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 중학교를 졸업하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④] 웃음
        2017년 01월 13일 02: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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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바보 입시산 동행기> 전 회의 글 ‘산길과 공부와 인생’

    2월 6일, 졸업 선물 없는 빈손이었다. 보성여중 강당은 입구에서부터 축하객들로 빡빡했다. 아이들은 졸업 가운에 학사모를 쓰고 줄지어 앉아 재재거리고 있었다. 표정에 졸업의 미련 같은 건 없었다. 밝고 활기찼다. 졸업식 안내지를 훑었다. 자매부대장상 한수민, 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이가 태어난 뒤, 돌림자 이름 ‘수민’과 순우리말 ‘누리’를 함께 지었다. 가족관계 등록부엔 수민으로 등재했고, 집에선 누리라 불렀다. 우리말 이름을 지을 때 국어사전을 뒤졌다. ‘한’은 ‘큰’이나 ‘정확한’ 또는 ‘한창인’, ‘같은’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다. 누리는 세상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단으로 묶은 곡식과 장작을 차곡차곡 쌓은 더미를 뜻하는 가리의 옛말이자 사투리다. 노을의 사투리고 유리의 사투리요 우박의 동의어다. 북한에선 사슴·살쾡이·범 따위에서 큰 종에 속하는 짐승을 누리라고 한다. 나는 한누리를 큰 세상이란 의미로 취했는데, 아이가 자라서 제 나름의 의미를 취할 수 있겠다는 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졸업식장은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으로 왁자했다

    졸업식장은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으로 왁자했다

     

    첫 순서는 아이들의 사진 상영이었다. 아이들 각자가 제출한 추억의 사진을 편집한 영상이었다. 누군 아기 사진이고 누군 유치원 사진이고 누구는 초등 사진이었다. 딸은 철봉에 매달린 사진을 제출했다. 중학교 3년 과정의 각종 행사 사진도 영상으로 편집되어 상영됐다. 아이들은 술렁대며 깔깔거렸다. 국민의례에 이어 기도와 성경 봉독 따위도 진행했다. 기독교 학교였다. 아이들은 재미없어 했다. 나도 재미없었다.

    본격적으로 잔치가 시작됐다. 졸업장 수여식이었다. 한 반 한 반, 번호 순으로 193명의 졸업생을 모두 불렀다. 아이들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연단에 올랐다. 3년을 무사히 마쳤다는 값진 증표였다. 축하객들은 제 아이가 단상에 오를 때마다 자리를 바꿔가며 사진 찍느라 분주했다.

    시상식이 있었다. 나는 놀랐다. 많은 언론에서 요즘 학생은 입시 경쟁 때문에 우정도 쌓지 못한다고 개탄하는 기사를 썼다. 막연하게나마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시상식은 시샘의 시간이 아니었다. 수상자가 호명되면 박수치고 연호하며 괴성을 질렀다. 친구가 단상에 서면 소리쳤다.

    “멋있다!”

    시상자의 키가 작아도 소리 질렀다.

    “네가 그 아저씨보다 더 크다!”

    미사여구 수상 이유가 낭독되면 놀렸다.

    “그게 아니지! 우우.”

    그렇게 박장대소하며 축하했다. 아이들은 건강했다. 문제는 아이들에게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였다. 방치하고 편승하는 어른이었다. 어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웠다.

    사진2, 아이들은 눈 덮인 교정에서 장난치며 졸업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누리, 유진, 득영, 세은

    아이들은 눈 덮인 교정에서 장난치며 졸업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누리, 유진, 득영, 세은

    집에 들러 짐을 풀고 시내로 나갔다. 한국에서 외식이 빠지면 졸업식은 ‘앙꼬 없는 찐빵’이었다. 간밤에 모녀는 한 샐러드 바를 점찍었다. 한데 예약을 받지 않는다 했다. 졸업식이 겹친 날이었다. 명동점에 갔다 종로점으로 옮겼다 하면서 기다렸다. 결국 3시가 다 돼서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아이는 할매에게 사랑한다고 했다. 아기 때부터 제 할머니가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돌봐 준 극진한 정성을 아이는 알고 있었다. 집에서 할매는 빨래 도둑이었다. 할매는 위층에 기거하고 나머지는 아래층인데, 새벽마다 내려와 빨랫감을 챙겨 올라갔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만류해도 소용없었다. 아래위를 수시로 오가며 쓸고 닦고 빨고 음식하고, 그래도 일거리가 없으면 멀쩡한 신발과 가방과 모자 따위를 빨았다.

    농사꾼의 맏딸로 태어난 할매는 당시의 여성 대부분이 그러했듯, 학교 문턱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예닐곱 무렵부터, 들에 나간 부모를 대신해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했다. 농사일 거들고 동생들도 돌봤다. 결혼해서도 신산한 삶은 변하지 않았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떴다. 늙어선 사회 활동 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대신해 손녀를 키웠다. 평생을 뒤치다꺼리만 하며 살아온 할매였다.

    “이렇게 가족이 어울리니까 참 행복해. 나는 작은 것에도 자주 행복을 느껴. 어떤 때는 할머니랑 엄마아빠랑 TV를 보다가도 행복을 느껴.”

    아이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쉼 없이 조잘댔다. 아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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