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에서 공감·연대로
    '죽 쒀서 개 주지 않기 위하여'
    주요 감정을 통해 본 촛불의 권력관계와 전망
        2016년 12월 26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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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기고문(‘성급한 급진성보다 모두의 한 걸음 모색할 때’)에서 현 시국의 촛불집회의 성격을 2014년 세월호 사건과 비교해 분석했다면 이번에는 촛불의 배경이 되는 현재의 권력구조와 9차까지 진행된 집회의 결과를 ‘감정’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겠다. 감정을 주요한 분석 도구로 삼는 까닭은 사회구조를 반영해 행위를 유발하는 직접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죽 쒀서 개 주는 것”을 거부하는 분들이 촛불 이후를 전망하고 계획하는 데 다소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번 촛불은 정치권력의 정점인 박근혜 1인과 상위 1% 권력 간에 생긴 균열을 바탕으로 다수의 분노가 점화된 결과 박근혜 지지율을 중심으로 5 대 95라는 정치 구도가 만들어졌다. 현 시점의 권력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촛불

    11월 광화문 촛불집회 방송화면

    공포 대 분노의 대결

    첫째, 박근혜와 최순실의 등장으로 권력을 신규로 획득했거나 지속적으로 유지 또는 강화한 집단이다. 전자에는 ‘친박’, 후자에는 ‘재벌’ 등이 속한다. 이들의 현재 욕망은 ‘안 뺏기려는’ 것이며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공포’이다.

    둘째, 권력을 계속 누려왔으며 새로운 정치 상황에서도 권력을 유지하려는 기회주의적 집단으로 ‘비박’ 등이 속한다. 이들의 욕망도 ‘안 뺏기려는’ 것이며 주요 감정도 첫째 집단과 같은 ‘공포’이다.

    셋째, 권력을 계속 누려왔으나 박-최에 의해 배제된, 즉 ‘이번에 뺏긴’ 집단으로 조선일보와 종편 등이 해당한다. 이들의 주요 감정은 복수심이다.

    넷째, 상시적으로 권력에서 배제됐던 집단으로 촛불의 주요 참여자들이 해당한다. 인원은 가장 많지만 ‘가져본 적 없는’ 이들의 주요 감정은 배신감이다.

    다섯째, 상시적으로 권력에서 배제됐을 뿐만 아니라 ‘가질 전망을 가져본 적도 없는’ 집단으로 노숙자 등 사회 주변부가 해당한다. 이들의 주요 감정은 ‘무관심’으로 이번 촛불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광장에서도 배제된 집단이다.

    이번 촛불에 처음부터 긍정적인 집단은 셋째와 넷째이며 둘째의 기회주의자들이 중간에 합류했다. 촛불집회라는 저항행위가 일어나려면 분노가 공포보다 커야 한다. 우선 200여만 명을 광장으로 나오게 한 거대한 분노는 넷째 집단인 다수대중의 박근혜에 대한 배신감이 그간 누적된 불만과 체념을 점화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책임으로 간주돼온 저임금․실업 등의 실패가 “그래, 너․너희 때문이었어”라는 자각 속에 분노로 전화한 것이다. 동시에 공포가 축소되는 데에는 종편 등의 셋째 집단이 공권력을 후퇴시키는 것으로 가담했다. 일시의 제한적인 승리마저도 고스란히 시민의 몫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밖에 세월호, 백남기 사건 등의 선행경험이 분노의 격화와 공포의 약화 양쪽에 기여했다.

    권력 일반에 대한 ‘상전 경험’

    결국 국회의 탄핵소추를 이끌어낸 지금까지의 촛불 결과는 한 마디로 ‘상전 경험’으로 집약할 수 있다. 4․19와 6월항쟁의 경우 통치권자를 물러나게는 하였으나 지금처럼 야당까지 포함한 정치권력 일반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한 일은 처음이었다. 국민들이 그야말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정치권력 전체에 대해 상전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상전 경험은 집단적인 시민 역량을 확인하는 일이었으며 국민 개개인에게는 주체 확인, 주권자 경험을 제공했다. 광우병에 이어 세월호 때는 일반시민들이 소위 전문시위꾼들에게 “깃발 내려”를 외쳤다면 이번에는 가히 깃발의 향연이라 할 만할 정도로 온갖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과거 두 시위에서 정치성을 배제하자고 외쳤던 사람들이 거꾸로 각자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결과이다.

    깃발로 표현된 광장의 주장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한쪽 끝에 <사법시험 존치모임>이 있다면, 다른 끝에는 <형제복지원 생존자 모임>과 <용산참사 가족모임> 등이 있다. 전자가 이번 촛불의 직접적 이유 중 하나인 “공정”을 대변한다면 후자는 배제된 사람들의 “생존권”과 그것을 억압한 “국가폭력”을 의미한다. 두 주장은 이번 촛불의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광장의 주장이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만 촛불은 박근혜에 반대하는 95%와 동일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1차적으로는 촛불이 그 선에서 머물기를 바라는 보수언론의 보도 때문이지만 비박과 다르지 않은 야당의 행태도 한몫 하고 있다. 광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촛불 전이나 지금이나 다수를 하나로 엮는 상징은 여전히 애국가이다.

    애국가와 태극기 넘어서야

    촛불의 결과를 95%의 오른쪽 다수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면 애국가를 넘어서야 한다. 애국가라는 상징의 의미는 단일하지 않다. 태극기도 마찬가지다. 어버이연합도, 더불어민주당도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는 보수 집회 때문에 두 상징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는 점만이 다행이다.

    연말 10차 집회까지 연인원 1천만 명의 에너지를 쏟아 부은 결과가 애국가와 태극기로 표명되는 ‘통치체제의 안정’과, 박근혜에 반대하는 95%의 이해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권력관계를 살피고 그에 맞는 대처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위에서 첫째와 둘째의 ‘안 뺏기려는’ 집단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공포의 유지 또는 강화가 필요하다. 또 복수심에 불타 뺏긴 권력을 되찾으려는 셋째 집단은 이탈을 방지하거나 이탈 속도를 늦춰야 한다. 이들 집단은 이미 ‘촛불의 변질’ 등을 언급하면서 출구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압박의 초점은 셋째 집단에 맞춰져야 하는데 공포 확산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제라도 촛불의 반정부성과 폭력성을 빌미로 공권력을 강화하고 금지선을 후퇴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광장의 주요 참여세력인 넷째 집단, 즉 다수 대중의 과제는 지속적인 저항, 그리고 촛불 의제의 구체화․급진화이다.

    우선, 지속적인 저항을 위해서는 공포의 재발을 방지하고 분노를 강화해야 한다. 공권력의 금지가 다시 강화되더라고 그것을 넘는 분노가 있어야 한다. 현재 95%의 국민과 200여만 명으로 표현되는 광장의 촛불은 ‘다중’에 해당한다. 박근혜에 대한 배신감을 넘어 공포를 이겨낼 분노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다중의 몰계급성이 해소되고 계급이해가 가시화돼야 한다. 삼성의 국민연금 전횡 등을 통해 재벌과 정경유착의 실상을 알리는 한편 원전의 위험성, 경쟁의 허구성, 정권의 반농․살농 정책 등을 폭로해 소시민과 노동자 농민의 계층․계급적 이해를 꾸준히 환기시켜 나가야 한다.

    공감 위한 비전 제시 필요

    다음으로 도덕감정과 공감, 연대의 고리에 주목해야 한다. 공포와 분노, 슬픔이 현재의 갈등을 반영하는 감정이라면 갈등을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도덕감정이 필요하다. 전자가 현재에 매인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후자인 도덕감정은 시간의 지평을 확대해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감정이다. 애국가와 태극기가 표방하는 ‘통치체제 안정’이나 ‘애국심’을 넘어서는 비전의 제시가 필요하다. 다수가 그 같은 비전에 공감할 때 구체적 결실을 향한 ‘연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번 촛불에서 다수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도덕감정은 ‘공정’이라고 판단된다. 공정을 비롯해 광장의 촛불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도덕감정과 구호가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구호는 “잘살아 보세”이다. 여기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에 새마을운동도 가능했고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가능했다.

    도덕감정의 발견 또는 발명에 이어 최소강령의 구체화가 필요하다. 최소강령은 이번 촛불의 마지노선이자 불가역적인 목표를 의미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많은 게 바뀌길 기대했으나 인권과 민주주의 대부분에서 오히려 후퇴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퇴하지 않은 단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직선제 대통령 선출이고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군부가 정치권력에서 퇴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태우의 “보통사람” 슬로건으로 확인된 군부정치의 청산은 1987년의 마지노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김영삼의 하나회 척결이 가능했던 바탕에는 더 이상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국민정서가 있었다.

    최소강령을 ‘촛불선언’으로 구체화

    이처럼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최소강령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최저가 아니라 반드시 확보해 결코 물러나서는 안 되는 마지노선을 정해 정치권력에 강제하는 한편 전 국민적 동의를 얻어나가야 한다. 최소강령을 구체화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으로 “촛불선언”을 제안한다.

    다음은 최대강령이나 급진성 또는 변혁적 과제에 대한 고민이다. 이번 촛불은 그 자체로 혁명적 성격을 띠지 않는다. 위의 다섯째 집단인 주변부의 무관심이 의미하는 바가 그렇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사를 통틀어 노숙인과 도시부랑자 같은 주변부의 참여는 봉기와 급진성의 징후였다.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불량배’ 또는 ‘밥풀떼기’로 불렸던 이들의 불참은 이번 촛불의 보수적 성격을 대변한다.

    비록 실패와 반동으로 이어지기는 했으나 1991년 5월 투쟁은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도 가질 수 있다는 ‘급진적’ 전망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이번 촛불은 계기와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그 같은 급진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촛불의 결과도 당연히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의욕적 주장 담을 그릇 필요

    촛불의 계기와 과정은 보수적이지만 사람들이 바뀌고 있다. 아니, 이미 바뀐 것이 지금에서야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에 대한 불신이 정치권 전반에 대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언론의 위시하여 사회 전반의 권위가 부정되고 있다. 거꾸로 처음으로 확인한 주권자 경험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져 김기춘의 과거를 캐고 우병우의 소재를 제보하는 데 이르고 있다.

    국회의원과 언론이 시민들의 제보에 사활을 걸고 있으며 네티즌 자로의 동영상 하나에 다수가 성탄절 저녁을 기꺼이 헌납했다. 유사 이래 가장 의욕이 충만한 시민들의 등장이다. 이들이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되 나의 우리의 힘을 믿어 행동하고 있다.

    급진성과 변혁을 위한 섣부른 주장보다는 의욕적인 시민들의 주장을 담을 그릇이 더욱 절실하다. 진보와 변혁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 나와야 한다. ‘와글’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 시민들의 자신감은 전문가나 명망가의 권위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삶에 바탕을 둔 힘 있는 주장들이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릇이 필요하다. 전문가와 명망가를 포함해 좀 더 경험 있고 기술 가진 사람들이 고민해야 할 것을 그러한 그릇을 만드는 일이다.

    필자소개
    대학과 대학원에서 차례로 역사학과 행정학과 정치학을 전공했고 주요 연구 분야는 정치사회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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