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와의 산행 기억하길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①] 소망 하나
        2016년 12월 16일 10: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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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글 ‘연재를 시작하며’ 링크

    새해엔 많은 이들이 뭔가를 다짐했다. 나도 그랬다. 주로 술·담배를 끊겠단 각오였다. 결론은 늘 작심삼일이었다. 그러고도 반복했다. 남들 다하는 날에 나만 빠지면 왠지 낙오자가 될 것 같다는 강박이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그만뒀다. 그날이 어떤 날이든 강한 계기를 만나 다짐해야 실현 가능성이 높다는 경험을 축적한 까닭이었다. 의례적 다짐은 깨지기 십상이었다. 삶은 1년 단위로 순환하는 게 아니었다. 뭔가를 다짐할 일이 있어도 굳이 새해는 피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2013년 1월 1일, 약속하고 다짐했다.

    우리 가족은 서울 남산중턱에 자리한 해방촌에서 3대가 함께 산다. 누리를 기준으로 할머니 순이, 엄마 혜원, 아빠인 나, 이렇게 넷이다. 우리는 오늘 남산을 산보했다. 하얗게 쌓인 눈에 바람 없는 맑은 날씨라 여유로웠다. 걸음 재고 잔정 없는 나는 앞섰고, 뒤처진 여성 3대는 쉼 없이 대화를 나눴다.

    “니 애비는 할아버지가 중동 가서 죽도록 고생해 대학 보내 놨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했다. 부모 가슴에 못질하고 속만 썩였어. 니 할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뭐가 그리 좋다고 죽을 때까지 아들만 찾았어. 병원에 입원해서도 아들이 오면 그렇게 좋아했어. 할아버진 노가다 하면서도 자식들 굶기지 않고 대학 다 보냈는데, 니 애빈 할아버지 발톱도 못 따라가, 발톱도.”

    단골 소재인 내 흉이 빠질 리 없었다. 데모만 했다는 둥 술·담배 많이 한다는 둥 이야기를 주도하는 이는 당연히 할매였다.

    한1

    북측순환로를 걷고 있는 장난꾸러기 딸과 수다쟁이 할매와 지혜로운 아내

    하얗게 눈 덮인 산언덕에 나무 한 그루가 도드라졌다. 빨갛고 조그만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멈춰서 감상했다. 예쁘다고 감탄하는 딸에게 팥배나무라고 알려주었다.

    아이는 눈을 뭉쳐 셋의 뒷목에 넣고 던지면서 장난을 쳤다. 셋의 반응은 달랐다. 할머니는 아, 조그만 탄성을 뱉고는 툭툭 털었다. 엄마 혜원은 악, 비명 지르며 도망쳤다. 아이는 깔깔대며 뒤쫓았다. 나는 앗 차거, 호들갑을 떨고선 너도 당해 봐라, 맞대응했다. 아이는 바쁘게 눈을 뭉쳐 맞서다 내뺐다. 난 쫓는 시늉을 했다. 아이는 할머니 살려 줘, 하면서 등 뒤에 숨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쪽 분수대를 지나 북측 순환로를 돌고, 국립극장과 장충단공원을 거쳐, 동쪽 외국인종교휴양지 앞에 이르렀다. 할매와 아내는 버스를 타고 먼저 집으로 향했다. 할매 무릎이 한계에 다다른 때문이었다. 딸아이와 나는 남산 한 바퀴가 아쉬워 손을 꼭 잡고 내처 걸었다.

    “왕따 같은 건 없었냐?”

    “보성여중은 왕따 없었어. 일진 애들도 착했고.”

    나는 물었고, 딸애는 신나게 재잘거렸다.

    “중학교 친구들이 보성, 신광, 무악, 성심, 외고로 다 흩어져. 헤어지는 게 너무 섭섭해. 혜선이는 엄마 따라 대구로 내려간대. 세은이는 춤출 거라서 특성화고에 갈 거고.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친구들하고 전화하고 만날 거야. 우리 집에 와서 놀기도 할 거야.”

    유치원 무렵부터 시작된 딸의 꿈 여행은 디자이너, 피아니스트, 수영 강사, 유치원 교사, 경찰, 미식가 등이었다.

    “요새는 꿈이 뭐야?”

    “어릴 때까지는 꿈이 많았는데, 지금은 꿈이 뭔지 모르겠어.”

    차가워진 딸애의 조그마한 손을 내 잠바주머니에 넣었다.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데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딸의 앞날이 걱정됐다. 개인 특성을 무시하고 성적으로만 줄 세우는 교육 풍토, 하루가 멀다 하는 학생들의 자살 행렬, 그 결정판인 고교 과정을 아이가 맞닥뜨린 거였다. 불안했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빤히 예측되는 딸아이의 고달픈 3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인데, 명색이 아빠인데…….

    나는 10여 년 전의 사건과 약속을 떠올렸다.

    2001년 2월 16일이었다. 대우자동차는 1,727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 했다.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노동운동과 시민사회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숱하게 격돌했다. 그 투쟁의 결과로 복직을 희망하는 해고자들이 나중에 모두 회사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해 9월 24일 아침이었다. 나는 당시 네 살이던 딸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유치원에 바래다주고 출근할 참이었다.

    “누리야. 유치원에서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재미있게 놀아. 알았지?”

    “응~. 근데 아빠! 집에 올 때 맛있는 거 많이많이 사와.”

    웃음을 머금고 걸음을 멈춘 채 무릎을 구부리고서 딸내미에게 볼을 내밀었다. 아이는 뽀뽀를 했다. 나도 꼭 껴안고서 뽀뽀했다. 그러고선 다시 유치원을 향해 걸었다.

    순간, 느낌이 서늘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 여럿이 나와 아이를 에워쌌다. 사복이란 걸 직감했다.

    “한석호 씨 맞습니까?”

    한 남자가 신분증을 내밀며 물었다.

    유치원까진 바래다줘야 하는데, 난감했다. 아이를 쳐다봤다. 낯설고 냉랭한 어른들의 갑작스런 접근 때문이었으리라. 기죽어 있었다. 딸애를 잡은 손아귀에 살포시 힘이 들어갔다.

    “맞는데, 유치원이 저 밑이니까 데려다주고 갑시다.”

    난 순순히 인정하며 요구했고, 그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봤고, 한 남자가 그러자 했다. 난 아이를 이끌었다. 양 옆과 뒤에는 경찰들이 따라붙었다.

    “괜찮아. 아빠가 아는 사람들이야.”

    미소로 안심시켰으나, 놀라서 몸이 굳은 딸은 웃지 못했다.

    유치원 입구엔 젊은 여선생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딸아이를 온몸과 마음으로 깊숙이, ‘꼬~옥’ 품어 본 다음에 넘겼다. 불편한 분위기 탓에 아이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선생을 따라 얼른 들어가 버렸다. 난 아이의 표정과 행동을 하나하나 새기고 또 새겼다. 내 평생 잊지 못할 슬픈 이별 장면이 심장 깊숙한 곳에 못 박혔다. 저 아이를 언제 다시 품어 볼 수 있으려나. 가슴이 휭 뚫렸고, 시렸다.

    한2

    구속되기 바로 전날, 가족은 집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딸아이의 네 살을 축하했다

    그길로 인천 보안수사대로 끌려가 구속됐다. 민주노총 산하 금속연맹 조직실장으로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분쇄 투쟁의 현장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감옥살이 세 번째라 이골이 날만도 했는데, 무척 힘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른대는 딸아이가 사무쳐 숱한 시간을 한숨으로, 때론 눈물로 보냈다. 보고 싶었고, 안아 주고 싶었고, 품에 끼고 놀러가고 싶었고, 동화책 읽으며 재워주고 싶었고, 싶었고, 싶었고…….

    마음을 달래려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당시의 아이는 읽을 수 없었지만, 나중에 커서 읽어 보고 아빠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애틋한 심정이었다. 아이에게만 편지를 쓰냐는 아내의 불평에도 아랑곳없이 줄기차게 썼다. 1년 7개월간 200통에 달했다.

    누리야! 갑자기 교도소의 전기가 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18시 50분경부터 19시 35분경까지. 대낮이 아닌 밤중에 벌어진 일이다. 감옥 안은 24시간 내내 밝기 때문에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전압기 파열 때문이었다고 방송이 나오는구나.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1년 만에 누려본 깜깜한 밤이었다.

    재소자들의 아우성 소리를 듣고, 경비교도대원들의 움직임을 보다가, 마룻바닥에 누워 두 눈을 감았다. 좋더구나. 눈을 감은 눈꺼풀 바깥의 색깔이 검었다. 어두웠다. 희거나 밝지 않고. 1년 내내 희고 밝은 상태에서 잠들었는데. 그렇게 누워 오랜만의 어둠을 만끽하고 누리를 생각하다가 전기가 다시 들어와 일어났다. 전깃불을 끄고 잠들 수 있는 것이 큰 행복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오늘 삼촌이 다녀갔다. 아빠가 내놓은 책들을 찾아가기 위해 다녀간 것이지. 원래 까만 얼굴이 더 까맣고 좀 마른 것 같더구나. 목소리는 힘이 있더구나. 모레 누리가 공연을 한다고 하더구나. 누리가 할머니, 엄마, 삼촌 다 구경 와야 된다, 고 했는데 삼촌이 일 때문에 못 간다고 하니, 몹시 섭섭해 했다더구나. 웃음이 나왔다. 아마 뾰로통한 얼굴이었겠지. 유치원에서 아빠와 함께하는 날, 함께하지 못한 아빠를 원망하며 보였던 그 모습.

    삼촌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서 아빠는 누리의 공연이 몹시도 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꼭 봐야 하는데. 정말 너무나도 보고 싶은데. 너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 짓기도 하고, 한숨 쉬기도 하고.

    누리야. 아빠가 한 가지 약속을 보태마. 앞으로 너에게 다시는 매를 들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누리의 발표회 때는 꼭 아빠가 함께하겠다는 것을. 아빠가 필요할 때가 있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겠다는 것을 약속하마.

    이렇게 약속하면서 아빠는 아쉬움을 달랜다. 그리고 아빠는 엄마가 찍어서 보내주는 사진으로 대신할 날을 기다리마. 우리 누리, 얼마나 앙증맞고 예쁠까. 사랑한다. 꿈속에서 보자꾸나.

    2002년 9월 24일(화), 안양교도소에서

    한3

    나는 감옥에서 딸아이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보내며 그리움을 달랬다

    아빠가 필요할 때가 있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겠다는 약속을 이행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동의만 해준다면 비교적 손쉬울 것 같은 방안이 떠올랐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산에 오르고 있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우적대는 심신을 담금질하기 위해서였다. 산은 아무런 대가 없이 안식과 체력을 주었다. 그 산행에 딸애와 동행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다이어트 한다면서 따랐는데, 산을 곧잘 탔다.

    “고등학교 가면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 힘들 거고, 책상에만 앉아 있어서 살도 많이 찔 테니까, 아빠랑 매주 산에 가자. 체력도 기르고 다이어트도 하고.”

    “음-, 아빠. 그러면 갈 때마다 맛있는 거 사줄 거지?”

    “당연하지.”

    “그래! 좋아!”

    딸은 짧고 경쾌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나는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딸은 앞으로 3년간 꼼짝없이 ‘입시산’을 올라야 한다. 대한민국 입시산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험악하기로 이름난 산이다. 딸애는 산을 오르며 장단지에 알이 박히고 발바닥엔 불이 날 거다. 가방 짊어진 어깨는 뻐근하고 종이 한 장 더 보태지는 것도 버거울 거다. 경쟁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피도 흘릴 거다. 십중팔구 매일 피곤하고, 종종 짜증나고, 주기적으로 압박받을 거다. 악몽에 시달리고, 학교가 지옥 같다는 생각에도 빠질 거다.

    내가 딸의 입시산행을 대신할 순 없지만, 아빠이자 친구로서 딸아이가 외롭지 않도록 더불어 오르고 더불어 내려와야 한다.

    동반산행은 입시에 지칠 딸의 체력 단련에 보탬이 되리라. 경쟁에 조급해질 딸의 인내심을 키우는데도 더할 나위 없으리라. 나에겐 딸의 고민을 자연스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또 딸애가 부딪힐 난제에 머리를 맞대는 시간이 되리라. 상처가 너무 커서 스스로의 치유력이나 내 도움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산의 정령들이 어루만져 주리라. 산은 딸과 아빠와 자연을 교감하게 만들리라. 앞으로 3년, 딸이랑 가능한 많이 산에 가자. 되뇌었다.

    소망 하나를 보탰다. 딸이 먼 훗날 내 나이가 되어 아빠랑 산행했던 장면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회상한다면 나는 얼마나 기쁠까. 어린이날 선물 사 줄 몇 천 원이 없어 쩔쩔맬 만큼 물질에선 더없이 무능했던 아빠지만, 정다운 추억을 선물로 남겨 주었다고 회상한다면, 나는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할까.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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