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례 없는 대중적 분노의 이유
    대한민국의 근본적 개조 위해 필요한 개혁 과제
        2016년 12월 14일 09: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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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2월 9일, 노르웨이의 춥고 흐린 아침에 제가 평소대로 열차를 타고 출근하려고 오슬로 시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초현대적(?) 통근열차인지라, 차량마다 설치된 화면에다가 실시간으로 주요 뉴스 방송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화면을 무심히 보다가 “Sør-Korea” (남한)가 들어가 있는 제목을 보자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Sør-Korea”가 노르웨이에서 뉴스에 올라가는 일도 별로 없는데 무슨 연고인지 하도 궁금해 온몸이 무의식적으로 긴장돼버렸습니다.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이었습니다. 가결이 되자마자 노르웨이를 포함한 전 세계로 그 소식이 실시간으로 날아가 많은 나라에서 “주요 뉴스”로 방송된 셈이죠. 머나먼 노르웨이까지 포함해서요.

    그다지 관계도 많지 않은 먼 동아시아 나라의 탄핵 소식은, 왜 노르웨이에서까지 이렇게 대접 (?)을 받고 다루어졌을까요? 무엇보다는 “백만 명 시위”, “2백만 명 시위”의 위력은 컸습니다. 노르웨이 전국의 총인구는 약 5백만 명인데, “2백만 명 시위”라면 노르웨이에서는 대단히 커보이죠.

    그런데 절대적 규모뿐만 아니고 상대적 규모로서도 “2백만 명 시위”란 엄청 큰 것입니다. 총인구의 4%가 동시에 집회에 나서는 경우를, 집회가 많고 치열한 남유럽에서조차도 손쉽게 찾기가 힘들죠. 사실 한국사로서도 1919년 3월 1일의 만세 운동 이후로 인구 비례해서 최고 규모의 시위라고 봐야겠습니다.

    전례 없는 촛불항쟁,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나

    도대체 그 어떤 “운동”과도 그 동안 인연이 없었던 수많은 월급쟁이와 소규모 자영업자, 아이와 노인들이 어떤 이유로 이 정도의, 그야말로 전례 없는 집회열을 보였을까요?

    대통령이라는 최상위의 공인이 그 최측근 사기단에 의해 조종되는, 극도로 무능한데다가 잔혹한 자기애적 성격장애자, 즉 나르시시스트로 밝혀진 데에 따르는 환멸과 분노일까요? 물론 그 요인은 컸겠지만, 가시성이 높은 지배층 인사들의 괴물적인 면모야, 한국에서는 꽤나 자주 드러나곤 합니다.

    노동자들에게 안전장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백혈병으로 사망하게끔 놓아두고, 자택에서 성매매 행위를 벌여 하룻밤 화대로 5백만 원이나 쓰는 삼성가의 이건희, 외국에서 기내 난동을 부려 국제적 구설수에 오른 한진가의 “히더 초” (조현아의 미국식 이름)…”떡값 검찰”이나 “지도층 인사”들의 난교파티, 그 전의 “고급 옷 로비”, “차떼기” 등등 끝이 보이지 않는 부패, 타락, 독직, 폭력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박근혜씨는 좀 심하긴 해도 최소한의 도덕성이나 공공의식마저도 완전하게 결여된 지배층의 총체적 패턴에서 그렇게까지 벗어나지 않습니다.

    최순실 사기단을 매개로 한 국가 사유화에 대한 분노? 물론 그것도 아주 컸겠지만, 그것 역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통령 친인척/최측근의 비리와 재벌가 등 기업과의 관계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필수 메뉴입니다. 이상득, 노건평, 김홍걸, 김현철…대통령마다 최측근 “게이트”들이 계속 터져왔는데, 이번만큼 대중적 분노가 일어난 적은 여태까지 거의 없었던 듯합니다. 즉, 무능하고 도덕의식이 전적으로 없는 “대통령”에 대한 분노와 국가 사유화에 대한 의분 이외의 다른 요인들도 분명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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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의 촛불집회 행진 자료사진

    기존 사회경제 모델의 파탄, 미래 없는 절망이 배경

    제가 보기에는 이명박근혜 시기에 뚜렷해진 기존의 사회-경제적 모델의 파탄이야말로 거의 전례 없는 대중적 분노가 터진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었습니다. 더 이상 재벌/수출 위주의 경제는, 다수의 경제적 안정은 고사하고 성장이나 고용이라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수출의존도는 2011년에 아예 113%나 달했지만, 다수 노동자, 영세민의 실질소득이 제자리걸음이거나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수출마저도 잘 안 돼 중산층의 붕괴, 빈곤화 현상이 보다 현저해진 것입니다.

    수출이 안 되는 것은, 시기적인 세계적 침체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한국이 지역적인 노동분담 구조에서 차지하는 “틈새”의 장기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만드는 배나 휴대폰 등만큼의 양질의 제품을, 이제 중국에서도 훨씬 더 싼 가격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는 특히 아직도 노동시장에 진입조차 못한 청년들부터 무서운 압박을 받게 됩니다. 통계상 청년층의 실업률이 약 10%라 하지만, 취직 포기자 등까지 포함하면 4명 중 한 명 꼴로 일을 못 찾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거의 같은 수준의 청년실업률이지만, 프랑스와 달리 한국청년들이 기댈 수 있는 복지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청년들이 “하야 집회”에 운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무능한 박근혜씨는 물론이고, 그녀가 대표하는 “정치계급” 전체가 젊은이들을 헬 속으로 집어넣고 있다는 것을 매일매일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재벌 본위의 수출 모델이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특히 노인과 청년들의 빈곤과 실업, 소외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고 수백만 명의 가정들이 빚으로 살아가야 하는 오늘과 같은 시점에서, 집회에 나서는 민중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가짜 “대통령”의 하야와 구속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사회-경제모델의 교체입니다.

    질 나쁜 비정규 일자리, 빈곤, 실업에 허덕이는 수백 명의 헬조선 피해자들을 돕자면, 삼성의 주요 계열사들이 당장에 공유화되지 못해도 적어도 일본이나 북유럽 수준의 기업세 (30-40%)를 내고 비정규직 양산 등을 못하게끔 철저한 노동자/사회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이재용 등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재벌계 범죄자들이 재산 몰수와 구속을 당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걸 넘어서 부유층 전체가 스웨덴-노르웨이처럼 60% 정도의 소득세를 내는 세상을 지향해야합니다. 취업이 몇 년 동안 잘 안 되는 상황에 놓인 청년 등이 기아의 위협으로 인해 최저임금 이하의, 최악의 착취적 일자리에 들어가지 않게 하자면 적어도 보편적인 기본소득의 지급부터 제도화돼야겠습니다.

    궁극에 가서는 자본주의 그 자체는 철폐 대상이 돼야 하지만, 거기까지 지금 당장에 못가더라도 적어도 노동자, 영세민을 위한 기본적인 사회 민주적 개혁들을 빠른 대로 이루어내야 하겠습니다. 그런 개혁들은, 현재 한국의 경제적 규모로서도 이미 충분히 가능합니다. 한국보다 1인당 소득이 약간 낮은 체코나 슬로베니아에서도 무상 의료/대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가요?

    결국 “박근혜 구속, 재판”과 함께 “범죄적 재벌가들의 구속과 재산 몰수”, 그리고 “무상 의료, 대학 교육까지의 무상화, 부유세 징세, 비정규직 철폐, 기본소득제 실시”까지 촛불 집회의 구호가 돼야 우리는 진정으로 이명박근혜의 시기가 만들어놓은 문제들을 부분적으로나마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막연한 사회-경제적 불만을 배경으로 하여 광장에 나선 사람들이 그들 불만의 실체를 제대로 직시하고, 그들의 불만을 해소시킬 수 있는 정치적 노선을 채택할 수 있는가 라는 거죠. 결국 지금이야말로 민중 정치를 위한 절호의 기회입니다. 민중, 진보정당들이 촛불 대중들의 급진화에 성공하면, 대한민국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바뀌는 날이 꼭 머지않아 올 겁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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