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우정당과 극우단체
    최초 연방의회 진출 앞둬
    [극우파-4] 독일을 위한 대안(AfD)
        2017년 01월 31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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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의 극우파-3]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샤리아(이슬람헌법)은 우리(독일)의 법률이 아니다. 부르카는 우리의 법률(금지)을 따라야 한다. EU 난민할당(연간 20만 명)도 유연(축소)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벨기에 국경이 인접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아헨에서 열린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4선 총리에 도전하는 메르켈의 일성이었다. 한때, ‘난민 맘’이라고 불린 메르켈 총리가 공식적으로 ‘우회전’을 선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메르켈의 우회전 이유는 하나였다.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율이 끝없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AfD의 전략은 간단했다. 연이은 테러를 이슬람과 난민으로 연결시키면 그만이었다.

    메르켈 총리가 전격적으로 베를린선언을 통해 ‘가능한 모든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 유럽의 좌우파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좌파들은 인도적 조치에 환호를 보냈고 우파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하지만 끝없이 독일로 밀려드는 난민들과 일련의 테러로 6개월 만에 EU 난민할당제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동유럽의 집권 극우정당들은 배정된 난민 숫자가 아니라 단 한 명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할당제는 여전히 교착상태다.

    AfD의 급부상은 일회성이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주의회에 진출하며 9월에 실시될 연방의회 입성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메르켈의 지지율은 총리 취임 이후 최저치까지 떨어져있다. 할당제가 교착상태인 상황에서 독일에 배정된 20만 명을 이제는 축소하겠다고 공약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기민당의 지지층을 AfD가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있는 분명한 현실 앞에 메르켈은 막대기를 오른쪽으로 다시 구부려야만 했다.

    독일 극우정당의 뿌리, 국가민주당(NPD)

    최근 독일헌법재판소는 네오나치를 표방하는 국가민주당(NPD)의 해산을 요청하는 청구를 3년간의 심리 끝에 기각했다. 당 강령에 위헌적이고, 반 헌법적인 내용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 위협’이 있다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나치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용을 베풀지 않는 독일의 정서로 볼 때 다소 의외의 판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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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민주당의 지도자인 우도 포이그트(Udo Voigt). 독일제국의 부활을 고집하면서 변방정당에 머무르고 있다

    국가민주당은 AfD보다 더 극우적인 정당이다. AfD는 강령에 위헌적인 요소를 교묘히 피하는 선에서 타협한 반면, 국가민주당은 네오나치주의와 ‘독일 제국 부활’을 전면에 내걸었다. 국가민주당이 구 동독지역의 쇠락한 공업지대의 일부 주 의회에 진출한 후, 이를 기반으로 당의 청년조직인 ‘국가민주주의자’를 앞세워 곳곳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폭력이 끊이지 않았다. AfD의 급부상에 놀란 메르켈은 국가민주당의 문제부터 먼저 해결하려고 위헌심판을 청구했지만 기각된 것이다. 한국의 통합진보당 해산판결 때 인용한 독일의 정당이 바로 국가민주당이었다.

    국가민주당의 전신이 등장한 것은 2차 대전의 화마가 사라진 20년 정도 후였다. 패전국 독일은 전쟁으로 산업시설의 대부분을 상실한 것도 문제였지만 막대한 배상금은 더 치명적이었다. 이중고에 시달리던 국민들에게 다른 목소리의 등장은 시선을 잡아끌만한 충분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국가민주당은 60년대에 몇 개 주에 진출하는 쾌거를 올리며 기세를 올렸지만, 얼마 후 원외정당으로 밀려나면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국가민주당의 빠른 몰락은 한마디로 정치력의 부재와 당을 포장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지자들이 기대했던 포퓰리즘 혜택은커녕 독일 제국의 부활만을 외치고 다니는 무리들에게 빠르게 기대를 거두었다. 새로운 변신이 필요한 시기였지만 이들은 트럭과 오토바이에 네오나치 깃발을 매단 채 도시들을 전전하는 유랑집단의 길을 선택했다.

    국가민주당이 다시 돌아온 것은 통일이후 구 동독지역이었다. 통일 이후 20년 정도가 지나자 구 동독 주민들은 자본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과거 공산당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계속해서 늘어났다.

    국가민주당은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이런 지역에 자리를 잡은 채 자본주의의 폐해와 빈부격차를 내세우면서 몇 개 주 의회에 다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고작 1%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것에 불과했다.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거리를 위한 투쟁’을 여전히 투박한 방식으로 고집함으로써 전국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데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극우정당 AfD, 극우조직 페기다(PEGIDA)

    2013년 연방의회선거에서 AfD가 4.7%, 단 0.3%가 부족해 연방의회에 진출하지 못한 성적을 기록하자 언론들은 그 배경을 놓고 연일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극우정당이 연방의회에 문턱 앞까지 왔다는 사실은 독일 좌우파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이듬해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무려 AfD는 7.1%를 득표해 두 명의 유럽의원을 당선시켰다. 국가민주당과 달리 AfD가 신생정당이라는 사실은 충격을 배가시켰다.

    AfD의 최초의 회합은 2012년 가을에 조촐하게 열렸다. 기민당 소속으로 오랫동안 헤센 주 국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골랜드(Alexander Gauland)를 좌장으로, 경제학자인 콘라드 아담(Konrad Adam), 젊은 여성 극우주의자 프라우케 페트리(Frauke Petry) 등이 참여했다. 모임을 주도한 것은 역시 경제학자인 베른트 루케(Bernd Lucke)였다. 베를린에서 열린 창당대회에서는 루케가 당수의 자리에 올랐고, 페트리가 부당수, 아담이 대변인을 맡았다.

    창당 몇 달 만에 연방의회 선거에서 예상외의 성적을 거두자 주 의회에 진출하기 위해 지역조직을 빠르게 건설하기 시작했다. 기획정당으로 출발한 AfD가 지역조직을 비교적 쉽게 구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루츠 바흐만(Lutz Bachmann)이 설립한 극우단체인 페기다(PEGIDA, 유럽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와의 교감이 있었다. 페기다에 소속된 상당수가 AfD의 당원이지만 완전한 독립적인 조직이다.

    거칠고 수공업적인 국가민주당과 달리 루츠 바흐만은 체계적인 네트워크 형태로 조직을 구축했다. EU 사람들은 비아냥거리지만 “기독교와 유대교에 기반한 인본주의”를 페기다의 노선으로 내세우며 이슬람에 반대하는 극우주의자들을 계속해서 끌어 모았다. SNS를 통해 지역별 활동들을 공유하는 것도 국가민주당과 같은 과거의 극우조직과는 다른 모습이다. 세련된 극우대중조직과 엘리트 극우정당의 등장은 절묘한 조합이었다.

    페기다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구 동독지역인 드레스덴을 본거지로 지속적인 대중집회를 개최하면서 급성장했다. 불과 2년 만에 조직의 근거지인 드레스덴의 집회에는 2만여 명이 참여한 것을 비롯해 구 동독 지역에만 십만 명 이상이 ‘페기다’의 깃발아래 모여들었다. 국가민주당이 구 동독지역 일부에서만 작은 기반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페기다는 구 서독지역으로 조직을 확대하면서 전국적인 네트워크 조직으로 급성장했다.

    AfD는 페기다의 조직이 잘 구축된 곳에서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한다. 열매의 몫은 모두 AfD의 것이지만 페기다는 개의치 않았다. 기묘한 동거는 이내 당 내에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페기다와 공개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베른트 루케 당수 역시 페기다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프라우케 페트리는 2년 전의 마스코트가 더 이상 아니었다. 당수 경선에 도전해 “우리는 국가민주당이 아니다”라는 말로 당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당원들이 선택한 것은 프라우케 페트리였다. AfD 창당의 주역인 베른트 루케는 자기발로 당을 나가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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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D의 지도자인 프라우케 페트리(Frauke Petry). 연방의회 진출을 위해 당권도전과 페기다와의 거리두기도 불사하고 있다.

    연방의회 진출을 눈앞에 둔 AfD

    당권을 장악한 프라우케 페트리는 당의 지역조직을 강화하는 동시에 여론전 기구를 대폭 강화했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구 서독지역의 최대 주인 니더작센(쾰른)에 거점을 마련한 후, 프랑크푸트, 하이델베르크, 슈투트가르트로 뻗어갔다. 물론 페기다와 2인3각으로 기반을 마련했다. 구 서독지역에서도 지지율이 계속 오르자 상대적으로 낙후하고 실업률이 높은 구 동독지역의 몇 개 주에서는 20%가 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3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AfD는 작센안할트에서 기민당(29%)에 이어 제2당(24%)을 차지하는 성적표를 기록했다. 사민당(10%)의 지지율은 당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기민당은 사민당만이 아니라 AfD를 제외한 모든 정당과 연정을 구성해야만 했다. 하지만 기민-사민-녹색의 의석수는 과반수에 미달했다. 기민당은 좌파당과는 연정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대투표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소수연정’을 꾸려야만 하는 굴욕적인 경험을 해야만 했다. 이런 대규모 교착상태는 사민당을 능가하는 AfD의 기록적인 득표율 때문이었다.

    AfD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도 득표율 15.1%로 제3당에 올랐다. 녹색당이 사상 최초로 제1당(31.5%)에 올랐지만 사민당이 제4당(13%)으로 추락하면서 녹적 연정이 과반수가 되지 않는 상황이 또다시 발생했다. 9월에 실시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에서는 기민당(19%)이 AfD(20.8%)에 밀려 제3당으로 밀려났다. 베를린 선거에서 기민당은 역사적인 참패를 기록했다.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선거전까지만 하더라도 메르켈은 난민문제에 대해 분산 수용(연간 20만 명)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었다. AfD에 제2당을 내준 것도 충격이었지만 이곳은 메르켈의 선거구가 있는 상징적인 곳이라는 사실 때문에 당에서 고립되었다. 4연임에 도전하는 메르켈은 우회전을 선택했고, 사민당도 덩달아 우회전했다. 난민문제만 우회전을 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이슬람 부르카 착용금지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공공장소뿐이 아니라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도 포함함으로서 독일에서 부르카의 추방이 시간문제로 남았다.

    메르켈의 우회전은 연이은 주 의회 선거에서의 패배와 AfD의 예상을 뛰어넘는 약진에 따른 후퇴였다. 또 다른 이유는, 사민당과 손을 잡더라도 9월 연방의회선거에서 과반수가 되지 않는다는 여론조사가 계속해서 발표된 것도 위기감으로 작용했다. 기민당과 사민당의 지지율은 조금씩 동반상승하기 시작했다.

    AfD의 지지율은 최소 10%에서 최대 15%까지 기록하고 있다. 연방의회 진출 기준이 5%이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악재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전후 처음으로 수십 명의 극우주의자들이 ‘분데스탁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확실하다.

    악재를 일으킨 것은 페기다의 지도자인 루츠 바흐만이었다. 히틀러를 연상하는 사진을 SNS에 올려 뭇매를 자초했지만 AfD는 외면하며 오히려 우려를 표명했다. 페기다의 지도자인 루츠 바흐만도 내부의 반발에 부딪혀 대표에서 물러나야만했다. 프라우케 페트리 당수는 연방의회로 가기 위해 어떤 돌발변수라도 모두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악재는 페기다의 루츠 바흐만이 신당 창당을 선언한 것이다. 정당명부제의 특성상 AfD의 지지율을 얼마나 잠식할지도 관전 포인트이다.

    독일 좌파는 지금

    최근 7년간 사민당을 이끌어온 가브리엘 당수는 총리 후보와 당수직 모두를 전격 사퇴했다. 후임을 맡은 인물을 마르틴 슐츠 전 유럽의회 의장이다. 유럽의회 의장 자리까지 오른 슐츠의 드라마틱한 인생이 높은 호감도 나타내고 있다.

    알콜 중독에 고등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슐츠는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사민당에 입당해 지방의원에 당선됐다. 소규모 도시의 시장을 지내는 것을 거쳐 중앙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유럽의회 의원에 당선된 후, 의장에 오르면서 입지전적인 그의 삶이 유럽전역에 조명됐다. 유럽의회에서는 중도우파가 다수파이고 극우정당들도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만큼 즐비한 가운데, 난민문제를 포함한 산적한 현안들을 원만하게 끌어온 경력은 독일국민들에게 하나의 자랑거리였다.

    9월 연방의회선거에서 사민당의 전략은 간단하다. 슐츠를 앞세운다고 하더라도 기민당을 누르고 제1당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은 아니다. 사민당의 전략은 좌파당과 녹색당을 포함한 대연정 즉, 적적녹연정을 구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민당을 최대한 따라잡아야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슐츠가 메르켈을 오차범위까지 따라잡는 것으로 나타나자 장밋빛연정도 꿈은 아니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우회전을 할 때 전선을 지킨 것은 좌파당이었다. 그 대가는 구 서독지역의 대규모 주인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 원외정당으로 밀려난 것이었다. 좌파당은 서독지역에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구 동독지역으로 밀려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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