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재 환자의 1/13만이 산재 신청
    [나의 현장] 여전한 산재처리와 실업급여의 사각지대
        2012년 08월 13일 01: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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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모씨(남, 49세)는 도시가스 고객센터에서 일했다. 그가 했던 일은 도시가스 배관을 설치하거나, 수리하거나, 폐쇄하는 일, 그리고 매달 가스계량기를 검침하는 일이었다. 계량기 검침업무를 나가는 날이면 반나절에 적으면 10집, 많으면 30집 이상을 다녀야 했다.

    그날 맡은 구역을 그날 끝내지 않으면 일은 계속 밀리고, 다른 직원에게 일을 넘기거나 상사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리고 이모씨가 일하는 시간, 모든 직장인이 출근한 낮시간에는 사람이 없는 집이 많다.

    정상적인 업무절차에 따른다면 벨을 누르고, 대답이 없으면 안내문을 붙이고, 연락을 기다리거나 재차 방문하고, 몇 차례 방문에도 연락이 안 되면 경고문을 붙인 뒤 가스를 끊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절차를 모두 지키면서 정해진 구역의 검침을 정해진 기간 내에 완료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모씨가 속한 영업소에선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 계량기가 집 안쪽에 설치된 곳이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계량기가 건물 외벽에 설치된 단독주택이나 다세대 주택의 경우 담장 위에 올라가서 보거나, 담장을 넘어야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주거침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모씨와 그의 동료직원들은 관례에 따랐을 뿐이고, 그것이 불법일지 모른다는 인식도 하지 못했다.

    4월 어느 날, 이모씨는 계량기 검침 중 담장에서 뛰어내리다 넘어졌다. 그다지 높지 않은 담장이었지만 자갈을 밟고 발을 헛디뎠다. 허리와 다리를 다쳤다. 그는 평소 아픈 곳이 있어도 웬만하면 내색하거나 병원에 가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번에도 병원에 가지 않았고 파스로 통증을 달래며 매일 출근을 했다. 넘어지는 장면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 동료 직원들에게 모두 말했고, 그들도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간 직원들이 힘든 일을 나누어서 해줬다.

    이모씨가 사고를 당한 현장, 담장위에 오르지 않으면 검침이 불가능하다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산재처리를 꺼리기 마련이다. 산재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나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것도 아니다. 산재보험 미가입 상태에서 산재가 발생하면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보험급여의 50%를 사업주에게 징수하도록 되어 있지만 많은 사업주들은 그 이상의 금액을 들여서 직접보상, 소위 ‘공상처리’를 하는 것을 선호한다.

    산재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경우 30인미만 사업장은 산재사고가 발생해도 보험료가 인상되지 않지만, 그저 막연히 사업장에서 사고가 난 것을 관에서 아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일하다 다쳐도 사용자에게 산재 이야기를 하기 부담스럽다. 병원에서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은 이모씨가 산재처리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3개월 뒤 그는 해고당했다. 다친 것 때문에 해고당한 것은 아니었다. 실업급여라도 받게 해달라고 회사측에 요청했으나 회사에서는 해고통보 당시 말다툼 와중에 이모씨가 ‘나가라면 나가겠다’고 말한 것을 빌미로 고용보험 자격상실신고의 사유를 ‘자발적 퇴사’로 처리했고, 그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었다.

    사실 실업급여는 회사에서 받게 해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대한 귀책사유로 해고되거나 자발적으로 사직한 것이 아닌 이상, 180일 이상 고용보험에 가입한 모든 피보험자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다만 고용보험 상실신고는 회사가 하고, 그 사유를 회사가 입력하므로 얼마든 ‘장난’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그리고 회사는 이걸 빌미로, 마치 자신들이 실업급여 지급의 결정권을 가진 양 행동한다.

    이모씨는 통증 때문에 활동에 제한이 있었다. 새로운 직장에 취업하기 어려웠다. 뒤늦게 산재처리를 요구했지만 마찬가지로 묵살 당했다. ‘당신이 다친 걸 본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제야 이모씨는 노무사를 찾았다.

    이모씨와 상담을 하다보니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사고현장을 목격한 증인도 없고, 남의 집 담장을 오르는 것이 ‘정상적인 업무 수행’에 포함된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웠다. 관례적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를 증언해줄 동료직원들은 여전히, 직장에 매인 몸이고 영업소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었다. 회사는 사고발생을 부인할 것이다.

    산재보험을 관장하는 근로복지공단의 행태는, 보험료를 지급하지 않기 위해 보험조사원을 고용하는 민간보험회사와 비슷하다. 이모씨처럼 꼬투리를 잡을만한 일이 한 두 개가 아닌 경우라면 산재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노무사가 확실한 답을 주리라 기대했던 이모씨는 이런 얘기에 적잖이 실망한 듯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영업소장이 실업급여를 받게 해주는 조건으로 산재신청과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포기하라고 요구했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렇게 사건은 끝났다.

    2006년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은 산재환자는 100만1445명이었다. 반면, 그해 산재보험 신청 건수는 7만9675건이었다.(임준, ‘국가안전관리 전략수립을 위한 직업안전 연구’) 전체 산재환자 가운데 약 1/13만이 산재 신청을 한다는 뜻이다. 근로복지공단은 매년 1조원 안팎의 흑자를 내고 있으며, 적립금이 6조5천억에 이른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1년 산업재해율은 0.65%로, 통계집계이후 가장 낮은 수치였다고 한다. 그 0.65%엔, 이모씨같은 사람은 포함되지 않는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산재를 신청하는 노동자가 전적으로 져야했던 산재입증책임을 사업주와 국가도 부담하도록 하는 방안의 권고안을 제출했다.

    권고안이 입법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미지수겠지만, 민간보험사처럼 매년 1조원의 흑자를 자랑처럼 여기는 근로복지공단의 태도가 바뀔지도 의문이지만,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야당이 다수당이고 여야의 대표적 노동운동출신 의원들이 있다니까, 그래도 좀 바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모씨 같은 사람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필자소개
    노무법인 기린 대표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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