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급진성보다,
모두의 한 걸음 모색할 때
소수가 체험한 분노, 다수의 공감으로 확장되어야
    2016년 12월 20일 02:37 오후

Print Friendly

대규모 촛불시위의 방향이 박근혜 탄핵을 넘어 좀 더 급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급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정치적 주장들이 대부분이지만 100만, 200만이라는 집회 규모에만 기대면 된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자칫 성급한 주장들은 오히려 촛불의 기세를 꺾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 시민들의 집회 참여를 제한하지 않으면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고려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같은 고려의 최우선은 이 같은 대규모 집회가 어떻게 가능해졌는가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세월호 사건은 2년여의 투쟁 속에서도 계속 밀리기만 했는데 최순실 사건에는 어떻게 100만, 200만이 모일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월호 사건은 남의 문제고 최순실 사건은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깊이에서는 300여 명이 바다 속에 생매장된 세월호 사건에 비길 수 없지만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안전’과 그에 수반하는 신뢰감은 근대 민족국가의 감정적 원형이다. 영토국가는 구성원들에게 국가 안팎에서의 안전을 제공함으로써 충성심을 고취시킨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의 경우 생명과 안전에 대한 위험이 유가족들에게는 ‘체험’된 것이었다면 다수에게는 ‘예감’의 영역이었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자들의 위험에 대한 예감은, 체험된 타자의 슬픔과 분노를 ‘공감’했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온 국민이 슬픔에 빠진 시간이었지만 공감보다는 단순한 연민과 동정에 그쳤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공감이 아닌 연민과 동정은 이후 지배세력의 공격 속에 차츰 냉담함으로 바뀌어갔다.

반면 최순실 사건에서는 통치체제 전반의 안전에 대해 전체 국민이 위험을 느꼈다.(4~5% 빼고). 공감할 필요도 없이 전체가 직접 체험한 위험이다. 이 때문에 최순실 사건은 절대 다수로부터 분노를 불러일으켰지만 당연히 박근혜 퇴진을 포함한 ‘통치체제의 안정’이라는 보수적 의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또 최대 의제의 이 같은 보수성 때문에 성급한 급진적 주장은 자칫 집회 참여 대상을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이번 촛불이 보수적 의제에 전적으로 구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급진화의 가능성은 지금까지 집회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역에서 신교로터리로, 그리고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것은 집회의 압도적 규모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공권력이 그어놓은 금지선을 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열망의 담지자들이 바로 이번 촛불에서 보수적 의제를 뛰어넘는 급진적 주장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촛불이 급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대통령 퇴진 구호 자체에 내재된 가능성이다. 대통령 퇴진 구호는 김기춘과 우병우, 황교안과 전체 국무위원의 퇴진과 구속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통령은 통치체제의 정점이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에 대한 부정은 통치체제 전반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더욱이 다행스럽게도 대통령의 부정에 삼성의 국민연금 매수도 포함돼 있다. 이런 점에서 국정감사에서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삼성이 최순실에게 준 수십억과 비교해 백혈병 산재 피해자 지급액이 500만원에 불과했다고 언급한 것은 적절했다.

둘째, 세월호 사건이 갖는 원초적 성격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방기한 사건이다. 그리고 비록 압도적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1천일 가까운 기간 동안 유가족들이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싸워왔다는 사실은 지금의 촛불이 급진화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유가족들이 2년 8개월 동안 접근하지 못했던 청와대 100미터 앞, 그 선을 밟는 순간 그간의 금지가 갖는 부당함은 실체를 드러냈고 박근혜의 7시간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냉담하게 등을 돌렸던 사람들이 반성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부당하게 금지된 집회에서 집시법 위반 등으로 구속된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석방 요구는 일반시민들에게도 무리하지 않게 수용될 수 있다.

셋째, 고 백남기 농민에게 대한 허위진단서 발부와 무리한 영장 집행 시도가 최순실 보도 직전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사람들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고 최순실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은 서울대병원 의료진이 개입됐다는 데서 촛불집회의 본무대에 등장하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사안이다. 그러나 한상균 전 위원장과 이석기 전 의원을 묶어 석방을 주장한 것은 이 의원에 대한 시각 때문에 한 위원장에게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0

12월 19일 8차 촛불집회의 모습

급진화만이 아니라 후퇴의 가능성도 

급진화의 가능성에 반해 후퇴의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95%에는 배신감뿐이 아니라 상실감과 수치심의 감정도 포함돼 있다. 배신감이 문제의 책임을 외화시켜 분노로 이어지게 하는 감정이라면 상실감과 수치심은 책임을 내화시키는 감정이다. 책임의 내화는 자기반성으로 연결된다. 즉 지금의 사태가 대통령 잘못 뽑은 나의 책임이라고 여겨 다음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복무할 ‘진짜 보수’를 뽑기 위해 단일대오로 더 세게 결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업을 나의 책임으로만 여겨 자기계발에 몰두할 때 경쟁 체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퇴보다는 전진의 희망이 더욱 가깝게 보이는 것은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특징인, 유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고도경쟁사회가 수많은 경쟁 탈락자를 발생시키는 과정에서 자기계발의 허구성을 스스로 드러냈으며 그간에 누적된 냉소와 절망이 박근혜에 대한 분노로 점화되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장이 주장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물론 시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인지적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지루한 설명 끝에 이해시킬 수 있는 내용을 구호 하나로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DJ.DOC 관련한 여혐 논란을 보자. 촛불집회의 급진성을 강화하기는커녕 소위 진보그룹의 동의조차 일부에 그쳤다. 반면 전인권과 이은미의 애국가는 어떠한가. 안익태에 대한 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올랐고 ‘울컥’했다는 얘기가 여러 곳에서 나올 만큼 다수의 공감을 얻었다.

사람들을 울컥하게 한 애국가가 이번 촛불집회의 주요 의제인 ‘통치체제의 안정’을 반영한 것이라면 ‘통치체제의 변화’를 희망하는 다른 급진적 의제들은 인지적으로 수월하게 접근 가능한 내용과 방식으로 주장해 들어가야 한다.

소수의 조급함을 자제하고 다수 대중이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무대에서 다함께 주장할 것과 광장의 여러 의견 중 하나로 주장할 것을 가려야 하고, 구호로서 주장할 것과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할 내용을 가려야 한다.

소수가 체험한 깊은 분노는 다수의 공감으로 확장됐을 때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다수가 직접 체험한 얕은 분노는 그러한 분노가 갖는 깊은 본질에 이르렀을 때 변화의 힘으로 작용될 수 있다.

광장이 광장인 까닭은 여러 의견과 이해가 각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장들을 광장에서 풀어내 서로 경쟁하되 다시는 후퇴하지 않고 모두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본질적 변화를 위해서 깊은 ‘고려’가 필요한 때이다.

필자소개
대학과 대학원에서 차례로 역사학과 행정학과 정치학을 전공했고 주요 연구 분야는 정치사회학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