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는 시작되었지만
    [왼쪽에서 본 F1] 새로운 지배자
        2017년 02월 01일 09: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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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하반기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보고 있자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1년 전만 해도 박근혜 정부의 공고한 권력 체계에 금이 갈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변화의 바람은 갑자기 찾아왔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섰으며, 이 거대한 변화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예상은 빗나갔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F1이나 다른 모터스포츠 중계방송에서 해설을 하는 동안 ‘펠레’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펠레의 저주, FIFA 월드컵과 같은 큰 대회와 관련하여 브라질의 축구 선수 펠레가 한 예측은 정반대로 실현된다고 믿어지는 징크스를 말하는 것) 해설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을 ‘예상’해야 하는 일이 많은데, 제 예상이 빗나갈 때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펠레’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저는 예상을 했을 뿐 예언가는 아니니, 예상이 빗나갔다고 해서 몹시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 예상이 자주 빗나가는 것만은 사실인가 봅니다.

    공교롭게도, 최근 F1에는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앞서 리버티 미디어가 F1을 인수하기로 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마지막 스텝이 계속 미뤄지는 바람에 여러 루머가 난무했었습니다. 그런데 2017년 벽두에 FIA가 리버티 미디어의 F1 인수를 승인한다는 뉴스가 나온 직후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리버티 미디어는 미뤄왔던 F1 인수를 단칼에 진행해 ‘세계 최고 모터스포츠’의 새 주인이 되었습니다.

    리버티 미디어는 공식적으로 F1을 인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CEO를 임명하고 조직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이와 함께 바로 얼마 전 제가 이 칼럼에서 ‘떠나야 할 사람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던 버니 에클스톤이 갑자기 F1의 지배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습니다.(관련 글 링크) 다시 한번 ‘펠레’라는 별명이 언급되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변화가 시급했던 F1의 입장에선 어느 정도 환영할만한 뉴스일 수 있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F1 수프리모’로 군림하며 지금의 F1을 만드는데 큰 공헌을 했던 86세의 노장은 이제 명예 회장으로 실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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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버니 에클스톤

    그런데, ‘F1의 지배자’가 바뀐 것은 모두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일까요? 안타깝게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새로운 지배자 리버티 미디어가 ‘전문 경영인’으로 볼 수 있는 체이스 캐리를 새로운 F1 CEO로 임명했지만, 캐리는 F1은 물론 주요 모터스포츠 분야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던 관계자나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버니 에클스톤은 적어도 모터스포츠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죠. 드라이버로 F1 그랑프리에 참가하기도 했었고, 챔피언 요헨 린트의 매니저로도 활동했으며, 무엇보다 잭 브라밤이 떠난 브라밤을 F1 최강팀 중 하나로 만든 F1 팀의 오너이기도 했습니다. 브라밤의 팀 오너 역할이 결과적으로 버니 에클스톤을 F1의 지배자로 만든 셈이었죠.

    버니 에클스톤이 물러나고 리버티 미디어가 지명한 체이스 캐리가 ‘고용한 CEO’ 입장에서 F1을 이끌게 된 것은, 마치 봉건 왕조가 붕괴한 대신 자본가 그룹이 국가의 지배권을 손에 넣은 것과 비슷합니다. 피지배 계급의 입장에선 이런 거대한 변화가 과연 긍정적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을 밝힌다는 인상이 강했던 버니 에클스톤이긴 했지만, 적어도 F1을 잘 아는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에 반해 리버티 미디어는‘땅 부자’로 유명한 존 말론이 이끄는 미디어 ‘기업’입니다.

    이전까지 F1의 소유주였던 CVC는 투자 회사였지만 전권을 버니 에클스톤에 일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결국 스포츠의 본질과 자본 사이에서 쉽게 균형을 잡진 못했지만 적어도 한쪽으로 기울어지지는 않던 F1이, 앞으로는 ‘경제적 문제’에 더 큰 비중이 실리면서 다른 궤도를 타게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단기적으로는 ‘미디어’ 기업 리버티 미디어가 팬들과 언론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겠지만, 어느 선을 넘어가면 더 큰 돈을 버는 것에 집중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페라리의 기득권에 대한 제한 전망입니다. 리버티 미디어는 완전한 F1 인수 이전부터 현재 F1의 배당금 체제에서 페라리 등이 누리고 있는 ‘예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해왔습니다. 극단적인 예측 중에는 리버티 미디어가 앞으로 페라리 등에 제공되는 특혜를 모두 없애리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일단 F1의 배당금을 기득권을 가진 대형 팀에게 집중하는 대신 소형 팀에게도 고루 분배한다면 매우 아름다운 그림이 만들어질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기대를 갖고 에클스톤의 퇴진과 리버티 미디어의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왠지 이런 기대가 과한 장밋빛 전망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과연 저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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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F1 운영 실무 책임자가 된 로스 브런

    자본의 욕구에 충실한 대기업 리버티 미디어가 과연 소형 팀의 생존이나 모터스포츠의 최정상이라는 F1의 본질에 얼마나 신경을 써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능력대로 대우한다./받는다.’라고 포장한 신자유주의에 환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불평등이 심해지고 약자가 소외되는 구조로 이어지고 마는 현실과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리버티 미디어는 ‘감 팀들의 능력과 성적대로 배당금을 나누는 구상’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리버티 미디어가 F1에서 가장 유능한 인재 중 한 명인 로스 브런을 재야에서 불러내 새로운 F1의 운영 실무 책임자로 삼았다는 부분입니다. F1의 스포츠 운영 면에서 보면 과거 에클스톤의 역할을 이어받은 셈입니다. 적어도 로스 브런은 버니 에클스톤 이상으로 F1을 잘 아는 사람이고 훨씬 젊은 사람인 데다가 F1 내부에 적이 많지 않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기술 책임자와 팀 수석을 고루 거치면서, 기술적인 지식과 팀 운영 실무까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장점이죠.

    그러나, 로스 브런은 버니 에클스톤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로스 브런은 새 CEO 체이스 캐리의 ‘지휘를 받는’ 실무 책임자일 뿐이고, 재무나 경영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실무 책임자가 임명돼 브런이 관여할 수 없습니다. F1이 스포츠이자 사업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과연 한 쪽에만 책임을 지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에도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리버티 미디어는 버니 에클스톤을 단칼에 잘라낸 것 이상으로 쉽게, ‘자신들이 고용한 실무자’인 로스 브런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리버티 미디어가 F1을 잘 아는 실무자가 있다고 해서, 자신들의 궁극의 목표인 ‘이익 추구’를 포기할 리도 없습니다

    좋든 싫든 변화의 바람은 불었습니다.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던 지배자는 물러났고, 새로운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변했으니까 무조건 좋아질 것이란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때로는 오히려 구관이 명관이란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장밋빛 전망에 매몰되지 않고 이런 우려에 동의한다면, F1의 본질을 지키고 소형 팀과 힘없는 일반 팬 다수의 바람이 충족될 수 있도록 ‘전과 다름없는’ 노력을 계속 해야만 합니다. 노력한다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노력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테니까요. 물론 장황하게 늘어놨던 여러 우려와 이런저런 부정적 전망이 모두 ‘펠레’ 소리를 듣는 저의 잘못된 예상, 혹은 기우로 끝난다면 더 좋겠습니다.

    필자소개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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