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TA는 현찰, 대선은 투자, 교육은 명분
    [서평] 『fta 한 스푼』(우석훈 저/ 레디앙미디어)
        2012년 08월 12일 12: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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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종영된 <추적자>라는 드라마에는 걸출한 인물이 나온다. 검찰총장에게 반말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총리에게는 다른 약속을 파기하고 김치찌개 먹자고 너스레를 떠는 인물 서회장.

    한국 사회 30대 중반 이후 세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숨겨진 권력의 실체를 드러냈다. 한우그룹을 삼성으로 놓고, 서회장을 이건희로 놓고 보아도 무방하지 싶다. 작가는 문학적 상상이라는 재료를 넣어 ‘보이지 않는 돈의 권력’이 보이는 권력들을 어떻게 지배하는 가를 형상화했다.

    어쩌면 너무나 뻔 하지만 자주 망각된다. 돈이 권력을 생산하다. 그 권력은 정의와 사람의 생명마저도 짓밟을 수 있다.

    대한민국 권력의 상징 삼성의 이건희가 예전에 한 말이 있다. 2000년대를 들어설 무렵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경제는 21세기를 달려가는데 교육은 20세기에 머물고 정치는 19세기에 있다고.

    이제는 포털 검색에도 잘 안 나오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여러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참으로 희화적인 일이다. 정치를 그렇게 만든 것도, 교육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도 경제라는 한 가지 관점만으로 보기 때문인데 말이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21세기형 기술경쟁을 하고, 정치를 돈치로 만들어 원칙도 상식도 없는 19세기형 정치지형으로 만들고, 소수의 엘리트 중심이 아니면 20세기형이라는 족쇄를 채운 것은 이 땅의 자본가들이다.

    이건희가 말한 19세기 정치가 낳은 최근의 작품이 한미FTA이다.

    우석훈이 쓴 《fta 한 스푼》은 진행 과정의 문제, 동시다발 FTA라는 ‘노무현 컨센서스’의 문제, 무역을 통한 이익이라는 주제 등을 쉽고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경제학자로서의 관점, 무역 협상의 참여경험으로서 구체적인 이해, 한미FTA 통과 당시의 삭발로 보여지는 열정 등이 어우러진 책이다.

    원론을 넘는 구체적인 접근, 현실적인 대안 모색, FTA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FTA 관련 도서와 구별된다.

    그는 닥쳐올 고통이 상상의 범위를 넘어설 것이라고 보고 고질라로 형상화한다. 판타지와 영화요소로 해석해내는 우석훈의 독특한 접근법이다. 인터넷으로 읽어도 된다는 선입견을 넘어설 만큼 쉽게 읽히며 음모의 배경을 볼 수 있고, 전문적인 해석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논점이 남아있지 않나 싶다. FTA를 놓고 100년전의 중상주의라 비판하며 100년 전의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을 내세우는 것은 헌 것이라 비판하며 헌 것의 잣대를 댄 것은 아닌가?

    현실적 방법으로 내세운 ‘파기 후 재협상’은 문제는 파기하고 협상이라는 기대를 심어주지만 막상 재협상의 실체가 모호하다.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협상의 본질이 바뀌기 전에는 주체를 바꾸거나 야당이 집권한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스스로의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하나의 과제를 또 하나의 이상적인 상황의 과제로부터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통상에 대해서 어떤 전문가도 쉽게 답을 내놓기는 힘들다. 그럴 때는 좌파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좀 단순화하여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 때로는 본질에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이 이건희 입장에서는 잘 보인다. 관세가 인하되면 가격이 싸지거나 이윤이 높아져 이익이 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사실은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기업가의 손’일뿐이다.

    그들은 FTA에서 확실한 현찰을 본다. 반면에 한국 상황에서의 대선은 <추적자>에서 잘 드러냈듯이 영원한 권력자인 재벌총수 입장에서는 선택의 과정일 뿐이다. 조금 불편하거나 조금 손해를 보거나 정도일 것이다.

    극우파가 몰입하는 교과서와 전교조의 문제는 기업가에게는 부차적인 문제다. 아무리 교육을 민주적으로 받아도 현실에 들어오는 순간 경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회라는 것을 한국의 재벌들이 모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FTA, 국가와 국민 이익 아닌 기업과 재벌의 이익일 뿐 

    언론과 정부는 재벌들의 현찰인 FTA를 놓고 국익이라 표현한다. 개발독재 시대에는 이익은 국가적 부로 편재되었다. 포철, KT, 한전 등이 그때 만들어진 공기업들이다.

    지금은 이익을 삼성, 현대, 효성, 롯데 등이 가져간다. 그러니 지금은 FTA를 두고 말할 때, 국익이 아니라 국손 혹은 국실로 말해야 한다.

    열매는 기업들이 가지고, 문제가 생기면 국가가 배상한다. 1998년 IMF, 2008년 금융위기 때 국가는 세금을 몰아넣고, 기업들은 위기 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익을 보았다.

    ISD의 문제도 결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려다가 문제가 생기면 국가가 천문학적인 금액을 무는 것이다. 복잡한 FTA이익의 셈법이나, 우석훈의 국부론 식의 셈법은 어쩌면 너무도 뻔 한 소수기업의 이익주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기본적인 발상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싶다. 이미 글로벌한 기업들에게 더 큰 혜택을 준다고 국민경제에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익을 본만큼 사회로 환원시키는 시스템을 국가적으로 구축하면 된다.

    FTA 등 국가적 지원을 엎고 기업의 이익을 내더라도 공적, 사회적 이익으로 환수한다면 문제는 조금 달라 질 수 있다. 법인세 인상, 김상봉이 제기한 주식회사의 경영권의 공적 운영 등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국내 생산유발 효과가 큰 공기업, 국민기업을 육성하는 것도 역발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ISD등의 배상 건은 이익을 본 해당기업에서 우선적으로 배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리된다면 재벌들이 나서서 ISD 조항 폐지 주장을 펼 수도 있지 않을까.

    소비에서의 주권 행사가 생산의 주권 찾는 길일 수도 

    조금 더 나간다면 우리 사회체제의 변화를 본질적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은 어쩌면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생존전략일 수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폭주기관차는 사실 폭파직전이라는 증후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런 속에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은행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신용 은행이 더 큰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도시에서 생기는 생활협동조합은 소비에 신뢰와 더 큰 효용가치를 불어넣고 있다. 아직 국내에서는 제한적으로 인정되지만 미국에서는 발달한 소비자의 권리는 폭넓게 보장받아야 한다.

    왜곡된 언론에 대한 언소주의 운동은 시장이 사실은 소비자의 권리 범위라는 것을 폭발적으로 증명했다. 불매운동의 주체들에 내린 공권력의 신속하고 광범위한 압력은 좋은 증거가 된다.

    어렵고 복잡한 것이 사실은 작고 명확한 것을 바꿈으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 생산과 소비에 모두 소외된 시민들이 소비에서만 주권을 찾아도 생산에서 주권을 찾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있었던 200만 자영업자들이 롯데 불매운동을 선언하는 날부터 롯데의 매출이 0.001%정도씩 매출이 줄어들었다면 롯데는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야 했을 것이다.

    기업들이 자기 이익에는 충실하고 관료들은 그것을 따라 만든 한미FTA를 바꾸는 것도 어쩌면 소비자 운동에서 시작 될 수 있다. 10%도 안 되는 농민들의 움직임이 FTA에 영향을 미치는 데, 20%의 소비자가 뭉친다면 FTA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필자소개
    독자. '리더스가이드'에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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