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노동, 구사대 동원에 정신질환
유성노동자 산재 승인...그래도 고통
"직장폐쇄가 남긴 상처, 우리 가족에게 너무 커"
    2012년 08월 10일 04: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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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유성기업의 공격적 직장폐쇄 뒤 업무에 복귀했던 유성기업 노동자 A씨(50)는 1년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A씨는 지난해 8월 ‘중증의 우울성 에피소드’ 진단을 받았고 8월 9일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지회에 따르면 최근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는 A씨의 산재요양신청을 받아들였다. A씨의 정신질환을 업무상재해라고 판단한 것이다.

2011년 5월 24일 오후 충남 유성기업에서 경찰이 농성하던 노조원들을 연행하고 있다. ⓒ이명익

지난해 5월 18일 유성기업은 노조의 부분파업 2시간 만에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같은 달 29일 A씨는 파업을 중단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A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유성기업에 바로 입사해 30여 년을 일해 왔다.

공장에 갇힌 남편의 전화 “이러다 나도 죽을지 몰라”

“남편이 전화로 ‘이러다 나도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A씨의 아내 B씨)

A씨는 매일 수시로 아내와 통화하며 일과를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자녀들도 아빠가 하는 업무를 훤히 알 정도였다. 그러던 전화가 새벽 1시가 넘어서야 걸려왔다.

“야식 먹을 때 겨우 전화하는 거라고, 온종일 일하느라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A씨는 지난해 5월 30일부터 7월 19일까지 51일 중 49일을 출퇴근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근무했다. 금속노조 유성지회에 따르면 그는 업무복귀 첫날에 오전 8시 30분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무려 15시간 30분을 일했다. 이어 공장 탈의실에 스티로폼을 깔고 눈을 붙였다가 다음날인 5월 31일에도 12시간 30분을 일했다.

과로와 함께 심각한 긴장 상태에서 오는 불안 스트레스가 A씨를 덮쳤다. 회사 측은 “공장 밖에 있는 파업 참가자들이 위해를 가할 수 있다”며 작업장 출입문에 잠금장치를 별도로 설치했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밥도 마음 편히 먹지 못했던 거 같아요. 사이렌이 울리면 밥을 먹다가도 피해야 한다고 했대요. 바깥 노조원들이 정문 뚫고 들어온다는 신호라고.”

 특히 서로 잘 아는 동료들과 대치해야 하는 ‘구사대’로 동원되면서 겪은 심적 고통과 폭력 상황에서의 공포가 그를 압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루는 남편이 ‘오늘은 정문에서 파업 중인 동료들이랑 용역이 부딪혔는데, 용역이 소화기를 던져서 사람이 다쳐서 실려 나갔어. 회사에서 마스크를 나눠줬지만 아수라장 속에서 내 편 네 편 분간을 어떻게 해. 덩치 큰 용역들이 동료들을 막 두들겨 패는데… 나도 저렇게 당해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그러는 거예요. 그래 어디 숨어 있으라 했더니 그거도 안 된대요. 회사 측에서 한 쪽에 몰아넣고 계속 지휘를 한다고.”

그 이후부터 남편은 갑자기 아이들에게 운동을 시켜야 한다는 등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지난해 유성기업이 직장폐쇄 조치 내린 지 6일째인 5월 24일, 공장 안에 조합원들이 농성하는 중 ⓒ이명익

혼자 벽만 쳐다 보고… 갑자기 이상해진 남편

A씨의 이상증세는 심해졌다. “야간 조 들어가기 전에 집에 왔는데, 밤새 잠을 못 자요. 계속 혼자 벽만 쳐다보고 있는 거야. 그렇게 불면증이 너무 심해져 입원을 했는데 회사 동료가 찾아와서 퇴원하라고 했어요. 회사가 알면 문제가 된다고. 의사는 퇴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남편이 그냥 퇴원해버렸어요. 회사에 누가 되면 안 된다고.”

그런 상태에서 A씨는 계속 살인적인 야간노동에 시달렸다. 6월에는 연장근로만 109.5시간을, 7월에는 19일까지 49시간씩 일했다. 돌아오면 집 안에만 박혀 있었다. 원래 하던 운동도 그만뒀다. 파업 중인 동료들을 만날까 두려워서였다.

“남편 말로는, 사태가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대요. 유성에서 크게 파업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막 다치고, 일은 죽도록 해야 하고, 잠은 못 자겠고, 나가지도 못 하겠고 그러니까….”

이후 A씨는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결국 지난해 8월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A씨는 회사 측에 산업재해 신청을 냈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동료 직원들과의 왕따 및 부서장과의 다툼 등 개인 문제로 내용을 구성해 ‘적응장애’ 상병으로 최초요양신청을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해 11월 업무상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A씨 가족은 금속노조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산재신청을 했다.

“회사가 똑바로 진술만 해줬어도 승인을 받았을 텐데…. 그래놓고는 12월에 출근해서 성과급 나오는 거라도 받으라는 거예요. 그래 내가 (남편에게) 애원했어요. 회사 들어가지 말라고.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이 과정에 가족들은 홀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생활비와 남편의 치료비를 벌려면 B씨가 일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제가 일하러 나가 있으면, 애들이 불안하다고 계속 전화를 하는 거예요. ‘엄마, 아빠가 또 이상한 행동해. 어떡해?’ 하고.”

B씨의 몸엔 마비가 왔다. 친척들이 주는 도움으로 겨우 버텼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고 B씨는 말했다.

막내아이는 학교에서 한 심리검사에서 위험 진단을 받았다. “자살 충동 지수가 높게 나와서 학교에서 집으로 공문을 보냈어요. 애가 ‘엄마한테 말하면 엄마가 울 거 같아서, 그냥 검사할 때 솔직하게 내 마음을 말한건데…. 엄마, 나 잘못한 거야?’ 그러는데…그래서 아니라고, 너 잘못한 거 없다고… 했어요. 엄마 아빠가 안 좋은 모습을 너무 보여줘서 애한테 상처를 이렇게나 줬구나…”

A씨의 어머니는 지난 8월 6일 눈을 감았다. “요 1년 동안 아들 얼굴을 못 보셨죠. 보면 마음 아프시니까 못 찾아오시게 했거든요. 그러다 위독해지셔서 한 번 찾아뵀는데 그 이틀 후 돌아가신 거예요.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셨어요. ‘에미야, 내가 죽어서 A 아픈 거 다 가지고 가겠다’고.”(울음)

A씨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왔다. A씨의 발병 후 어머니는 “대학에 보낼 걸, 나 힘들다고 취업 보내서 우리 아들 발목을 내가 잡았다”며 늘 울었다 했다.

B씨는 “지난 1년 동안은 눈물도 안 나왔다”고 했다. ‘나마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단다. 인터뷰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 산재 승인을 받은 후엔 마음의 짐을 그만큼은 덜었다.

이상철 공인노무사(법률사무소·노무법인 이유)는 “이번 판정은 직장폐쇄 기간에 구사대로 억지로 동원되고, 공장에 고립된 상태에서 강제노동을 하면서 발병한 정신질환에 대해 사용자의 책임을 물은 것으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아빠 피하는 막내 “왜 우리 가족만 이렇게…”

그렇다 해도 앞길은 순탄치 않다. 남편의 병세는 여전하고, 가족의 생계는 막막하다. 평생을 일한 회사가 이들을 외면했고 사회안전장치는 없었다. 이들에게 손을 내민 건 동료 몇몇과 친척들뿐이었다. 회사가 원망스럽냐고 물었다. B씨는 “그저 지나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저 남편만 건강해졌으면 바랄 게 없다”고 했다.

다만 덧붙였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유성 노동자들 다들 정말 열심히 일하거든요. 그리고 다 같이 회사 식구잖아요. 그럼 회사가 감싸줘야죠.”

특히 아빠를 좋아했던 막내가 이제는 아빠를 피한다. 하루는 엄마에게 물었다 했다. “아빠는 회사에서 일하다 이렇게 된 건데, 왜 우리 가족만 이렇게 힘들어야 해?” 엄마는 아직도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대답은 엄마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사 제휴 = <노동과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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