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이자 멘토, 동지 카 포포이
    [필리핀 좌파운동] 암살당한 혁명가를 기억하며
        2016년 12월 16일 01:48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앞 회의 글 ‘엣사 혁명의 한계와 약점’ 링크

    제 30 장 투사 열전 

    혁명가 중의 혁명가 : 동지 포포이

    필몬 라그만―― 나에겐 동지 포포이―― 은 글로리아 아로요가 대통령 대행으로 취임한 후 희생당한 첫 번째 좌파 활동가였다. 아로요는 2001년 1월 20일에 말라카냥궁을 도망친 조셉 에스트라다를 대신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 직후인 2001년 2월 6일, 포포이는 필리핀대학 딜리만 캠퍼스 구내에서 정체불명의 암살자에 의해 살해됐다.

    총격을 당한 후 수 시간 동안 포포이는 생사의 기로를 헤메야 했다. 빈사 상태의 포포이는 습격 당시 함께 있었던 파트너 미셀과 아들 단테에 의해 필리핀 심장센터병원으로 이송됐다. 라디오 보도를 듣고 충격에 휩싸인 동지들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비보가 전해졌다. 그는 운명을 뛰어넘지 못했다.

    다음 날 나는 필리핀대학 성당에서 거행된 철야추도회에 참석했다. 그 당시 나는 사회주의노동당(SPP)이라는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는 데 진력하고 있었다. 성당에는 나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포포이의 “가장 가까운 참모이자 다른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포포이 곁을 떠난 최후의 동지”라는 내용이었다. 철야 추도회에서 발언을 요청받았을 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포이와 나는 혁신운동연락회(UKP)라는 학생운동 활동가 시절부터 거의 28년간을 함께 해 왔다. 내가 포포이를 떠난 것은 그가 죽기 2년 전인 1998년의 일이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싸워 온 28년에 비해 2년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또 포포이의 장례가 끝나는 대로 그의 조직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연계를 모색하겠다고 선언했다.

    2002년, 포포이의 1주기에 포포이가 쓰러진 장소인 필리핀 대학 딜리만 캠퍼스 동창회관 돌계단에 추모판을 만들기로 했다. 계단에 박아 넣을 명판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나는 칼 마르크스의 묘에 있는 프레드릭 엥겔스의 연설에서 차용한 글을 비문으로 골랐다. “포포이 동지는 걸출한 혁명가였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정열과 불굴의 의지로 투쟁했다…” 이 비문은 지금도 동창회관의 돌계단에 새겨져 있다.

    필리

    포포이 암살을 보도하는 당시 신문

    장발의 포포이

    나는 1971년에 포포이를 처음 만났다. 그 무렵 그는 아직 장발 차림의 활동가였다. 포포이는 칼루칸, 말라본, 나보타스 지역 급진 단체의 연합체인 혁신운동연락회(UKP)의 대중 집회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민청협(SDK)」소속이었고, 나는「애국청년회(KM)에 몸담고 있었다.

    “몬 동지”―― 그는 그 무렵 아직 “포포이”가 아니었다―― 는 저돌적인 논쟁가였다. 회합에서는 질문하기를 좋아했고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혁신운동연락회의 간부들과 논쟁을 하곤 했다.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혁신운동연락회의 다른 간부들이 대부분 앉아 있을 때도 항상 혼자 일어나 논쟁에 열을 내곤 하는, 조금은 불손하고 건방진 활동가라는 인상이었다.

    포포이는 당시 「반타욕」〔타갈로그어로 기념비라는 뜻〕이라는 혁신운동연락회의 기관지를 담당

    하고 있었다. 우리 형도 그 기관지의 편집위원이었기 때문에 포포이는 우리 집에 자주 와 형 오스카와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가 쓴 글의 특징은 직설적이고 투박한데다 거친 욕설이 양념으로 섞여 있었다. 그건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이기도 했다. 반면 우리 형 오스카의 경우는 섬세하고 우아했다. 포포이가 문장 속에서 거침없이 욕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이곤 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얼마 후 KM(애국청년회)의 지부가 나보타스에 결성되었고, 나는 그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포포이는 우리 애국청년회 사무실에 며칠씩 죽치곤 했다. 그를 통해 우리는 혁신운동연락회의 움직임이나 운동권의 새로운 최신 정보와 논쟁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사안에 있어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고, 그를 좋아했다.

    포포이는 항상 마르크스의 고전을 읽고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마오 어록이나 『5개의 금의 광채』〔모택동의 평이한 강화 5개를 묵어 등사판 인쇄한 팜플렛〕, 기타 마오의 저작을 숙독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포포이는 마르크스가 1844년에 쓴 『경제철학초고』와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그리고 레닌 전집 몇 권을 본부에 가지고 왔다.

    포포이는 한 권을 다 읽으면, 그것을 동지들에 돌려보게 했다. 때때로 포포이는 그 책들의 핵심 포인트에 대해 토론을 조직했다. 한번은 일주일 동안 맑스의 『경제철학초고』를 숙독한 한 동지가 포포이에게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잠자리 잡기”(그는 그것을 하고 싶다고 했다!)와의 관계라는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좀 지나서 알게 되었지만, 그 동지는 가족문제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약간 정신이상 증세가 생긴 상태였다.

    포포이가 걸레자루를 들고 우리를 쫓아다닌 사건은 지금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추억이다. 어느 날 오후 포포이가 우리 사무실에 왔다. 그는 그날 오전에 칼루칸에서 있었던 지프니 운전사 파업에 파업 참가자의 수가 적었던 것에 대해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당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그를 열 받게 하는 말을 했다. 포포이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나는 자신의 주장을 차분히 반복해 그를 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급기야 머리끝까지 화가 뻗친 포포이가 대걸레를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당시 우리 사무실은 아파트 2층에 있었고, 나는 그를 피해 계단 아래로 도망쳤다. 그러나 도망치면서도 나는 계속 자신의 주장을 외쳤고, 그는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다. 소리를 지르고 걸레자루를 휘두르며 나를 쫓아왔다.

    그러나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모든 것은 평상시대로였다. 그건 단지 사춘기 시절에 흔히 있는 다툼이었다. 그때 포포이는 18살, 나는 16살이었다.

    계엄령

    1972년 9월 21일, 마르코스에 의해 계엄령이 발포되면서 우리는 애국청년회(KM) 본부를 떠나야 했다. 포포이는 우리와 함께 지하활동의 네트웍을 만들었다. 그러나 계엄령 초기에는 나중처럼 “지하 깊숙이” 잠수하지는 않았다. 당시 우리는 낮에는 각자 자신의 집에 있기도 했지만, 밤이 되면 군의 급습이나 “조닝(zoning)”(일제 수색)을 피하기 위해 지지자나 친구 또는 먼 친척 집을 찾아다녀야 했다.

    “조닝”이라는 것은 통행금지 시간대에 범죄자나 활동가를 수색하기 위해 일정한 지역을 군과 경찰이 급습하는 것을 말한다. 때론 경찰이 주민들을 한 군데로 모으기 위해 확성기로 방송하기도 했으나, 대개의 경우는 경찰이 호별방문을 통해 “의심스러운 자”를 연행해 가는 경우가 많았다.

    계엄령으로 인해 포포이의 장발 차림 활동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계엄령 포고 중에는 장발 금지가 들어 있어 장발을 한 청년들은 경찰이나 군 검문소에서 머리를 잘리곤 했다. 모택동 모자나 모택동 복장도 금지되었다. 또 사람들이 3명 이상 그룹을 지어 모이는 것도 금지됐다.

    이 시기에 포포이는 당 지역지도부 및 혁신운동연락회의 공개 부문과 우리들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맡고 있었다. 우리가 하룻밤을 지낼 장소를 찾아내면 그는 그곳으로 찾아와서 우리에게 당 지도부 내의 토론 내용이나 행동계획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우리는 숙박하는 장소에 따라 별도 팀으로 나뉘곤 했지만 포포이와 나는 항상 같은 팀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멤버들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때, 당 지역지도부에게 제출해야 하므로 지역위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내 의견을 적어달라고 포포이가 요청했다. 나는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적어 주었는데 그것을 읽은 포포이는 지도부에 대한 비판을 좀 더 날카롭게 했으면 좋겠다며 부추겼다. 나를 펌프질하기 위해 포포이가 위스키 병을 들고 찾아오는 바람에 우리는 술 한 병을 다 비우면서 밤새 토론해야 했다. 마음을 열고 기탄없이 토론하는 것을 통해 동지들 사이의 대립을 해소해 나가는 게 포포이의 스타일이었다. 그는 술이 세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와 술 마실 껀수를 잡는 것은 무언가 그 동지와 토론을 통해 풀어야할 일이 있을 때였다.

    성찰

    어느 날 포포이가 나를 찾아왔을 때, 그가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포포이가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돌아간 후, 나는 그가 쓴 작은 메모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활동가로써 또 가족의 일원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과 선택에 대한 메모였다. 나는 그 메모를 보고 변호사를 하고 있던 포포이의 형 헬몬이 가택수사에 의해 체포된 것을 알았다.(헬몬은 아직도 행방불명인 젊고 우수한 변호사이다. 이때는 체포된 후 곧바로 석방되었으나, 1977년에 다른 한 명의 노동자와 함께 납치된 후 두 사람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잠시 후 포포이가 다시 돌아와 혹시 메모를 못 봤냐고 물었다. 그에게 메모를 건네주자 포포이는 내가 그 메모를 봤는지 여부를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안 봤다고 대답했다.

    그 메모는 항상 자신의 행동과 계획에 대해 기록하고 성찰하는 포포이의 생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는 대단히 체계적인 사유의 소유자로,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일이 없었다. 신중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전망과 삶의 방향을 고민했다. 포포이 동지의 영웅적 인생은 그가 메모 속에 있던 두 가지의 길 중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노동자의 조직화

    계엄령 초기, 지하로 들어간 마닐라 · 리잘 위원회는 마닐라수도권과 인근 리잘 주의 당 기구를 개편했다. 이것은 계엄령이라는 엄혹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제1차 당 개편”으로 불렸다. 당시 모든 급진 조직은 마르코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계엄령 이전의 지역별 조직을 개편해 부문별 당 조직으로 재편했다. 포포이와 나는 공장과 기타 노동현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화하는 “노동조합 공작”부문으로 배치되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하거나 대중동원과 다양한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 속에 정치적 기반을 만들고 또 새로운 당원의 확대를 꾀하는 것이었다.

    포포이는 말라본에 있는 리라그 텍스타일 밀즈(Lirag Textile Mills)라는 섬유공장 노동조합 의 핵심적인 조직 담당이 되었다. 리라그 밀즈가 「LK 구아린」이라는 유명한 섬유공장과 같은 공장인지 아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피복 봉제공장에서 비참한 노동조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 군에 의해 잔인한 탄압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때의 탄압은 보이 마냐락이라는 악명 높은 말라본의 경찰간부가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게 발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지역 활동가의 지원을 받아 공장 정문 앞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반격했다. 우리는 지원을 위해 파업 현장에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휘발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파업 노동자들과 지역의 활동가들이 파업대오를 보위하기 위해 화염병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날 밤 파업대오를 진압하기 위해 기동경찰이 집결하고 있었다. 화염병을 받아든 나는 그것을 손에 들고 걸어 다녔다.

    바리케이드에서의 즉석 집회가 열렸다. 말라본의 고등학생 활동가 레이 네폼세노가 경찰을 향해 만약 습격해 온다면 우리는 그들을 막아낼 것이며 경찰은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레이는 필리핀 시금치(칸콘)가 심어져 있는 공장 옆 늪지대를 가리켰다.

    2대 이상의 트럭을 타고 필리핀 해병대가 도착한 것은 새벽녁이었다. 얼마 후 전기가 끊어졌다. 트럭에서 뛰어 내린 해병대는 소름끼치는 괴성을 지르며 방패를 휘둘렀다. 이어 밤의 정적을 깨트리며 총탄이 밤하늘에 흘렀다. 우리 쪽에서는 화염병으로 응수했다. 필박스가 땅바닥에 부딪히면서 귀를 찢는 폭발음이 터졌다. 나는 공장 정문 입구의 LK 구아린 건물 2층을 향해 하나 밖에 없는 화염병을 던졌다. 유리창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건물 입구 길바닥에 떨어진 화염병이 터지면서 한순간 주위가 밝아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면도칼이 날아가는 것처럼 피융 소리를 내며 총탄이 지나갔다. 나는 그 총탄이 시멘트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지옥도와도 같은 광경이었다.

    우리는 반대편 공장 문을 넘어 인근 민가를 향해 뛰어 도망갔다. 한 집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을 때 노인 한 사람이 군대의 경봉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들은 낮은 기둥 위에 세워진 집 아래로 숨었다. 이윽고 경찰의 소탕부대가 나타났고 우리는 끌려 나왔다. 포포이를 포함해 20여명이 체포됐다. 경찰의 구타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고등학생인 레이도 체포되어 우리 쪽으로 끌려왔다. 그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뛰어든 것은 경찰이 아니라 우리”라며 농담을 던졌다.

    우리는 말라본 시의 형무소로 연행됐다. 지문을 채취하고 일반 수형자들과 격리된 곳에 수용되었다. 그날 밤 우리는 경찰들을 잠시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큰 소리로 혁명가를 부르면서 기세를 올렸고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을 어필했다. 진지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포포이의 노래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적어도 3명이 날조된 혐의로 다시 3일간 형무소에 억류되었으나, 그 외에는 모두 다음날 오후에 풀려났다.

    계엄령 발포 이후 포포이는 공장으로 돌아가 새로운 노조의 조직화에 임했다. 당으로부터 부여된 임무였다. 이 무렵 포포이는 역시 당의 조직가였던 처 살리와 만나게 된다.

    1974년 무렵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후에 “제 2차 당 개편”으로 불리게 되는 새로운 재편에 착수했다. 지구위원회를 부활시켰고, 칼루칸, 말라본, 나보타스(카마나)로 구성된 우리 지구도 재편되었다. 그것은「D3」로 불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D3에는 발렌수엘라 시가 추가되어 이들 지역의 앞 글자를 따서「카마나바」로 불리게 되었다.

    이 재편 기간 중, 포포이 동지는 D3의 지도를 맡았다. 지하조직은 어디나 다 그랬지만, 지구 지도부는 지하 아지트(우리는「UG」라고 지칭했다)를 가명으로 빌려 보통 사람들처럼 보이도록 했다. 포포이와 살리는 부부로, 그리고 다른 4명의 동지들은 사촌과 친척인 것으로 했다. 포포이의 장남 단테를 돌봐야 했던 살리를 제외하고는 전원 공장노동자로 위장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아침 8시 전에 집을 나와 저녁 7시쯤 귀가했다. 그 시간 동안 “대중 공작”에 전념해야 했다. 조직 지도부나 당 연락원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다른 당 조직들과 활동계획이나 임무분담에 대해 조심스럽게 토론하기도 했다.

    각각의 당 조직은 자금을 스스로 조달해야 했다. 당으로부터의 자금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꾸려나가야만 했다. 포포이는 모친으로부터 받은 돈(포포이의 모친은 전폭적으로 그를 지원했다)을 우리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그로부터 교통비 등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대중 공작”에는 정기적으로 후원해주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보급투쟁”이나, 공짜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리의 뱃속에 있던 아기는 지하 아지트에서 쌀과 콩을 먹으며 자라야 했다.

    1975년에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조직적으로 재편됐다. 각 지구별로 당위원회(D1에서 D6까지)의 최고책임자들이 모여 그들 중에서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했다. 포포이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포포이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에 결합할 때까지의 사이에 내가 잠시 동안 D3의 책임을 맡았다.

    포포이-위키

    필몬 라그만(Filemon Lagman/ Ka Popoy)의 모습(위키피디아)

    리더십 스타일

    포포이의 지도 스타일은 좀 특이했다. 그는 토론을 좋아했고, 논쟁에 강했으며 반대의견에 대한 완벽한 “종결자”로 유명했다. 법률가 집안 출신이라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포포이의 부친은 판사였고, 큰 형은 일류 기업의 변호사(현재는 국회의원), 그리고 전에 언급한 바 있는 둘째 형 헬몬은 유능한 노동 변호사였다.

    포포이는 많은 글을 썼다. 그의 문장력은 고등학교 학교신문을 통해, 그 다음은 필리핀 대학시대에, 그리고 계엄령 이전에는 전투적인 혁신운동연락회의 급진적 기관지「반타욕」의 편집을 통해 벼려졌다.

    지하활동 회의에 포포이는 반드시 토론의 토대가 되는 문서를 준비했다. 그는 단순하게 허세를 부리기 위해 반대의견을 “논파”하는 것이 아니었다. 회의 전에 깊이 생각하고 문장화한 것에 기초해 토론했고 문장화하기 전에도 여러 가지 생각들을 마음속에서 여과했다.

    우리는 항상 지하 아지트에서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포포이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책임자이고 내가 D3의 책임자였을 때 나는 항상 그의 생각이나 토론의 반응에 대한 “애드벌룬”역이 되곤 했다. 반대의견에 대해 그가 흥분하곤 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준비를 치밀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즉흥적인 발언이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뱉는 발언에 대해 그는 매우 흥분했고 화를 냈다. 토론이 지나치게 과열되지 않도록 포포이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토론에 들어가기 전에 의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메모해두곤 했다.

    잇단 체포

    포포이는 군에 의해 3번 체포됐다. 계엄령 하에서 한 번, 피델 라모스 정권의 포스트 피플파워 혁명 하에서 두 번이었다. 첫 번째 체포 때 군은 그가 포포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포포이는 라바옌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당시 군에 의한 정치범 탄압에 반대하고 있던 줄리오 라바옌 주교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1976년 5월 무렵의 일로, 그는 이때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포포이는 카인타(Cainta)시청사 뒤에서 회의를 하다 D5지구 3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타귁시의 보니파시오 기지로 연행됐다. D5지구의 책임자는 포포이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를 썼다. 포포이가 그저 지역 활동가의 한사람일 뿐으로 군에서 찾고 있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주요 간부가 아니라고 속여 포포이를 지켰다.

    군 구치소에 구속된 포포이는 탈출 방법을 고안했다. 그리고 그 계획은 바깥에 있던 동지와 연계되어 실행에 옮겨졌다. 한 여성 동지가 그의 친척으로 가장해 몇 차례 그를 면회하면서 연락을 취했다. 처음 군 기지에 면회를 하러 갔을 때, 그녀는 면회 시간 내내 떨면서 줄담배를 피웠다. 군 간수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포포이는 헨리 로메로라는 저널리스트 활동가와 함께 탈옥했다. 그 저널리스트는 지금까지도 행방불명인 상태로, 마르코스 계엄령 시대의 비밀첩보부대에 체포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활동가들 사이에 회자되는 그들의 탈주극은 이런 것이었다. 포포이와 헨리는 구치소와 바깥을 격리시킨 군 기지 벽 근처의 잡초 제거를 일과로 부여받았다. 매일같이 둘은 높은 구치소 담장 근처의 특정한 장소에 낙엽이나 나뭇조각과 풀을 모아 도약대로 삼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다. 탈옥 준비가 끝나자 두 사람은 담을 넘을 기회를 기다리면서 그 장소 근처에서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탈옥의 날이 왔고, 마침 감시탑에는 간수도 없었기 때문에 둘은 손쉽게 높은 담을 넘어 탈주했다. 도주용 차량을 밖에 대기시켜 놓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날따라 도로의 정체가 심해 그 차를 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포포이와 헨리는 지프니를 타야 했다. 포포이가 요금을 내자, 운전사는 돈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포포이가 군 구치소에 잡혀 있던 수개월 사이에 지프니 요금이 꽤 올라버렸던 것이다.

    두 번째의 체포는 1994년 5월 26일의 일이었다. 포포이는 케손시 비자야 대로 근처에서 해군 첩보부대에 의해 체포됐다. 이 체포 전에 첩보부대는 수일간에 걸쳐 포포이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 체포와 동시에 “공포의”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의 수괴가 체포되었다고 신문 톱기사로 보도됐다. 그러나 이건 말도 안 되는 것으로, 그는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의 여단장도 아니었고, 또 민중들이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을 “공포스러워”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체포는 1996년 11월 12일,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회의(APEC) 13일 전의 일이었다. 케손시의 술로(Sulo)호텔에서 당시『파 이스트 이코노믹 리뷰』지의 일을 하고 있던 리고벨토 티글라오〔필리핀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와의 회동 직후에 필리핀 군 첩보부대와 수사국의 합동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 전 포포이와 연결된 조직, 즉 BMP와 산라카스는 APEC 및 서미트에 참가하는 각국 수뇌들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항의행동은 포포이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성공리에 끝났다. “슬램 APEC” (APEC 반대운동연대)이 결성되었고 케손시의 노발리체스에 있는 커다란 빈 창고에서 이틀간에 걸친 반APEC, 반세계화 회의가 개최되어 수백명의 대표들이 참가했다. APEC 수뇌회담 종료후 포포이는 석방됐다.

    개성이 강한 이단아

    포포이는 태생적으로 타고난 투사였다. 정부나 군에 대한 싸움뿐만이 아니라, 동의할 수 없는 정치방침이나 지령을 내리는 당 지도부와도 맞서 싸웠다. 포포이가 쓴 수많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문건들이 필리핀 공산당(CPP)의 정치노선이나 관점에서 일탈했다는 이유로 CPP 지도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문제가 된 것 중에는 “자유롭고 진정성 있는 선거를 요구한다”라는 계엄령 하에서 제기된 전술적 슬로건에 관한 문건이 있었는데, 이 문건에서 그는 필리핀 공산당(CPP)의 민족민주주의 방침에 맞서 노동운동을 위한 사회주의적 방침을 제출해 정면으로 충돌했다. 또 1978년의 임시의회선거에의 참가를 주장하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문건도 있었다.

    문제가 된 포포이의 마지막 문서는 “대항테제 문서”였다. 그 내용은 CPP의 “스탈린주의적 · 마오주의적 지도” “인민지구전 전략” “민족민주 노선 프로그램”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가 필리핀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되었고, 결과적으로 CPP로부터 분열해 포포이 지도하의 새로운 당을 결성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포포이는 개성이 강한 이단적인 지도자였으며 필리핀 공산당의 스탈린주의적 · 마오주의적 지도부와 그 정치노선에 대항한 반역아였다. 그리고 그는 필리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해 “불손”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런 것들이 좋은 지도자가 가져야 할 긍정적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당 중앙지도부에 맹종하지 않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포포이가 필리핀 공산당 내 지배적 주류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보증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포포이는 지역위원회의 교육 선전을 담당하고 있던 나에게 당의 규칙이나 규범, 혹은 당내의 지배적 아이디어에 반하는 용어나 정의를 사용하는 경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의를 주곤 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포포이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하곤 했다. 의견 차이나 문제를 조정하는 있는 동안 포포이는 자기한테는 친구가 없다, 있는 건 단지 정치적 동맹자들뿐이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본심이 아니고 그에게 있어 혁명적 정치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이 원칙에 의거해 살아왔고 또 죽었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길인 것이다. 혁명 방침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그는 친구를 얻기도 하고 또 잃어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친구는 정치적 입장 차이로 인해 함께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로 그 숫자는 적지 않았다.

    1997년에 내가 토니 카발도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호주로부터 돌아왔을 때, 포포이는 나를 타귁시에 있는 텔레푼켄 마이크로엘렉트로닉스사(테멕)의 노동자 파업에 데려갔다. 26장에서 자세히 상술했지만, 이 노동자판 피플파워 투쟁의 와중에 포포이는 나를 테멕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나의 친구이자 멘토인 포포이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우정도 시련을 맞게 되었다. 1998년, 나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포포이와 결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깨닫게 된 것은, 서로가 전면적으로 대립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 차이의 해결에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라고 생각된다. 후회스러운 것은 내가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이 그가 운명하고 난 뒤라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포포이는, 친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승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71년에 활동을 시작해 거의 30여년에 걸친 정치적, 그리고 개인적 교분 속에서 그가 내게 보내 준 지원과 신뢰, 믿음을 돌아볼 때, 포포이의 지도 없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수준에 다가갈 수도 없지만, 그 엄혹하고 힘든 시절을 포포이와 함께 활동하고 살아 온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영광인 것이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