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의 추억① - 도시락 검사
    점심 도시락의 보리쌀 비율까지 통제하고 감시하는 사회
        2012년 08월 12일 01: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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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의원의 5.16발언을 계기로 박정희정권과 그의 시대에 대한 평가들이 논란과 이슈가 되고 있다. 50대를 넘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5.16과 유신시대는 기억에서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둘러싼 윤색과 덧칠과 포장의 언어들만이 나부끼고 있다. 그래서 <레디앙>은 유신시대에 대한 기억을 당시 야당과 재야의 시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초등학생의 기억을 되살려서 담아본다. 오히려 그것이 지금의 10대와 2,30대에게 그 시대를 정직하게 인식하고 평가하는 근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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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딩에게도 유신은 만만한 시대가 아니었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선예비후보가 얼마 전 “5․16은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5․16을 쿠데타로 보지 않는다”고 밝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7년에는 유신시대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삼가면서도 “유신체제는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 다만 그때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희생하셨던 분들께는 진심으로 죄송하고 사과드린다.”고 밝힌 바 있다. 박근혜와 그 측근들은 ‘오늘의 한국 경제를 있게 한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한 시기가 유신시대이므로 공이 훨씬 많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는데 그분들에게는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인식인 듯하다. “사과드린다”는 표현은 아마도 인혁당 관련자 등을 염두에 둔 발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유신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인혁당 관련자들, 당시 유신반대운동에 참여했던 민주인사들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같이 당시 시골의 초딩이었던 사람에게도 유신은 하나의 상처로 남아 있다. 나는 유신이 선포된 72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유신이 종말을 고하는 79년도에는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말하자면 초등시절의 전 과정이 유신시대에 있었던 셈이다.

    5․16은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어서 기억할 수 없지만, 유신시대에 초중학교를 다닌 나에게는 당시의 아픈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유신은 순진한 농촌의 초딩에게도 결코 만만치 않은 시절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유신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몇편의 글을 써보고자 한다. 말하자면 ‘한 초딩의 유신 체험기’인 셈인데, 이를 통해 박정희 유신정권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락 검사

    유신 시절 학교에 가면 담임선생님께서 점심시간에 도시락 검사라는 걸 했다. 당시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은 도시락 검사를 둘러싼 선생님과 학생간의 갈등과 긴장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69년 혼분식 캠페인 모습

    요즘같이 학교급식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무상급식도 있었다면 아마 이런 일은 없었을테지만 당시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닌 유신 시절은 ‘벤또’라는 일본말로 주로 불린 네모난 양은도시락에 밥과 반찬을 싸가지고 다녔다. 겨울에는 난로에 올려놓고 따뜻하게 달궈서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당시 점심 도시락 검사를 했다면 고른 영양섭취를 잘 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도시락검사였을까?

    물론 그런 검사가 아니었다. 당시 우리는 유신정권의 혼식장려정책에 따라 반드시 30% 이상의 보리가 섞인 도시락을 가지고 등교해야 했다. 선생님들의 도시락 검사는 바로 이러한 방침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지도하기 위해 정부당국에서 시달된 조치였다.

    당시 정부의 혼식정책은 캠페인 수준을 넘어 강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는 자연히 긴장과 갈등이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

    내게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인 76년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의 검사가 점차 강화되어 나감에 따라 아이들은 쌀밥에 보리를 위에 얹어 가지고 오는 경우가 늘어났다. 위에서 보면 아예 꽁보리밥으로 보이게 된다. 이를 눈치 챈 선생님은 어느 때부터인가 도시락을 뒤집어 보이면서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뚜껑을 열고 보리쌀 비율을 검사받아야 하는 벤또들

    화가 난 아이들은 선생님 도시락은 어떤 지 보자고 한다. 그래봤자 소용없다. 선생님이 한두 번 같은 반 아이들과 밥을 먹지만 그때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선생님이 늘 혼식정책에 호응하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도 지적을 받게 되니 화가 난 아이들 중엔 낱알 수를 세서 도시락을 준비해 온 후 또 지적이 나오면 한 번 세보자고 주장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도시락 검사는 이러한 긴장과 갈등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요즘은 아이들 사이에서 아파트 평수를 물어보는 방법으로 빈부격차를 확인한다지만, 당시에는 도시락 싸오는 수준을 보고 아이들의 생활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엄마들은 우리 아이 기죽지 말라고 그 바쁜 농사일 중에도 도시락에 신경 쓰게 마련이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 하나하나는 도시락 검사라는 과정을 통해 선생님에게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생활수준을 공개해야만 했으니 아이들이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겠는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유신 시대는 참으로 피곤한 시대였다.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업무 과중에 시달리고 있었을텐데 도시락 검사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점심 먹는 일까지 이렇게 매일 검사를 받으면서 먹어야 했으니 이 얼마나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었겠는가. 아이들에게 유신시대는 말하자면 점심 도시락도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없는 그런 시대였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이전까지 혼분식을 장려하던 정책이 74년에 이르면 혼식장려 정책으로 바뀐다.(물론 여기서 장려라는 말은 강제와 동의어이다.) 거의 수입에 의존하던 밀가루 가격이 올라서 그랬던 것 같다.

    이게 또 77년도 가을에 이르면 벼농사가 풍년이라며 쌀막걸리까지 허용하는 등 쌀소비촉진정책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78년도에 이르면 쌀소비 장려와 혼식장려가 공존하는 혼선을 빚기도 한다.

    벼농사 풍년이라던 77년도에 보리는 거꾸로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서 200만 섬이나 수입하고도 모자란 실정이었는데, 78년도에는 보리생산이 대폭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자 잠시 접어두었던 혼식장려책을 또 다시 들고 나오면서 발생한 혼선이었다. 아마도 이 때 선생님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까. ‘아, 할 일도 많아 죽겠는데, 또 도시락 검사해야 하나?!’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장, 진보신당 동작당협 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친구였던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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