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책소개] 《지연된 정의》(박상규. 박준영/ 후마니타스)
        2016년 12월 24일 07: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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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

    1999년 2월 6일 발생. 수사 과정에서 폭행, 욕설 등 가혹 행위 및 허위 자백이 있었음. ‘삼례 3인조’가 범인으로 지목됨(임명선 징역 5년 6개월, 강인구, 최대열 각각 징역 3년 6개월). 1999년 4월 진범에 대한 제보가 있었고, 2000년 부산지검에서 유력 용의자 세 명을 수사했으나, 사건을 이관 받은 전주지검에서 ‘혐의 없음’ 처리. 2015년 3월 재심 청구서 접수. 2016년 7월 재심 개시, 10월 28일 ‘삼례 3인조’에게 무죄 선고.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

    2000년 8월 10일 발생. 최성필(가명) 체포. 불법체포와 감금이 있었음. 2심 재판에서 자신이 살인했다고 허위 자백(징역 10년 선고). 2003년 유력 용의자 김 씨에 대한 수사가 있었으나, 전주지검에서 ‘혐의 없음’ 처리. 2013년 4월 재심 청구서 접수. 2016년 11월 17일 무죄 선고. 같은 날 용인에서 유력 용의자 김 씨 체포. 12월 6일 전주지검 군산지청이 김 씨를 강도 살인 혐의로 재판 회부.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 :

    2000년 3월 7일 발생. 친부 살해 혐의로 김신혜 체포. 영장 없는 불법 압수 수색, 공문서 위조 등이 있었음. 2015년 2월 재심 청구서 접수(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 11월 18일 재심 결정(복역 중인 무기수 재심으로는 한국 사법 역사에서 최초). 경찰이 위법 수사를 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는 법원 입장. 검찰의 항고로, 현재 광주고등법원에서 재심 개시 여부 판단 중. 2016년 12월 현재 무기수 복역 중.

    지연된 정의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죄를 인정하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행동을 합리적인 잣대로 이해하고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경찰의 폭행을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을 했더라도 그것이 엄청난 잘못임을 왜 몰랐을까?’ ‘범인이 아니어서 억울하면 왜 상고하지 않았을까?’ ‘3심 제도와 국선변호인 제도가 있는데 왜 중간에 포기했을까?’ ‘다른 범죄도 아니고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끝까지 결백을 호소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는 재심 사건의 당사자들이 검찰 조사 및 법정에서 숱하게 맞닥뜨린 벽인 동시에, 이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의문이기도 하다.

    《지연된 정의》에서 다루고 있는 삼례 나라슈퍼 강도 치사 사건의 세 주인공,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의 최성필(가명) 씨, 친부 살해 혐의를 받아 무기수로 복역 중인 김신혜 씨 모두 보호자나 변호인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경찰은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물증이나 단서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피의자들을 의심했고, 별다른 근거 없이 의심을 확신으로 키웠다. ‘확신의 함정’에 빠져 법과 원칙을 어긴 수사를 했다.

    검찰은 경찰의 위법 수사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심지어 진범임이 유력해 보이는 피의자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풀어 주는 등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국선변호인은 허위 자백을 유도하거나 강요했다. 그리고 법원은 사건 기록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유죄를 선고했다. ‘왜 당신들은 허위 자백을 했느냐?’고 피해자들에게 묻기에 앞서,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을 향해 ‘이들의 허위 자백은 어떻게 나왔을까?’라고 문제 제기하는 것이 우선이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수사하고, 신중하고 겸손하게 재판을 해야 하는 것은 인권 보호 때문만이 아니라, 그래야만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억울한 사람들에게 다시(혹은 처음) 주어지는 기회

    재심은 확정된 판결에 대하여 사실 인정에 중대한 오류가 있는 경우에 당사자 및 기타 청구권자의 청구에 의하여 그 판결의 당부(當否)를 다시 심리하는 비상수단적인 구제 방법을 말한다.

    _두산백과사전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전문 변호사’로 잘 알려져 있다. (2007년 발생한 ‘수원 노숙 소녀 상해 치사 사건’을 비롯해) 그가 수임한 재심 사건들은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삼례 사건과 익산 사건에서 누명을 쓴 이들 모두 재심을 거쳐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어떤 재심 사건에도 ‘좋은 결과’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하나같이 길었다. 사건 발생 당시 18~20세였던 ‘삼례 3인조’는 짧게는 3년 6개월, 길게는 5년 6개월까지 복역했고 17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익산 사건 발생 당시 15세였던 최성필 씨는 1심에서 미성년자에게 내릴 수 있는 법정 최고형(15년)을 받았고, 2심에서 허위 자백하고서야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9년 넘게 복역했고 누명을 벗은 것은 16년이 지난 뒤였다. 김신혜 씨는 복역 중인 무기수로는 최초의 재심 결정 사례가 되었지만, 검찰이 1심 결정에 항고해 현재 광주고등법원이 재심 개시 여부를 판단하고 있기에 여전히 무죄 여부를 다투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시간은 어떻게 해서도 보상될 수 없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시국 사건이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정치 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의 재심은 힘들게 진행된다. 사법부는 ‘법적 안정성’을 이유로 재심에 인색하고, 여론은 일반 ‘서민들 범죄’의 인권유린 사례에 대체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한국 사회에서 형사 사법 피해와 관련해 진보와 보수,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지적장애인, 저학력자, 가난한 사람의 삶과 인권유린 현장의 구체적 사례를 무겁게 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이들이 겪는 인권유린과 부당한 대우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한편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니 그런 대우를 받을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수사기관, 법원 등의 잘못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한편, 어쩌면 우리 모두가 냉정하게 사회적 약자들을 차별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되묻게 한다.

    용서를 구할 용기

    헌법이 정한 바대로, 이 사건 피고인들이 존엄한 인간으로 대우를 받았나요? 행복추구권은 보장받았나요? 이들이 법 앞에 평등했나요? 오히려 역차별을 받지는 않았나요? 국가는 장애가 있거나 미성년자였던 이들, 그리고 이들의 가정을 어떻게 보호했나요?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 검사, 그리고 재판을 했던 판사는 이들에게 봉사자였나요? 이들에 대한 책임을 진 사실이 있나요?

    _박준영 변호사의 삼례 나라슈퍼 강도 치사 사건의 최종 변론 중에서

    잘못된 판결이 미치는 영향은 누명을 쓴 이들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살인 및 치사 사건 피해자의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 못지않게, 죄 없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벌을 받는 데 대한 죄책감을 토로한다. 죗값을 치르지 않은 진범들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기회를 얻지 못해 괴로워한다.

    2000년 자수했을 때 “밤마다 할머니가 죽어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등 수많은 죄책의 밤을 지새웠습니다. 사망한 할머니, 유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진술한, 삼례 사건의 진범 이 모 씨가 이후 재심 법정에서 자신의 범행을 증언한 것도 그런 괴로움을 떨치기 위해서였다. 그는 삼례 3인조, 피해자, 유가족을 직접 만나 사과했다. 피해자의 무덤을 찾아 참회하기도 했다. 진범을 만난 피해자들은 그 용기에 고마워하며 그를 용서했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찾아가 사과한 이는 이 사건의 진범이 유일했다. 가짜 살인범을 만들고, 자백한 진범을 풀어 준 과정에 수많은 공권력이 관여되어 있다. 이 사건은 대법원 판단도 두 차례나 있었다. 그럼에도 경찰, 검사, 판사 그리고 국선변호인까지 어느 누구도 직접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다른 재심 사건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책임져야 할 이들의 책임을 집요하게 촉구한다. 용기 있는 반성과 사과야말로 변화의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대문 밖’에서 길어 낸 심층 재심 르포

    대개 형사사건 재심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기약 없이 진행된다. 사법부가 확정판결을 내린 사건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를 수집해야만 재심 청구가 가능하기에, 변호인이 들여야 하는 품은 일반 사건보다 많다. 게다가 주로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이 대상이어서 수임료를 기대하기 어렵다. 박준영 변호사가 ‘재심 전문 변호사’라고 불릴수록 ‘파산 변호사’가 되어 간 이유이기도 하다. 낱낱의 재심 사건을 진행할 동력을 얻으려면, 좀 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재심 절차 및 실태의 문제점을 이슈화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아래 이 책은 기획되었다.

    이 책을 주로 집필한 박상규 기자는 2년 남짓 박준영 변호사와 함께 활동하면서 만난 재심 사건들의 경찰・검찰 수사 기록, 공판 기록, 재심 기록을 읽고 관계자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복잡한 퍼즐을 맞춰 나갔고, 그 과정을 흥미로운 르포로 엮어 냈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재심’의 현주소와 그 의미를 심층적으로 파고든 덕분에, 이 책은 이 분야에서 전범이 될 만한 기록문학이 되었다.

    그가 10년간 다닌 언론사를 그만두며 ‘서울 사대문 안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듣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살아 있는 기사를 쓰겠다.’고 했던 다짐은 《지연된 정의》로 작은 결실을 맺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재심 프로젝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 사회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사건’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파산 변호사와 백수 기자의 지난 2년이 우리 사회에 던진 화두는 여전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폭행・협박・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에 의하여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 또는 정식재판에 있어서 피고인의 자백이 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

    _<대한민국헌법> 제12조 7항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으로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

    _<형사소송법> 제309조

    재심은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이유가 있는 경우에 유죄의 확정판결에 대하여 그 선고를 받은 자의 이익을 위하여 청구할 수 있다.

    1. 원판결의 증거된 서류 또는 증거물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위조 또는 변조인 것이 증명된 때
    2. 원판결의 증거된 증언, 감정, 통역 또는 번역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허위인 것이 증명된 때
    3. 무고로 인하여 유죄의 선고를 받은 경우에 그 무고의 죄가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
    4. 원판결의 증거된 재판이 확정재판에 의하여 변경된 때
    5. 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무죄 또는 면소를, 형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형의 면제 또는 원판결이 인정한 죄보다 경한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
    6. 저작권, 특허권, 실용신안권, 의장권 또는 상표권을 침해한 죄로 유죄의 선고를 받은 사건에 관하여 그 권리에 대한 무효의 심결 또는 무효의 판결이 확정된 때
    7. 원판결, 전심판결 또는 그 판결의 기초 된 조사에 관여한 법관, 공소의 제기 또는 그 공소의 기초 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 단 원판결의 선고 전에 법관,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에 대하여 공소의 제기가 있는 경우에는 원판결의 법원이 그 사유를 알지 못한 때에 한한다.

    _<형사소송법> 제420조(재심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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