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
    [그림책]『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시모나 치라올로/미디어창비)
        2016년 12월 02일 05: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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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제목, 더 착한 표지

    저는 착한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착하기만한 사람이 별로 매력이 없는 것처럼, 너무 착한 책도 매력이 없습니다. 그림책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는 제목부터 너무 착해서 별로 매력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표지는 손녀가 할머니를 껴안고 있는 모습을 중심으로 배경은 분홍색이고 좌우는 꽃으로 장식된, 그야말로 착하고 착한 그림입니다. 저한테는, 한마디로 참 매력이 없었습니다.

    다행이 면지가 좀 흥미로웠습니다. 책장처럼 칸칸이 나누어진 장식장이 있고 장식장 칸마다 독특한 물건들이 보입니다. 호박, 향수병, 머리빗, 장난감 말, 선글라스, 선물상자, 편지묶음, 사진들, 구두, 눈 내리는 유리구슬, 소라껍데기, 반짇고리, 결혼사진, 숟가락. 이제 이 물건들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조금 궁금해졌습니다.

    할머니 주름살

    주름살에 기억이 담겨 있다고?

    오늘은 할머니 생일입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손녀이자 주인공인 꼬마의 눈엔 할머니가 좀 슬퍼 보이기도 하고 놀란 것도 같고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꼬마는 할머니에게 왜 그런지 묻습니다. 할머니는 주름살이 많아서 그렇게 보일 거라고 합니다. 꼬마는 할머니에게 주름살이 걱정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니라며, 주름살 속에는 할머니의 모든 기억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꼬마는 할머니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주름살에 기억이 담겨 있다고요? 저도 못 믿겠습니다. 꼬마는 할머니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기로 합니다. 우선 할머니 이마 가장자리 주름에 어떤 기억이 있는지 물어봅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내가 커다란 수수께끼를 풀었던 이른 봄, 그 아침’이 있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대답을 듣는 순간, 저 역시 할머니가 품었던 커다란 수수께끼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펼쳐 봅니다. 와우!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옵니다. 아무런 글도 없는 한 장의 그림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 봄 그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할머니가 품었던 커다란 수수께끼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때 이마에 주름이 생겼는지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왠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림으로 사로잡다

    이 한 장면이 그림책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를 대하는 저의 태도를 순식간에 바꿔 놓았습니다. 착하고 별로 매력 없는 책에서 완벽한 매력덩어리 책이 되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그림책 작가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림책이라는 장르가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여기는요?”
    “여기에는 내가 가 봤던 최고의 바닷가 소풍이 담겨 있지.”
    -본문 중에서

    도대체 할머니가 가 봤던 최고의 바닷가 소풍은 무엇일까요? 저는 재빨리 책장을 넘기고 싶은 마음을 참았습니다. 잠시 그 순간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습니다. 오 마이 갓! 아까보다 더 큰 탄성이 튀어 나왔습니다. 할머니가 왜 최고의 바닷가 소풍이라고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글 없는 한 장의 그림이 모든 것을 알려 줍니다. 마치 한 장의 추억 사진 같고, 인생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최고의 소풍이 있다

    저도 잠시 제 인생 최고의 소풍을 떠올려 봅니다. 바로 초등학교 2학년 소풍 전날입니다. 저는 언제나 소풍 당일보다 소풍 전날이 더 행복했습니다. 소풍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순간들이 설레고 흥분되었습니다. 특히 그날은 더욱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아마도 1학년 때 다녀온 소풍이 참 좋았나 봅니다.

    엄마는 제 마음을 헤아리고 소풍 가서 먹을 것들을 사오라며 미리 용돈을 주셨습니다. 제가 직접 소풍을 준비할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당장 슈퍼로 달려갔습니다. 사이다와 과자를 잔뜩 골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주머니에 넣은 용돈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자 부모님은 야단을 쳤고 형들은 기뻐하며 저를 놀려댔습니다. 제 인생에서 소풍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속이 상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내자식이 그깟 일에 운다고 또 야단을 맞았습니다. 부모님은 저녁 내내 제 속을 태운 다음 밤이 깊어서야 새로 용돈을 주셨습니다. 신기하게도 눈물이 뚝 그쳤습니다. 죽었던 소풍이 되살아났습니다.

    우리, 잘 살고 있나요?

    내 마음을 울린 책은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한 권의 그림책은 한 가지 추억을 불러옵니다. 보통 한 권의 그림책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는 우리가 살아온 모든 시간을 불러옵니다. 할머니 주름살을 소재로 할머니의 거의 모든 시간을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커다란 수수께끼는 무엇이었나요? 최고의 소풍은 언제였나요? 그 사람을 처음 만나서 무엇을 했나요? 첫 번째 이별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가장 소중한 만남은 언제였나요? 그림책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는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불러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소중하냐고, 무엇이 행복이냐고, 잘 살고 있냐고.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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