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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모
    [몬드라곤②]라보랄쿱챠, 에로스키
        2016년 12월 08일 02: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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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수-1 ‘스페인 몬드라곤을 가다’ 링크

    라보랄쿱챠(Laboral Kutxa) ; 신용협동조합

    라보랄쿱차는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에서 노동인민금고로 번역되어 소개된 카하라보랄(Kaja Laboral)과 이파르쿱차가 합병된 신용협동조합입니다. 원래 카하라보랄은 파고르 등 제조업부문을 지원하기 위한 은행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세 마리아 신부가 억지로 설립하다시피 했지만 이후 MCC체제로 전환될 때까지 몬드라곤 그룹의 핵심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카하라보랄의 기업국은 신규 조합의 인큐베이팅과 컨설팅 등의 서비스를 하면서 그룹을 지도해 왔습니다. 자금과 컨설팅을 배경으로 몬드라곤이 확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MCC체제를 거쳐 그룹화되면서 카하라보랄의 기업국은 헤드쿼터로 이전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역은행인 이파르쿱차를 흡수하여 본격적인 소매금융으로서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Kutxa는 바스크어로 은행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라고 통역 하시는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스크어는 스페인어와 전혀 다른 언어입니다. 사투리 같은 게 아니어서 따로 배우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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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보랄쿱차는 이제 몬드라곤을 받치고 있는 지원조직으로서의 의미보다는 그룹 내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내는 부문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시대를 지나오면서 몬드라곤 역시 파고르 등 제조업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면 지금은 금융부문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의 노동인민금고(Kaja Laboral)하고는 성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 기능은 지금 그룹 본부인 헤드쿼터로 옮겨갔습니다.

    라보랄쿱차가 유럽의 다른 신용조합과 다른 것은 은행의 클라이언트인 이용자가 중심이 아니고 은행의 노동자가 핵심 의사결정자입니다. 즉, 엄밀히 말하면 신용조합이라기보다는 은행업을 하는 노동자협동조합의 성격이 강합니다. 물론 금융소비자들도 조합원이긴 하지만 의사결정지분이 약 20%에 불과하고, 조합원도 굉장히 선별해서 받는다고 합니다.

    추측으로는 몬드라곤 정신을 잘 이해하는 그룹 내 다른 기업의 조합원들이 소비자 조합원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금융소비자들이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금융소비자보다는 오히려 그룹의 관계기업들이 더 영향력이 있습니다.

    유럽 금융위기 이후, 우리는 라보뱅크 등의 신용조합이 위기를 버티면서 협동조합은행이 주목받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유럽중앙은행(ECB) 등 금융기관들은 협동조합은행을 신뢰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금융소비자들은 위기 때 은행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협동조합 측에서는 여러 반박을 하고 협동조합은행이 어떻게 위기를 넘기고 있는지에 대한 자료를 발표하고 있는데 한국에는 그 자료들이 들어오면서 마치 유럽이 금융위기 이후에 협동조합은행에 열광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금융위기 이후로 신협들이 많은 압박을 받고 있고 스페인에서도 협동조합 성격의 은행들이 상업은행으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보랄쿱차도 유럽중앙은행 등의 압박을 견디면서 사업을 키워가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고, 다른 신용조합과 다르게 노동자 조합원과 그룹 내 기업들이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은행을 운영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라보랄쿱차는 합병 이후에 본격적인 소매금융으로서 자리를 잡고, 몬드라곤 계열사 중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내는 곳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세후이익이 1억 1천만 유로에 달하고 이 중 15%는 헤드쿼터로 이전되어 다른 협동조합을 지원하는 데 쓰입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합병 이후에 이파르쿱차의 젊은 노동자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카하라보랄의 노동자 조합원은 나이가 많은데다 소매금융으로서의 경험보다는 몬드라곤 내 기업을 지원하는 역할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파르쿱차의 경험이 더해져서 고객 중심 경영이 강화되고 몇 년째 고객만족도 측면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업무도 상당히 체계화되어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몬드라곤 계열사 대출은 전체 대출의 2.5%에 불과합니다. 주력부문은 가계대출인데 부동산 관련 대출이 100억 유로에 달하여 전체 대출의 70%를 웃돌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수익 중심의 소매금융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제 금융이 제조업을 돕는 지원조직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그룹의 수익원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업을 지원함으로서 얻는 리스크는 헤드쿼터에 수익의 15% 떼어주고, 이제는 전혀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헤드쿼터에서 쓰는 자금의 절반이 라보랄쿱챠의 수익분담금이라고 하니 라보랄쿱챠가 그룹의 수익원으로서 굉장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라보랄쿱차를 통한 기업들의 자금 수요가 거의 없어졌다고 합니다. 유럽의 기준금리가 이미 마이너스이고 경기부양책으로 대출받기가 너무 쉬워져 라보랄쿱챠가 아니더라도 대출받을 곳이 많고, 심지어는 정부에서 상당한 창업자금을 풀고 있기 때문에 굳이 라보랄쿱챠의 자금으로 그룹 내 인큐베이팅을 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몬드라곤이 탄생했을 때, 카하라보랄이 필요했던 이유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라보랄쿱차의 변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리스크가 적은 곳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는 것이 이제 라보랄쿱차의 역할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통화정책은 언제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하면 라보랄쿱챠가 몬드라곤의 자금원 역할을 또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라보랄쿱차를 보면서 몬드라곤의 성장은 절대로 시대에 역행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조업의 시대에는 제조업을, 금융의 시대에는 금융을 하는 것이 몬드라곤입니다. 그 안에 몬드라곤이 갖는 가치는 ‘인간적인 일’, 그것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아마 몬드라곤에 대한 비판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 ‘인간적인 일’은 바스크 지역의 주민을 위한 것이고, 또 그 일의 내용이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고민은 덜 하기 때문입니다.

    에로스키(Eroski) : 소비자협동조합

    오늘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에로스키입니다. 에로스키는 주로 바스크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만, 스페인 전역에 걸쳐 있고, 1,860개의 지점이 있습니다. 식료품 매장뿐만이 아니라 안경점, 헬스케어, 여행사, 주유소 등이 있습니다.

    에로스키는 1969년에 설립된 소비자협동조합이지만, 다른 소비자협동조합과 다르게 노동자 조합원이 중요한 소유자이자, 의사결정자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일’을 중요시 여기는 몬드라곤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유럽의 소비자협동조합의 노동자는 소유자로 참여하지 않고,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협동조합 거버넌스에 참여합니다. 일종의 산업민주주의로서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이 조합의 매장 경영을 함께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에로스키는 노동조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조합원이 직접 소유주로서 경영에 참여하는 모델입니다.

    한국에는 흔히 다중 이해관계자 협동조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중 이해관계자라는 것은 사회적 협동조합이 사회서비스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직접 이해당사자(사회서비스 노동자, 수혜자, 지역주민, 자원봉사자 등)가 중요한 의사결정자로 참여함으로써 서비스의 근린성을 높이고, 이를 통해 훨씬 효과적인 서비스를 만들어간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에로스키는 다중 이해관계자 협동조합이라기 보다는 소비자협동조합의 산업민주주의가 내부화되어 있는 모델이라고 여겨집니다. 유럽의 다른 소비자협동조합도 노동자들이 소유자로서 참여하지 않는 것이지 노동조합을 통해 중요한 의사결정자가 되기 때문에 에로스키는 이를 소유자로서 내부화한 것만 다르지, 다른 면에서는 소비자협동조합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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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자 조합원은 약 700만 명이고 매출의 70%는 소비자 조합원의 구매입니다. 지금 매달 회비를 내는 소비자 조합원 제도를 추진 중이고, 이들에겐 특별한 서비스가 제공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노동자는 2015년 기준으로 33,509명이고, 조합원은 11,858명입니다. 에로스키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중간관리자 이상 직책이 2,864명인데, 이중 여성이 64%라는 점입니다. 여성 친화적인 기업을 지향하고 있음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에로스키는 2007년에 카탈루냐(바로셀로나가 있는) 지역의 대형 유통업체인 카프라보(caprabo)를 인수하면서 노동자 수가 크게 늘었는데, 당시에 조합원 비율을 80%로 높이는 결의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카프라보의 노동자들이 소유자로 참여하기 위한 교육 등을 진행하고, 조합원 가입을 유도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유럽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에로스키의 경영이 어려워져 계획이 중단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에로스키는 매년 적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 다시 조합원 가입 계획을 추진 중에 있고, 3년 내로 80%까지 가입률을 올릴 것이라고 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로스키는 소비자 조합원과 노동자 조합원이 각 250명 씩 대의원을 선출하여 총회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현재 이사장은 소비자 조합원입니다. 이것을 제외하면 상품 공급과 매장 운영을 위한 소비자위원회를 구성하고, 매장에 마련된 교육장에서 매달 2~3회의 교육이 진행됩니다.

    교육장은 한국의 생협과 유사합니다. 주로 식생활교육이 이뤄지기 때문에 조리할 수 있는 싱크대와 각종 조리기구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다른 매장에는 없는, 에로스키만의 자랑이라고 굉장히 강조를 했는데, 한국의 생협에서 항상 봐 오던 것이라 리액션이 부족해서 돌아보니 조금 미안했습니다.

    매장의 납품회사는 모두 10,335개인데 그 중 절반 이상이 해당 매장이 위치한 지역의 기업입니다. 지역 제품을 소비한다는 점이 강조 포인트 중 하나였는데, 이들이 거버넌스에 참여하냐는 질문에는 아주 단호하게 ‘no’라 했고, 심지어는 참여하면 안 된다는 뉘앙스로 답변을 했습니다. 소비자의 권익을 위해선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에로스키는 스페인 유통부문에서 4위인 기업이고, 바스크 지역을 비롯해서 몇 개 주에서는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빌바오의 호텔 바로 옆에도 ‘Eroski city’라는 매장이 있습니다. 에로스키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홈플러스 수준의 대형매장이어서 시내 외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시내에는 슈퍼나 하이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게 ‘Eroski city’인 것 같습니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정도 됩니다. 이 외에 안경점이나, 여행사들이 간혹 보이고, 심지어는 주유소도 있습니다.

    에로스키는 2015년 말 매출이 2014년보다 약 2억 유로 늘어난 62억 7천만 유로에 달합니다. 그러나 개선되고는 있지만 2015년에도 6천만 유로의 적자를 보고 있습니다. 마드리드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매장을 모두 매각하여 철수하였고, 일부 작은 매장들만 프랜차이즈 매장으로 개인에게 분양을 했다고 합니다. 프랜차이즈가 그룹의 중요 정책으로 보이진 않지만, 가맹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점은 일반적인 소비자협동조합과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contigo’라는 슬로건을 비전으로 세워 홍보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라는 의미인데, 최근 화두인 지속가능성에 대한 슬로건인 것 같습니다. contigo 의 핵심 내용은 소비자의 건강과 친환경, 그리고 지역생산물 소비입니다. 마드리드에 살고 있는 가이드는 에로스키에 대해서 약간은 2류 유통업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데, 아마 이게 바스크를 제외한 스페인의 일반적인 시민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가이드는 주로 까르프를 간다는 것을 봐서는 까르프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에로스키는 contigo라는 비전을 내세우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로스키는 GMO 제품은 전혀 취급하지 않는다고 하고, 저염-저지방, 그리고 달지 않는 식생활을 통해 비만을 줄이고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음식은 식당에 들어갈 때마다 소금을 줄여달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정말 짭니다. 후식은 또, 무지하게 달달하고요. 며칠 이렇게 먹었더니 에로스키의 캠페인이 확 공감이 갑니다. 우리나라 음식이 맵고, 짜다고 하는데 여기 짠 정도는 그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에로스키 내에 건강과 영양을 연구하는 팀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소비자 조합원들과 대대적인 식생활 개선 캠페인에 나서고 있습니다. 매달 매장에서 이뤄지는 교육도 이 캠페인의 일환인 듯합니다. 그리고 에로스키 매장에 판매하는 가공식품에는 모두 성분표시를 의무화하고 있고, 따로 에로스키 브랜드를 달고 있는 상품들은 더욱 자세한 식품성분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파일럿 사업으로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매장을 기획 중에 있다고 합니다. 화석에너지 사용 제로 매장인 셈입니다. 아직은 개발 중이라고 하지만 이런 매장이 들어서면 정말 큰 반향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에로스키는 이렇게 소비자 중심의 건강-친환경-지속가능성을 비전으로 새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언뜻 보면 한국의 생협과 비슷한 지향으로 가고 있는 셈입니다. 어쩌면 한국의 생협이 영감을 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협과 비슷한 모습으로 비전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로스키의 이런 변화가 한국의 소비자협동조합에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라 보여 집니다.<계획>

    필자소개
    대전사회적경제연구원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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