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학창 시절을 추억하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 ➅] 그때
        2017년 01월 27일 12: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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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⑤] ‘공부감옥에 갇히다’ 링크

    딸애가 다른 산에도 가 보자 해서 지난주엔 관악산, 3월 17일 오늘은 수락산이었다. 딸이나 나나 이야기에 몰입된 바람에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다시 타지 않고, 상계역에서 당고개역까지 손잡고 걸었다.

    “아빠, 국제고 가려던 친구가 있는데, 자기 아빠가 가까운 학교에 들어가라 설득해서 보성여고로 왔대. 근데 정작 입학하고 나니까, 걔네 아빠가 보성은 똥통이라 그랬대. 친구가 그 말 듣고 열이 확 받쳐 아빠에게 막 쏘아붙였대. 아하하하.”

    딸은 깔깔거렸고, 나는 너털웃음 쳤다.

    “하하하. 농담으로 그랬겠지. 나도 너한테 만날 똥통이라고 하잖아.”

    한1

    3월 10일 관악산 국기봉에서

    고교 시절의 나는 일곱이 하나처럼 어울리는 무리에 속했다. 학교는 용산고, 서울공고, 성동공고, 유한공고, 배문고로 각각 달랐다. 우리는 3년 내리 붙어 지냈다. 부모 형제보다 친구가 더 끌리던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이 골목 저 골목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며, 술 마시고 담배 태우고 뽕짝 부르고 디스코 추고, 또래들과 싸움도 하고, 파출소에 끌려가기도 하고, 비슷한 선후배들과 중국집 골방에 모여 짬뽕 국물에 자장면에 고량주에 소주로 불콰해지면 야자타임 한다면서 때리고 맞으며 킬킬댔다. 여름엔 길가에서 잔 날도 많았다. 빈터에서 신문지 덮고 자다가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버틴 날도 있었다. 대학 입시 전날도 소주 마시며 고스톱을 쳤다.

    주 아지트는 우리 집이었다. 밤중이고 새벽이고 없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아버지가 중동에 나간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어려운 존재이던 시절인데, 아버지가 집에 없었던 거였다. 또 다른 핵심 이유는 순전히 할매였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해서 친구들이 매일 찾아와 난리굿을 치는데도 꼬박꼬박 밥 지어 먹이고 라면도 끓여 줬다. 지금도 친구들은 할매에게 어머니, 어머니, 하며 제 엄마 따르듯 한다. 아무튼 우리는 당시 네 학교 똥통, 내 학교 똥통, 입씨름하며 키득거리곤 했다.

    그때부터 똥통이란 표현이 구수했던 나는 딸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즐겨 사용하곤 했다. 그러면 딸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곤 했다.

    “흥, 아빠 나온 학굔 뭐 똥통 아닌가.”

    내 학창 시절은 공고와 상고가 있고, 야간고가 싸움으로 이름을 날렸다. 청소년 세계에 낭만이 있었고, 공부만 하는 범생이는 또래에게 취급 받지 못하던 시대였다. 만화방에 들어가 무협지에 심취하고, 당구장을 기웃거리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걸핏하면 남학생은 주먹다툼 벌였고, 여학생끼리는 머리채 잡아 뜯었다. 용감한 아이들은 청계천 세운상가 구석에 가서 누런 갱지에 조잡하게 인쇄된 성인 만화책을 샀고 몰래 돌려봤다. 인터넷으로 성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하던 시대였다.

    세상 무서운 것 모르는 겁 없는 아이들은 교복 입은 채로 뒷골목에서 껌 씹고 침 뱉으며 담배 태웠고, 새우깡에 소주 마셨다. 좀 더 노는 아이들은 불량 학생으로 일컬어졌다. 패거리 이름을 누가 더 세게 짓나 경쟁하듯 다이너마이트, 타이거, 티엔티, 피닉스 따위의 명칭을 붙였다. 종종 패싸움도 벌였다. 어른들은 알아서 피해 다녔고, 교사에게 들키지 않으면 전설로 남았다. 남고생과 여고생이 미팅을 했고, 일일찻집을 해서 술값도 챙겼다.

    졸업식 날에 밀가루 뒤집어쓰고 교복 찢는 행위는 없어선 안 되는 신나는 통과의례였다. 후배들은 선배들을 위해 밀가루와 날계란을 준비했다. 청소년 세계를 모르는 일부 어른이 눈살 찌푸리긴 했으나, 사회적으론 용인됐다. 성장 과정의 작은 일탈로 생각했고, 추억과 낭만으로 받아들였다. 서슬 퍼런 학생부 선생도 그날만큼은 시비 걸지 않았다. 졸업생들에게 봉변당할까 싶어서 꼬랑지 내린 측면도 있었다.

    남고엔 여고 전설이 심심찮게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어디에 7공주파가 있는데 남학생이 걸려 작살났다더라, 걔네들은 면도날을 씹어 뱉는다고 하더라, 어느 여고와 어느 여고가 패싸움 벌였다고 하더라, 따위의 미확인 소문이었다. 소문을 타고 ‘3대 발광 5대 극성’ 전설도 함께 날아왔다. 여고 중 유별난 곳을 지칭한 거였다. 범생이 남학생이 오줌 지리며 멀찌감치 피해 갔던 3대 발광은 염광, 은광, 신광이고, 5대 극성은 덕성, 계성, 명성, 한성, 보성이었다. 학교 이름 뒤에 똥똥이란 수식어가 따르는 건 자연스러웠다.

    보성여고는 5대 극성에 속한 학교였다. 야간이 있어서였다. 실제론 그다지 극성스럽지 않았다. 모든 여학교에서 그러했듯 자기들끼리 머리채 쥐어뜯고 싸우며 우는 수준이었다. 한밤중 담장 옆으로 지나가는 남학생들에게 학교 옥상에서 물 뿌리고 깔깔대는 정도였다. 짓궂은 장난 수준이었다. 뒷골목에서 조금 놀았던 나와 친구들은 여러 번 물벼락 맞았고, 옥상을 향해 대거리하며 킥킥대곤 했다.

    “근데 아빠. 그 친구 얘기 듣고 걔가 자기 아빠한테 심하게 하는 모습을 생각했는데, 내가 얼마 전에 아빠한테 심한 소리 한 게 미안했어. 아빠 미안해.”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았어. 아빠가 잘못했지 뭐.”

    덤덤하게 대답했으나, 사실 그땐 열 좀 받았다.

    며칠 전이었다. 딸과 할매가 TV에 붙어 있었다. 연예인의 자식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난 심사가 뒤틀렸다. 북쪽은 3대가 권력을 잇고, 남쪽은 재벌이 3대를 잇고 이젠 연예인도 대를 잇나, 못마땅했다. 빈틈이 생기면 채널을 내셔널지오그래픽으로 돌리려고 기회를 엿봤다. 내가 수시로 즐겨 보는 채널이었다. 그러나 할매와 딸은 점점 깊숙하게 빠져 들었고 키득거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끝내 구시렁거렸다.

    “저게 웃기긴 뭐가 웃겨. 저거 다 대본에 있는 대로 하는 거야.”

    “아빠. 그냥 재미있게 보면 안 돼? 대본이 있어도 그게 다 외워서 되겠어?”

    화가 났는지 딸은 속사포를 쏘아붙이고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할매도 손녀를 편들며 일어났다. 나는 무안했고 딸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에이 가시나, 힘없이 내뱉곤 멀뚱멀뚱 리모컨만 만지작댔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3대 세습에 대한 짜증이 애먼 데로 표출된 거였다. 남쪽 재벌과 북쪽 권력의 3대 세습은 국민에게 짜증을 주는 반면, 연예인의 아이들은 웃음을 줬다.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분풀이하다 된통 혼난 거였다.

    학림사 방향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절까진 아스팔트, 이어서 계단이었다. 딸아이는 아스팔트를 재미없어 했고, 계단을 힘들어 했다. 구간마다 이름을 붙이자 했다. 계단은 수학 구간, 깐깐한 길은 역사 구간으로 명명했다. 수학은 지루하고, 역사 교사는 깐깐하다고 해서였다. 양지바른 휴식 공간은 여름방학 구간, 응달진 휴식 공간은 겨울방학 구간, 중반부턴 2학년 구간, 하면서 올랐다. 하산 길은 전체를 3학년 구간으로 명명했다. 산행 마무리를 앞두고 사고를 조심하자는 취지였다.

    딸애는 실제 하산 길에서 사고가 났다. 평범한 바위를 내려오면서 몸이 앞뒤로 휘청거렸고, 왼쪽 무릎을 부딪쳤다. 오래 걸어서 발바닥이 아프다고도 했다. 하산 길에서 끝까지 긴장을 늦추면 안 되듯, 3학년이 돼서도 그래야 한다고 당부했다.

    수락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정상 지대 매점에서 컵라면 1개, 생수 1통, 막걸리 1잔을 샀다. 매점 바깥 공터에 자리를 펴고 앉아 먹었다. 딸아이는 기분 좋다고 했다.

    “아빠, 나에겐 특징이 있는데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 친구하고 싸우고 나서 시간이 흘러 감정이 가라앉으면 항상 내 잘못인 것 같아. 그래서 친구에게 먼저 사과해. 다른 친구는 안 그러는데. 분명히 다른 친구가 잘못한 건데도 내가 먼저 그렇게 해.”

    근래에 딸은 한 친구와의 관계를 힘들어했다. 관악산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어떤 일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난 살면서 가장 기쁘면서 힘든 것이 인간관계야. 특히 절친한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너무 속상하지. 친구가 그러면 화내거나 싸우진 말고 너의 힘든 감정을 얘기해. 친구에게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상대방 배려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거라면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 봐. 살아가면서 별의별 사람을 만날 텐데 관계 훈련을 한다고 생각하고 말이야. 아빠도 그런 적이 많았는데 훈련한다 생각하고 관계를 조절했어. 그게 쌓이니까 웬만큼 까다로운 사람도 가벼워지더라고. 그런다고 미련하게 악착같이 버티면 안 돼. 네가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잠시 거리를 두거나 손을 놓아.”

    나는 조언했고, 딸을 격려했다.

    “먼저 사과하는 게 잘하는 거야. 바람직한 태도지. 먼저 사과했다고 친구 잘못을 뒤집어쓰는 것도 아니야.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 다 알아. 그러니까 먼저 사과하는 것은 지는 게 아니야.”

    딸애의 여린 성정은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물려받았다. 당신들은 바깥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 했다. 법 없이 사는 사람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래도 딸애는 내 피를 받아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나는 딸애의 증조할아버지로부터 격한 성격을 물려받았다. 평상시는 여렸으나, 정말 아니다 싶으면 거센 풍랑이 몰아쳤다. 쓰나미로 돌변해 쓸어버렸다.

    딸과 친구들의 상태가 궁금했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는 친구가 있어서 걱정이야. 근데 난 스트레스를 전혀 안 받아. 친구들이 너 고등학생 맞아? 하면서 이상하게 여길 정도야.”

    딸아이가 든든하면서 안심이 되었다.

    “혜정이는 교회로 학원으로 너무 바빠서 힘들어 해. 성심에 다니는 지영이는 교실에서 툭하면 노래하고 춤추며 친구들을 웃긴대. 미선이는 지영이랑 같은 반인데 친구가 없어서 힘들어 해. 반에서 친해지고 싶은 어떤 친구가 있는데, 걔는 미선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대.”

    지영과 미선은 보성여중 동창으로 각각 딸애와 친한데, 둘 사이는 아직까지 별로 친하지 않다고 했다.

    딸은 한 친구의 일화를 소개했다.

    “걔는 부모가 이혼해서 엄마랑 사는 한부모야. 근데 자기네 반에서 한부모 가정을 주제로 토론을 했대. 다른 애들이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너무 힘들 거다, 자살할지 모른다고 했대. 그래서 걔가 그것은 편견인 것 같아, 그 아이들도 잘 지낼 것 같아, 라고 반론했대. 그러니까 다른 애들이 걔한테, 네가 뭘 안다고 그러냐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걔가 아무 말도 안 했대. 한부모라고 밝힐 수도 없었대. 걔는 엄마랑 살면서 하나도 힘들어 하지 않는데 말이야.”

    딸아이와 나는 대한민국 인권 지수가 낮다는 것에 공감했다. 한국 사회는 한부모 가정뿐만 아니라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여성 등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몽매한 사회였다. 지역과 직업에 대한 편견도 심했다. 사농공상 차별하고 남녀노소 차별한 유교의 뿌리가 깊었던 까닭이었다. 다양한 민족의 피가 섞인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한 단일민족 이데올로기의 허구도 한몫했다. 구성원을 획일적으로 줄 세우는 군사 문화의 잔재였다. 연대 가치를 경시하고 경쟁에만 몰두하는 작금의 체제가 심화시키고 있었다. 개인의 다양성을 소홀히 취급하고 집단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교육정책에서도 연유했다.

    “아빠. 나는 다른 삶에 대해 편견 안 가지고 살게.”

    “암, 당연히 그래야지.”

    딸내미가 장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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