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과 촛불 그리고 ‘무임승차자’
    [과거와 현재] 역사의 수레바퀴 굴러가는 한 이유
        2016년 12월 13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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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람으로 3.1운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해서 병합 후 이른바 무단통치에 대해 10여년간 쌓인 불만, 물론 착각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유학생을 통해 알려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전민족적’ 반일 시위가 폭발한 것이 3.1운동이다.

    그렇다면 3.1운동은 성공했는가? “대한 독립 만세”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실패했다. 독립은커녕 그 근처에도 못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대대적인 반일 시위의 폭발은 여러 가지를 가져왔다. 표준적인 역사서술을 통해 잘 알려져 있듯이 일제는 문화통치로 전환했고(엄밀히 말하면 이 전환은 3.1운동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3.1운동이 그 속도와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에 따라 한국인에게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언론과 활동의 공간이 열렸다. 3.1운동은 아무 성과도 없었다, 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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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19.3.30. ‘소요사건의 후보後報’라는 제목으로 여러 지방 도시에서 계속되는 시위 소식을 전하고 있다. 3월 30일, 3.1운동이 일어난지 꼭 한 달 뒤이다.

    처음에 3.1운동을 촉발시킨 주체는 학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점차 노동자, 농민 등이 참여하면서 시위가 확대, 격화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실제 3.1운동의 전개 과정을 그나마 알 수 있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아다시피 1919년 당시의 유일한 한글 신문이다.)를 보면 각 지방의 만세 시위는 3월을 지나 4월 말, 심지어 5월까지도 드문드문 계속되었다.

    사건을 ‘축소 은폐’해야 할 총독부 기관지에 이만큼 보도된걸 보면 시위의 실제 양상은 더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래 그래프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모 검정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것만 보더라도 3.1운동의 시위 참여 인원은 근 200만에 가까우며, 사망자만 수천에 이른다.

    그런데 ‘200만’이건 ‘수천’이건 이 숫자는 어딘가 자료에 나오는 숫자이며, 따라서 검거되는 등의 이유로 경찰에 파악된 인원이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나다. 일반적으로 식민지시기 인구를 ‘이천만 동포’라고 한다. 더구나 1919년에는 이천만이 절대 넘지 않았을 텐데, 그 중 경찰에 파악된 시위 참여자만 1/10 정도이다. 말 그대로 ‘전민족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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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도별 3.1운동 참여인원, 사망자 현황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생각해볼 점이 있다. 이 ‘전민족’에 포함되는 게 학생, 노동자, 농민뿐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절대 다수는 학생, 노동자, 농민 즉 이 시기의 ‘민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3.1운동의 ‘전민족적’ 성격을 완성한 것, 그리하여 결국 일정한 성과로 이어지게 한 마지막 퍼즐에는 좀 다른 부류가 끼어 있었다.

    3.1운동이 점차 확대되면서 확연히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식민지권력의 최말단을 떠받치고 있던 한국인 하급 관공리들(이른바 ‘면서기’, ‘고원雇員’ 등)의 잇단 사직과 만세 시위 참여였다. 나아가 하급 관공리뿐 아니라 지방에서 한국인 군수들이 만세 시위에 동정적인 발언을 하거나 경찰서장에게 검거자의 석방을 요구한다는 등의 사실이 속속 보고되었다. 하급 관공리 뿐 아니라 지배체제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고등관’들마저 동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당시 함경남도 도장관(이후의 도지사)이었던 이규완(李圭完)은 고종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연설을 했다고 한다.

    도장관인 이규완은 국장(國葬; 고종의 장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흥군에서 내선인(內鮮人; 일본인과 조선인) 출영인에 대해 말하길, 이번 소요는 당연한 것이다. 왜냐 하면 정부는 내선인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중략) 불공평하다 등의 선동적인 연설을 하여 내지인(일본인)으로서는 차마 들어줄 수 없을 정도였음에도 조선인은 대단히 기뻐했다고 합니다. 한 도의 장관이 이미 이와 같을진대 그 이하는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1919.3.25., 함경남도 함흥군 군서기 아카츠카(赤塚敬雄)의 정보 보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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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기 함경남도 도장관 이규완

    도장관(도지사)은 식민지시기 전 기간 내내 한, 둘의 예외를 제외하면 한국인에게 허용된 최고위급 자리였다. 이규완(1862-1946)은 원래 박영효의 식객으로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했으며 이후에도 망명과 귀국을 반복하다가 1907년 고종이 퇴위하면서 비로소 조선에 다시 안착, 출세길에 접어든 인사였다. 병합과 더불어 강원도 도장관에 임명되었고, 1918년에는 함경남도 도장관으로 전임하여 1924년까지 재임했다. 1880년대 이래 일본의 조선 침략과 운명을 같이 해온 인사였던 셈이다. 그런 이규완마저 1910년대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하는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는 언급에서 상황을 능히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부류들은 기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규완이건, 군수들이건, 더 하급의 면서기들이건 3.1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지 않았다. 만세 시위가 예상을 넘어서 확산되자 거기에 편승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런 ‘무임승차자’들까지 탑승했을 때 비로소 3.1운동은 일제의 양보를 얻어낸 ‘전민족적’ 운동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여기에 견줘서 이야기하기에 적절치 않은 면도 있지만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낸 4.19의 마지막에도 이런 ‘무임승차자’들이 있었으며, 6.29를 이끌어낸 6월 항쟁의 끝에도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있었다.

    2016년 겨울, 우리는 대통령은 물러나라고 외치는 촛불이 10만, 20만에서 시작하여 몇 주 만에 200만을 돌파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놀랍지 않은가? 촛불을 든 시민들은 다 누구였을까? 새삼스럽지만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들 중에도 ‘무임승차자’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먼저 결사하고, 먼저 일어서는 선구자 없이 역사는 진전되지 않지만, 반대로 이런 ‘무임승차자’ 없이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필자소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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