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교 생활에 적응하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⑦] 일지
        2017년 02월 03일 03: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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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➅] 내 학창 시절을 추억하다

    3월 21일(목)

    모처럼 일찍 귀가했다. 9시 30분이었다. 문을 열었다.

    “누리라”

    할매가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며 들어섰다.

    “아이가 아직 안 온다.”

    안방에 누워 TV를 보던 할매가 걱정했다. 딸에게 전화했다.

    “아직 학교야”

    “응, 오늘은 더 공부하다 갈 거야.”

    딸은 소곤대며 대답했다. 너무 늦지 말라 하고선 끊었다. 아이가 학교에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할매를 안심시켰다. 얼마 뒤 아내가 귀가했다. 딸은 10시 30분을 넘겨 집에 들어섰다.

    “득영이 하고 유진이 하고 같이 있었어. 근데 엄마, 있잖아. 학교 나오는데 정문 앞에 어떤 아저씨가 있어서 무서웠어.”

    “자기 딸 데리러 온 사람이겠지.”

    딸은 수선 떨었고, 아내는 건조하게 받았다. 딸은 또 말했다.

    “전에 친구 하나가 밤늦게까지 혼자 공부하다 나온 날이 있는데, 수위 아저씨가 정문을 잠가 놓았대. 할 수 없이 문을 타고 넘었대. 학생이 남아 있는지 확인도 안 하고 어떻게 문을 잠글 수 있어”

    딸은 툴툴거렸다.

    “말도 안 돼. 여학굔데 사고 나면 어쩌려고. 이상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데. 너는 절대 혼자 남지 마라.”

    할매와 아내는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며 걱정했다.

    보성여고 1학년 4반 아이들의 한때가 사진에 담겼다.

    보성여고 1학년 4반 아이들의 한때가 사진에 담겼다.

    3월 24일(일)

    어제와 오늘 동반산행을 못했다. 소정이 와서 놀며 하룻밤 자고 간 까닭이었다. 소정인 내 외사촌이라 딸에겐 진외가 고모뻘이었다.

    내가 다섯 살 때였다. 우리 가족은 고향 예천 두메산골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젊은 부부와 어린 삼형제였다. 자식들만큼은 기필코 대학에 보내겠다는 내 아버지의 굳은 의지였다. 성실한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자식들 먹여 살리려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가난했고 입에 풀칠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저임금에 임금 체불에 노동자가 머슴 취급받던 시대였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그해부터 방학 때마다 아내와 자식들을 고향의 처갓집으로 보냈다. 그때만이라도 삼시 세끼 거르지 말고 얻어먹으란 뜻이었다. 이성하와 변덕인,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우리가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내내 밥숟갈 얹는 걸 받아들였고 따뜻하게 품었다. 우리가 서울로 떠나는 날은 모든 가족이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며 아쉬워하곤 했다. 외삼촌들은 어린 조카들의 조막만한 손에 용돈 쥐어주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몇 년 뒤에 아버지는 건설 노동자로 중동에 나갔다. 서울의 우리는 삼시 세끼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럼에도 나의 대학 첫 방학 때까지 외가행은 계속됐다. 정이 깊게 들어서였다. 장장 13년이었다. 그 과정에서 셋째와 막내 외삼촌이 서울로 올라와 우리 집에 머물며 공부하기도 했다. 훗날엔 외삼촌 셋과 이모가 수도권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는 할매를 앞세워 자주 오가며 교류했다. 딸도 아기 때부터 자신의 진외가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소정과 누리는 같은 해 태어난 동갑내기고, 커 오면서 소정아, 누리야, 스스럼없는 절친이 되었다. 예전처럼 호칭을 까다롭게 따지는 고리타분한 시대가 아니었다. 어른들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 내 외가는 10여 년 전 일본에 놀러갈 때도 소정과 딸애를 함께 데려갔다. 덕분에 어린 둘은 어른들 틈에서 심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할매도 함께였다.

    한2

    왼쪽부터 누리, 소정, 수정. 딸은 아가 때부터 소정과 절친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고모뻘인 수정과도 친자매처럼 어울렸다.

    3월 28일(목)

    아이는 매일 아침 8시 직전에 집을 나섰다. 8시까지 등교해야 했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학생이 제일 늦게 등교한다는 통설을 충실히 따르는 중이었다. 딸애가 나간 뒤였다.

    “야자 때 수학, 영어, 논술 배우는 게 공짜가 아니었어. 한 학기 40만 원이래. 애가 별도로 발표력 동아리에 들었는데, 그것도 7만 2000원이야. 이래저래 합하면 누리에게 한 달 40만 원 들어가. 학교에 내는 것만 그래.”

    아내는 돈 받는다고 미리 공지하지 않은 학교 측을 불만스러워 했다. 난 액수에 한숨 쉬었다.

    3월 31일(일)

    딸과 북한산에 갔다. 아내도 따라간다 해서 동반했다. 예상대로 아내는 시간을 잡아먹었다. 초입부터 숨을 몰아쉬며 뒤처졌다.

    “산에 버리고 가자.”

    딸과 나는 앞서 오르며 키득거렸다. 족두리봉에 오른 딸은 매우 흡족해했다.

    “계속해서 바위를 타고 올라와서 좋았어. 밋밋하거나 계단은 싫어. 저번에 수락산에서 아빠에게 말은 하지 않았는데, 아스팔트랑 계단이 많아서 너무나 힘들었어.”

    산에 빠르게 적응하는 딸내미가 대견했다.

    “수락산에선 9킬로미터 넘게 걸어서 더 많이 힘들었을 거야. 산길은 평지보다 최소 1.5배 이상 더 힘들거든.”

    향로봉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간호사가 되고 싶어. 할머니 수술하고 병원에 있을 때 보니까 간호사 언니들 상냥하고 참 멋있었어. 아픈 사람들 치료도 하고 좋을 것 같아. 경희대 간호학과를 생각하는 중이야. 부설 병원이 있으니까 취업에 유리하지 않을까.”

    딸애는 새로운 꿈을 소개했다. 아내는 반대했다. 한때 노동운동을 했던지라 간호사의 고된 삶을 알고 있었다. 나도 만류했다.

    “간호사가 얼마나 힘든데. 환자들 뒤치다꺼리 하는 게 장난 아냐. 때론 똥오줌도 받아야 되고, 3교대라 한밤중에도 일해야 돼. 돈은 그런대로 받지만 삶이 힘들어.”

    하산 길엔 무상급식이 대화 소재였다.

    “엄마, 얼마 전에 중학교 선생님 만났는데, 선생님이 중학교 1, 2학년 애들이 학교 급식 안 먹고 빵을 사 먹는다고 걱정하더라고. 애들이 돈도 안 내는 무상급식인데 굳이 먹을 필요가 뭐 있냐고 한대. 그래서 선생님은 무상급식이 문제래.”

    딸의 전언에 아내는 발끈했다.

    “무상급식이라서 빵 사 먹는 게 아니고 밥맛이 없어서 그런 거지. 그게 왜 애들 잘못이야? 학교에서 급식을 잘 만들지 않아서 생긴 문제야.”

    “맞아. 나도 친구들하고 급식 대신 빵 사 먹은 적이 많아. 보성은 다른 학교에 비해 급식 맛이 없기로 소문났어. 고등학교도 똑같아. 성심은 맛있대.”

    딸도 동의했다. 딸아이 학년은 무상급식 적용 대상이 아니라서 밥값을 내야 했다. 그런데도 안 먹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아내는 보성의 급식이 맛없는 건 이전부터 계속되던 문제라 했다.

    하산 길에도 계단 구간은 있었다. 딸에게 물었다.

    “내려갈 땐 계단이 힘들지 않지”

    딸은 그렇다 했다. 나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얘기를 꺼냈다.

    “수학을 쉽게 하려면 중학교 수학을 복습하는 게 도움이 된대. 한 번 더 익히면 까먹지 않는다니까 꼭 다시 봐라.”

    4월 2일(화)

    깨어나니 7시가 다 되었다. 딸은 아직 꿈속이었다. 아내에게 깨우라 했다.

    “6시부터 깨웠는데 안 일어나. 5분만, 5분만, 하면서 안 일어나. 저 봐, 저렇게 소리가 큰데도 안 일어나잖아. 지가 알아서 일어나라고 놔둬.”

    딸의 방에선 자명종이 크게 울었다. 내가 가서 빨리 일어나라 했다. 잠결에 제 엄마 잔소리를 들었는지 즉시 일어났다. 딸은 간밤에도 새벽 1시에 잠들었다. 숙제나 공부를 끝내면 바로 자야 하는데, 인터넷 검색이나 게임을 하다가 늦게 잠드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생각했다.

    ‘늦게 잠드는 게 익숙하면 시험 공부할 때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평소엔 그러면 안 되는데. 그나저나 얼마나 피곤할까. 검색하고 게임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 아니지. 나는 고3 때도 매일 친구들이랑 놀았는데, 딸아이라고 왜 놀고 싶지 않겠나.’

    4월 4일(목)

    딸애가 첫 지각을 했다. 나도 아내도 늦잠을 잤고 깨우질 못했다. 딸애는 부랴부랴 등교 준비를 마쳤다. 9시가 다 됐다. 딸애가 집을 나서기 직전 셋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갔다.

    “엄마, 똥마려워.”

    “안 돼. 늦었으니까 학교에 가서 눠.”

    나는 심히 걱정스러웠다.

    “공부하다 똥마려우면 선생한테 바로 얘기하고 화장실 가서 눠라. 무식하게 참다가 팬티에 싸지 말고. 친구들 앞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으면 얼마나 창피하겠냐.”

    모녀는 하하 웃었다. 어련히 알아서 할 건데 별걸 걱정한다는 투였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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