‘검사의 정의’에 기대를 걸고 일희일비해야만 하는가? 물론 현재 특별검사의 칼끝은 날카롭다. 아마도 권력자는 끌려내려 올 것이고, 가볍지 않은 처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도 좋을 것일까?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정의로운 사정(査正)’에 환호하는 것으로 모든 걸 끝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여기에서 오늘날 한국 검찰 제도의 원형으로서 식민지 검찰, 나아가 근대 일본 검찰 제도의 전개 과정을 떠올리게 된다.

    19세기 말 이래 일본의 근대적 사법제도 형성 과정에서 ‘검찰 우위’의 체계는 1922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일단 완성되었다고 평가된다. 1922년 형소법은 이른바 변론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소송 당사자의 관여도를 강화했는데, 실질적으로는 자연히 피의자․피고인에 대해 우월한 지위에 있는 원고관(검사)의 적극적 활동과 소송 개입을 용인하여 검찰이 형사사법체계의 운영에서 최고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사법의 지배자로서 검찰의 지위는 일차적으로는 제도적 변화로 보증되었지만 그 다음으로는 검사의 활동 그 자체로 더욱 공고해졌다. 1910~20년대, 이른바 ‘다이쇼(大正)시기’(다이쇼 천황 재임기, 1912-25)는 일본 근대사에서 대중민주주의의 시대였다. 사회적 힘을 갖기 위해서는 대중의 인정을 받는 것이 필요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런 때에 검사의 활동이 대중의 인정을 받게 된 첫 계기는 현실 정치권력에 대한 공격, 즉 금권정치, 정경유착으로 빚어진 ‘권력형 비리’ 사건에 대한 ‘엄정한 수사’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 1914년 4월 ‘지멘스(siemens; 독일의 전기전자기업으로 최근 한국에서는 지멘스 보청기 등이 유명하다.) 사건’이다. 해군 수뇌부가 지멘스의 장비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에서 출발한 이 사건은 정계 전반의 스캔들로 확대되어 해군 출신 실력자로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의 사직을 이끌어냈다. 검찰이 내각을 붕괴시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검찰은 국민들 앞에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고 정치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후일 정계 최고 실력자를 구속시킨 ‘도쿄지검 특수부의 신화’(1976년 미국 록히드사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전 총리대신이자 자민당 최대 파벌의 리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구속) 같은 것도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평가된다.

    한편 당시 일본 검찰이 권력형 비리 수사에 더하여 힘을 키워간 또 하나의 축은 좌익에 대한 수사와 처벌, 이른바 ‘사상 사법’이었다. 전자가 ‘특수 수사’라면 후자는 ‘공안 수사’인 셈이다. 특히 사상 사법은 검찰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치세력이 검찰권 행사를 간섭하는 것을 배제한다는 소극적․방어적 의미를 넘어서 검찰이 주도적으로 ‘올바른 사회질서’를 만들어간다는 적극적․공세적 의미의 ‘검찰 독립’ 이데올로기를 탄생시켰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상징적인 인물이 검사 출신으로 처음 총리대신에 오른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郞)이다. 도쿄제대 법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검사가 된 그는 여러 권력형 비리 사건, 그리고 사상 사건 수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했다. 1912년 검사총장(검찰총장), 1921년 대심원장(대법원장)을 거쳐 1923년 사법대신이 되었고, 1939년 마침내 총리대신에 올랐다. 눈여겨볼만한 점은 사법대신 재임 시기인 1924년 우익 국가주의 단체인 국본사(國本社)를 조직, 1936년까지 총재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사법 권력의 총수라는 공적인 지위와 더불어 민간 우익의 우두머리를 겸하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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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전반 일본 ‘검벌’의 상징, 히라누마 기이치로(1867-1952)

    히라누마가 걸어간 길은 일본 검찰이 ‘사회의 적’(그것은 부패한 정치권력일 수도 있고, 사회 안전을 해치는 좌익일 수도 있다.)을 물리치며 존재감을 키워나간 결과 본래 근대 일본의 중요 권력집단인 군벌, 재벌에 이어 스스로 ‘검벌’이 된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런 결과 히라누마 본인은 8.15 이후 민간인 출신으로 드물게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병사했다.)

    이상 근대 일본 검찰의 성장 과정은 제도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에도 이식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검벌 현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상 사법 활동이야 물론 활발했지만, 그것은 사실상 계서화된 위계에서 일본 본국 검찰의 하위에 위치한 것이었고 식민지권력 수뇌부의 비리를 겨냥할만한 힘이 식민지 검찰에 주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도적 이식을 넘어 마치 일본의 경우처럼 검찰이 스스로 힘을 키워갈 수 있는 계기는 8.15 이후에 주어졌다. 물론 전후 한국 검찰은 일본과는 다른 정치적 조건에서 정치권력과 각을 세우기보다 그 ‘시녀’가 되는 길을 택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기회 있을 때마다, 특히 ‘민주화 이후’ 검찰의 민주화로 포장되기도 한 ‘검찰 독립’의 슬로건(노무현 정부 초기 ‘검사와의 대화’를 상기해보라.)에서 전전 스스로 권력화 되어간 일본 검찰의 그림자는 때때로 발견된다.

    한편 특별검사의 ‘활약’의 반대편에서 지난 1월 5일 검찰은 이미 1990년대부터 대학의 교육학 교재로도 쓰여온 『페다고지』, 전세계적으로 고전으로 인정되는 E. H. 카의 『러시아혁명』, 마르크스의 원전 『독일이데올로기』,『철학의 빈곤』 등의 절판본을 스캔하여 웹사이트에 올렸다는 혐의로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상기하고픈 바는 이진영 대표를 구속한 검찰이나 그 이름도 긴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 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본질이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끝내서는 안될 일이다. 현대 국가의 검찰은 본질이 같다고 해도 얼마든지 다른 효과를 낼 수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른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의 원친은 우리 모두 지금 목격하는 바, 바로 ‘촛불’로 대표되는 대중의 압력이다. 특별검사팀의 수사에 환호를 보내거나, 격려를 하는 것을 넘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그들의 수사가 대중의 의지를 얼마나 잘 반영하는지, 그들이 이 수사를 통해 ‘독립’하여 또 다른 권력이 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지 감시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이상의 내용 중 제도적 변화의 대강은 문준영 교수의 저서『법원과 검찰의 탄생』[2010, 역사비평사]에 근거했다. 그러나 몇 가지 평가나 주장은 기본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혀둔다.)

    필자소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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