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유재의 도난과 탈환,
    함부르크의 갱에비어텔
    [아트살롱] 문화적 생산성과 창조성
        2016년 12월 13일 11: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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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갱에비어텔의 점거 첫날, 여러 집들 중 하나에 그려진 벽화, 즉 아주 점잖지만 신랄하게 적힌 집의 시세들 사이를 연결하는 하나의 긴 선이 있다. 그 선으로 연결된 어느 집의 벽화에는 “허락을 구하는 것보다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 더 쉽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점거할 테니, 허락을 해달라는 것보다는 우선 점거하고, 이후 점거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 더 쉽다는 뜻일 게다. 물론 이 사람들은 결코 용서를 빌 생각이 없다. 오히려 이 문장은 함부르크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부르크 사람들이 무엇을 실행하려는 것인지와 관련이 있다. 이들은 함부르크에 있던 창조적 반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함부르크 갱에비어텔 전경

    함부르크 갱에비어텔 전경

    장소를 점거하고, 개방하고 이를 유지하려는 용기와 의지가 없었다면, 오늘날 함부르크는 베스트베르크(Westwerk: 오래된 갤러리이자 클럽), 캄프나겔(Kampnagel: 함부르크의 이벤트 장소), 포어베르크슈티프트(Vorwerkstift: 아트센터), 하펜슈트라세(Hafenstraße), 파크 픽션(Park Fiction) 그리고 그와 유사한 장소들도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장소들은 나름의 주도권을 가지고 문화창조자들과 예술가들이 쟁취한 장소들, 즉 전시를 위한 장소이자,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만들어주는 장소, 들끓고 서로 교류하기 위한 장소, 심지어 작가들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있어야 할 장소들이었다.

    함부르크에는 70년대와 80년대 이후 이러한 장소들이 점거되고 확장되었으며, 활력을 되찾았다. 오늘날 이러한 장소들은 예컨대 춤 공연장이자 음악 공연장 및 야외극장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캄프나겔과 같이, 그리고 성 파울리교회 인근에 있는 최초의 상향식 도시개발프로젝트인 파크 픽션과 같이 종종 저항의 장소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처럼 최근 20년 동안 함부르크에서 인기가 많았던 유명 골목들이 큰 변화를 겪었다. 예전의 슈무델 골목(Schmuddelviertel), 샨첸 골목(Schanzenviertel), 카로 골목(Karoviertel), 그리고 성 파울리 골목은 노동자 골목의 위상에서 최신 유행 도심지구로 승격되었다. 투자자들과 도시개발을 도모하는 정치가들이 이러한 도심지구에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반대로 여기서 자신만의 분위기와 매력 그리고 삶의 질을 부여하려는 사람들은 더 이상 살기 힘들어진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전형적인 방법이 여기 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방은 공익과 무관했다. 공동체적 영역은 사라졌고, 여기서 활동하던 창조적 인사들은 국제적 수준의 도심지의 마케팅을 위해 이용당했다. 그래서 이들 창조적 인사들은 “우리의 이름으로 함부르크를 팔지 말라!”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 주장은 국제적 주목을 끌었다.

    성장하는 도시에서 창조적 도시로 변모하면서 함부르크는 다양한 창조계급들과 기존의 하위 문화 그리고 반대량문화(Off-Kultur)(2)의 잠재성을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이용한다. 그리고 일단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면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은 추방당하기 쉬운 상황에 놓이다. 그래서 경제적 가치 절상을 위한 희생양이 되기 일쑤다.

    이 기간 동안 독일에서는 등록금제도가 도입되었고, 임대료가 급격히 올랐다. 이와 동시에 아틀리에들이 폐쇄될 위협에 휘말렸다. 이런 상황에서 함부르크의 예술가들은 베를린으로 떠나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베를린은 상대적으로 낮은 임대료에 많은 작가그룹들이 모여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저항을 위한 자기 이해와 동기를 강화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변화를 위한 엄청난 에너지와 확고한 의지들이 생겨났다. 이런 의지는 연대를 위한 의지가 되었다. 작가들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나 관청이 연간 수익에 대한 압박 때문에 사익을 노리는 투자자들에게 도시개발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정치적 무능의 소치이다. 이에 시민들이 나서서 이런 정치와 정부기관의 무능에 대항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 파울리 교회 인근의 제네비어텔(Szeneviertel)(3)에 있는 오래된 우시장의 개발을 둘러싸고 다양한 발의들이 있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 장소를 “뮤직홀”로 만들기 위해 성공적으로 싸웠다.

    그럼에도 이미 결정된 계획들의 승인에 개입한다는 것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발의들은 “욕망의 생산”을 넘어서 대안적인 기획과정에 이르지 못했다. 이 틈을 타, 함부르크에는 이케아(IKEA)같은 거대 회사나 유통업체들이 들어오게 된다. 덕분에 함부르크의 서민들과 예술가들은 누누이 추방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다.

    그런데 알토나 도심지구에 정착했던 예술가들의 거주지인 프라이제(Frise)에서 중요한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이들은 하나의 동업 협동조합의 형식을 띤 방법을 택했는데, 이들은 일종의 세습임차권의 형태로 자신들이 거주하는 건물을 인수했던 것이다. 이는 생존을 위한 유일한 자구책이었다. 이들은 힘들고 험난한 투쟁을 통해 2008년 하나의 성과를 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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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갱에비어텔의 옛모습

    갱에비어텔에도 이와 같은 창조적 반대세력들이 있었다. 갱에비어텔에는 1990년에 개축된 1650년도의 건물이 있었다. 시 소유의 그 집들을 도시의 주택건설조합(SAGA/GWA)과 슈프링켄호프 주식회사(Sprinkenhof AG)가 관리했다. 이 회사는 여전히 그 장소에 3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재개발되지 않았고, 그 사이 가치 있는 주거공간과 상업공간은 점점 낙후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그 결과 2003년에는 그 집들에 거의 모든 세입자들이 떠나버리고 소수의 사람들만 남는다.

    그런데 2003년에 함부르크시는 갱에비어텔의 2900평방미터에 달하는 토지를 투자그룹회사(Fuchs & Werner)에 최고가로 팔아버렸다. 그 구매자는 도시의 그 구역을 제대로 기억할 만하게 재개발하겠다고 하면서 베를린에 있는 하케쉔 회페(Hackeschen Höfe)를 본 따서 갤러리지구와 쇼핑지구를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2006년에는 앞의 두 파트너 회사 중 하나인 푹스(Throsten Fuchs)가 드레스덴의 부동산 중개업소들과 함께 사기와 공문서위조로 인하여 뤼베커의 지방법원청사에서 5년 반 동안의 금고형을 받게 되었다. 이에 베르너(Werner)사는 2006년 3월에 갱에비어텔을 위한 새로운 파트너를 제안했다. 네델란드계 회사인 한체바스트(Hanzevast) 캐피탈 부동산 펀드회사가 그것이다.

    2007년 초에 113개의 주거지구와 상업지구를 위한 건설이 착수되어야 했다. 그러나 2007년 10월 즈음에 여전히 그 어떤 작업도 진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허용된 것보다 더 많은 투자자들이 투자를 진행하고 증액했다. 함부르크 중구청장인 마르쿠스 슈라이버(Harkus Schreiber)는 구매자들에게 최종적으로 건축신청을 하라고 제안을 했다. 이후 건물들은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허물어졌다.

    2008년 한체바스트가 최초 구매자들로부터 갱에비어텔에 관련된 기획을 완전히 넘겨받았다. 그 어떤 건축신청서도 제출하지 않고서, 한체바스트는 2008년 9월에 중구청과 최종적으로 하나의 도시 건축을 위한 계약을 체결한다. 그 계약은 투자자들에게 광범위한 계획권을 풀어주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계획서에 따르면 갱에비어텔에 있는 두 집을 완전히 철거하는 것을 전제로 2009년 초에 건축을 시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대응하듯 주민들과 예술가들은 수년이 지나더라도 같은 지역 속에서 활용되어야 하는 건물들의 대안적 사용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2개의 갤러리들과 4개의 아틀리에가 건설되었다. 이것들은 임시로 예술가들이 활용하게 될 것이다. 도시의 주택건설조합인 (SAGA/GWA)과 투자자들이 사용을 위한 협약을 끝낸 이후에 그 공간을 내놓은 터였다. 언론들에 주목을 받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집들과 공간들을 알리기 위해, 그 집들의 일부는 기념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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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체바스트의 구상 vs 갱에비어텔의 구상

    그러는 사이 이전의 창조적 반대 단체들을 결합하여 갱에비어텔에 “세포들”이라는 단체가 창립된다. 그리고 곧바로 2009년 1월에 매주 화요일 저녁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는 임시사용자(Zwischennutzer) 그룹을 창립한다. 창립 첫날 저녁에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 그리고 특히 갱에비어텔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후의 점거를 이끌어내고 대항적 모델, 즉 갱에비어텔을 위한 대안적 구상을 생산하기 위해 토론하기 위해서 많은 전문가들이 초대되었다.

    또한 ‘도시에 대한 권리’ 네트워크도 창립된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역사적 유산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었고, 보존하는 건물을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자신들의 작업과 문화적 다양성을 상업논리에 뺏기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2009년 초에 집들을 점거하기로 결단을 내렸고, 12채의 집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관점을 교환하고 토론을 진행했다.

    예술가들에 의해 주말에 은밀히 건물들이 탐색되고 측량되었다. 파손된 부분들은 수리되고 완벽한 기본계획들이 수립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완벽히 건물 수리를 시행했다. 다른 그룹들은 공적인 작업을 기획했다. 즉 로고가 나왔으며, 로고 인쇄를 위한 개별적인 계약들이 체결되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초대장이 만들어지고 전략이 수립되었다. 마찬가지로, 200명이 넘는 예술가들을 행동에 참여시키기 위해 그리고 이들을 전시에 초대하기 위해 은밀히 소통해야만 했고, 이를 위해 모든 네트워크가 가동되었다.

    그러나 2008-2009년 겨울 금융위기로 인해 재개발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함부르크에 있는 건물들 중 몇몇은 매각되거나 신축 예정이었고, 다른 건물들은 여전히 낡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임대료가 매우 가파르게 상승했기 때문에 명백히 더 이상 건물을 매각할 수 없는 상태였다.

    슈데도이체(남독일) 신문은 2009년 4월 25일자 기사에 “지하주차장의 도시”라는 표제를 달고 틸 브리겔프(Till Briefelb)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임박한 갱에비어텔의 전면적 재개발을 모든 역사적 가치를 상실한 그래서 그저 진부한 의미에 불과한 정체성 상실의 도시로 만든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09년 6월에 한체바스트는 금융위기로 인하여 중구청과 국세청에 갱에비어텔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한 협조융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그러면서 갱에비어텔 건축 기획이 일시 중단된다. 예술가 그룹들에게 이것은 그들의 기획을 공론에 부치고, 대안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에 부응하듯, 2009년 7월 21일자 함부르크 석간신문에, 한체바스트가 건축을 시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비어텔의 모든 집들을 임시사용(Zwischennutzung)할 수 있도록 무상으로 제공하라는 예술가들의 공개요구를 기사로 실었다.

    점거는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점거가 이루어진 날인 2009년 8월 22일과 23일에 3000명이 넘는 방문자들이 찾아왔고, 신문과 매체들이 한목소리를 내주었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이후 정상적인 삶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비영리 기업이 서서히 생겨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프로젝트를 위하여 자신의 연구와 노동 그리고 사적인 삶들을 적어도 짧게나마 내주었으며, 그곳에 있는 공장과 인쇄소의 반환이라는 업적을 이루어낸다.

    계속해서 이후 함부르크 시민 수천 명의 후원을 통하여 정부는 투자자인 네델란드 투자기업 한체바스트와의 매매계약을 철회했다. 그리고 2009년 12월 16일에 이 장소에 대한 재매입을 공개적으로 수행한다. 발의자의 입장에서 이것은 역사의 이정표이자, 거대한 성과였다. 덕분에 집의 미래와 집의 활용에 대하여 더 진전된 토의들이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갱에비어텔의 행사 콤인디갱에 (1)

    콤인디갱에2

    갱에비어텔골목사진

    갱에비어텔승리기사

    위부터 갱에비어텔 행사, 콤 인 디 갱에, 갱에 비어텔 골목, 갱에비어텔 승리 기사

    2010년 1월에 도시개발국이 도시건축구상을 위한 토론을 진행했고, 3월에 함부르크 시는 갱에비어텔을 더 이상 팔지 않기로 결정한다. 계속해서 3월에서 9월에 걸쳐 갱에비어텔을 위한 통일적 발전구상(IEK)이 완성되었지만, 집권여당의 분열과 이를 통한 재선거 시행으로 그러한 구상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사기업인 도시개발회사 STEG가 주거행정을 넘겨받으면서, 기존의 사용협약은 중단된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갱에비어텔협동조합은 그해 11월에 회사로 등록한다. 2011년 2월에 재선거가 실시되고 독일 사민당(SDP)이 제1당이 된다. 갱에비어텔측은 이들과 협약을 체결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한 덕에, 당해 9월 갱에비어텔 협동조합의 포괄적 개입을 허용한 협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12월에 갱에비어텔 건축위원회를 설립한다.

    그러나 정작 12년 1월에서 13년 1월까지 건축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 사이 정권 변화, 소유관계의 변화, 소유권에 대한 새로운 규제 등의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갱에비어텔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관청들(Behörde und Amtern)과 합작하여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심포지움이 개최되는 등,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 그 결과 2013년 6월 첫 번째 건물인 쿠퍼디베하우스(Kupferdiebehaus)의 재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9월에 두 번째 건물의 재생이 시작되었다.

    갱에비어텔은 이제 상업적 이용에 희생당하지 않는 장소, 모든 사람들이 접근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장소, 문화적 생산성과 창조성이 샘솟는 장소가 되었다. 갱에비어텔은 도심 중앙에 저항을 상징하는 기념비가 되었다.

    함

    <갱에비어텔 지도 참고>

    1. 인형의 집, 작업공간/발렌틴스캄프가 39번지
    2. 발렌티나 정보센타 및 작업공간, 전시장, 쉼터/발렌틴스캄프가 37번지
    3. 쉼터 시민식당 및 전시 갤러리/발렌틴스캄프가 38a+e번지
    4. 가구공방, 전시장, 상점/발렌틴스캄프가 38f번지
    5. 쉼터, 테라스, 문학인들의 공간/발렌틴스캄프가 38b번지
    6.가족들의 공간 및 작업공간/발렌틴스캄프가 38c번지
    7.공장(콘서트, 전시, 바, 화장실, 골목구역의 중심지, 만남의 장소)/발렌틴스캄프가 34a번지
    8. 인쇄소(콘서트, 전시, 문학인들의 공간)/발렌틴스캄프가 32번지
    9. 마부의 집(사용도 다양화, 상점, 교류전시를 하는 아틀리에)/발렌틴스캄프가 328a+b번지
    10. 베이컨커리의 집(음악인들의 공간, 쉼터, 자유용도, 갤러리, 바, 전시장)/슈펙슈트라세가 83-87번지
    11. 동으로 도금된 집(예술 시계 갤러리, 바, 화장실, 공예품 노점)/카파마허라이가 43-49번지
    12. 유피의집(젊은이들의 쉼터 및 작업실)/카파마허라이가 37-39번지

    <참조>

    1. 이 글은 2013년 4월 25-27일 Institute of International Maritime Affairs(IMA)에서 주최하고 해양대에서 열렸던 제3차 국제 컨퍼런스(the 3rd International Conference of the World Committee of Maritime Culture Institutes(WCMCI)의 자료집에 나온 크리스티네 에벨링의 글을 필자가 번역하고 요약한 글이다. 이 글은 예술잡지 <비아트>에 [함부르크의 갱에비어텔(Das Gängevierteil in Hamburg)]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이 글의 구체적인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Christine Ebeling, “Das Gängevierteil in Hamburg”, Dynamism of Seaport Cities: Sociocultural Acculturation and Creation, IMA, 2013, 267-275쪽.

    2. 여기서 반대량문화라고 함은 기존의 대중문화적 입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응하면서, 관주도적 문화에도 비판적이다. 그러면서도 자립적(DIY)으로 소규모 커뮤니티로 형성된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들이각각 독립성을 지니며 서로 연계하여 축제를 여는데, 이를 반대량문화 페스티벌이라고 한다.

    3. 역주: 도심 근처의 저렴한 월세지역으로 젊은 예술가나 학생들이 유입되어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고 사회 문화적 다양성이 발생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이런 곳이 주로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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