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부동냥과 선행학습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②] 고등학교
        2016년 12월 23일 11: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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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아빠와의 산행 기억하길’ 링크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겨울방학 직전이었다. 밤늦게 퇴근해 거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딸이 튀어나왔다. 뭔가 자랑하고픈 일이나 특이한 경험을 했을 경우에 으레 벌어지는 풍경이었다. 오늘은 무슨 보따리를 풀어 놓으려나. 귀를 열고 신을 벗으며 등에 걸친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빠, 아빠, 있잖아. 나 뽑혔다.”

    딸은 들떠 있었다. 딸이 입학할 보성여고에서 같은 재단의 중학교 졸업생 20명을 성적순으로 선발했단다. 그리곤 방학 중에 고교 1학년 1학기 과정의 수학과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들뜬 딸과 달리 내 표정은 굳어졌다. 선행 학습은 입시 경쟁 탓이었다. 제 자식이 뒤처질까 불안한 학부모의 심리가 사교육을 키웠고, 사교육은 공교육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간편한 방법으로 선행 학습을 택했다. 학교는 정해진 교과 과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가르치는데, 학원은 과정을 무시하고 미리 가르쳐 버렸다.

    선행 학습은 공교육을 망쳤다. 학원에서 진도를 미리 뽑은 학생은 반복되는 학교 수업에 대체로 흥미를 잃었다. 학원에 의존하는 학생은 교사의 권위를 부정하기도 했다. 교사는 선행 학습을 한 학생과 하지 않은 학생을 혼자서 동시에 만족시킬 순 없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선행 학습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것을 학교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20명만 선발하는 것은 평등 교육에도 위배되는 행위였다. 내 소신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어찌 학교에서…….” 하지만 나는 우물우물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

    아이가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의 어느 날이었다.

    “애가 계속 조르는데…….”

    아내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또 심하게 보챈 모양이었다.

    딸은 학교 수업에서의 집중력과 자기 주도 학습을 통해 공부 욕구를 채우는 학생이었다. 한데 2학년 여름방학부터는 수학 학원에 보내 달라고 제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내게도 졸랐다.

    “학원은 뭔 학원이야. 혼자 공부해. 대학 안 가도 세상 잘 살아가는 방법이 있어. 그리고 학원에 길들여지면 공부 방법을 놓쳐.”

    사교육을 반대하던 나는 완고하게 말했다. 딸아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돈이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아이는 말문이 막힌 듯, 더는 고집을 피우지 못하고 뾰로통해서 물러섰다. 그렇다고 요구를 완전히 꺾은 건 아니었다.

    “친구들은 전 과목을 한다고. 안 그런 아이들도 최소한 국·영·수는 한다고. 학교 수업만으론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단 말이야.”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요구했다.

    “정말 속상해. 학원 보내 줘.”

    울먹인 날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턴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포기했나 싶었다. 한데 아니었다. 아빠에겐 백날 말해 봐야 소용없다고 느낀 때문인지, 내게만 닫은 거였다. 제 엄마에겐 주기적으로 조르고 있었다. 한계에 봉착한 아내가 말문을 연 거였다.

    “실제로 수학은 혼자 공부해선 힘들어.”

    나는 지쳤고, 한편으론 딸이 안쓰러웠다. 돈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나 참, 그럼 보내면 되지. 학원비 얼만데?”

    아내는 쫑긋했다.

    “알아봤더니 23만 원이래. 돈 만들어 올 수 있어?”

    “아니, 무슨 한 과목이 그렇게도 비싸?”

    나는 기가 막혔다. 10만 원 안팎을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 물정을 그렇게도 몰라? 그것도 싼 거야.”

    “휴우-.”

    아내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고, 나는 한숨만 쉬고 말았다. 당시 우리 네 식구 생활비는 월 160만 원이었다. 내가 그것밖에 가져다주지 못했다. 아내는 월급 개념이 없는 동네 풀뿌리운동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작심하면 주변에 손 벌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생계비도 아닌 학원비로 매달 23만 원은 아니었다.

    그 뒤 난 몇몇 지인에게 푸념을 토로했다.

    “학원 다니면 안 되는데 자꾸만 보챈다. 돈도 없는데 그런다.”

    내 얘기를 들은 이들은 한결같이 아이가 원하면 보내라 했다. 아이의 한으로 남을 수 있다고도 했다. 금천에서 대안교육 운동을 하는 나눔학원 원장 민경우는 무료로 가르칠 테니 보내라 했다. 나눔학원은 학생들의 수학 실력을 높이기로 정평이 났고, 집안 경제력에 따라 학원비에 차등을 두는 학원이었다. 집에 가서 전했다. 모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는 데만 한 시간 넘게 걸렸다.

    딸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 상태로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딸이 중3이던 작년 어느 날이었다. 문화다양성포럼의 후배 권오성이 사정을 딱히 여기고 친구를 소개했다. 셋은 동네 술집에서 만났다. 퉁퉁한 작은 키에 후덕한 인상의 원장 김신은 사정을 듣고서 쾌히 승낙했다.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다른 부모가 알면 항의할 수 있으니 어디에도 얘기하면 안 됩니다. 또 무료라면 아이가 학원에 소홀할 수 있으니 매달 1만 원씩 내야 합니다.”

    학원은 해방촌 옆 후암동이었다. 나는 거듭 고개를 숙였다. 딸아이는 공부 동냥을 하면서 수학에 재미를 붙였고, 떨어지던 성적이 향상됐다. 내가 선행 학습을 만류하지 못한 첫 번째 이유였다.

    한1

    후암초등학교 졸업 날에 왼쪽부터 누리, 혜정, 지영

    딸은 입학하고픈 고등학교가 따로 있었다. 근방에선 대학 진학률이 그나마 높다는 성심여고였다. 절친인 곽지영이 거기 입학하려 하고, 박혜정도 고민한다는 거였다. 딸아이는 중2 때부터 종종 의지를 밝혔다. 가족들은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학교를 최종 선택하는 시점이 되어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고교에 입학하면 야자니 뭐니 이슥해서야 귀가할 텐데, 학교마저 멀면 손녀 탈 없이 자라는 낙으로 사는 할매의 근심이 이만저만 아닐 터였다. 아내와 나도 매한가지였다. 뉴스만 틀었다 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흉측한 사건이 보도되는 세상이었다. 할매는 기겁을 했다. 딸은 약자 중에서도 약자인 어린 여성이었다. 우린 이구동성으로 아이를 설득했다.

    “매일 등하교에 1시간 넘게 시달리느니 엎어지면 코 닿는 데를 선택해라. 남는 시간에 공부를 더 하거나 잠을 푹 자는 게 훨씬 낫지 않겠냐.”

    아이는 며칠간 망설이더니 고교 지망 표 작성 마감 전날 밤, 1순위로 보성여고를 썼다. 집에서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혜정의 보성여고 선택도 작용한 듯싶었다. 대학 입시에 불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종용한 보성여고였다. 내가 선행 학습을 만류하지 못한 두 번째 이유였다.

    수업은 어떻게 준비할까, 방학 계획은 어떻게 수정할까, 딸은 며칠간 분주했다. 그리고선 선행 학습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고, 방학이 되어 등교하기 시작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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