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룰(rule)이 필요한 이유
    [왼쪽에서 본 F1] 한국 정치와 벨기에 그랑프리 사고
        2016년 11월 22일 10: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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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F1의 화두 중 하나는 바로 막스 베르스타펜이라는 드라이버입니다. 이미 지난해 만 17세의 나이로 F1에 데뷔하고 각종 ‘최연소’ 기록을 연달아 갈아치우며 주목받았지만, 2016년에는 시즌이 진행되던 중 이례적으로 최상위권 팀인 레드불로 승격된 뒤 67년 F1 역사를 새로 쓰는 그랑프리 최연소 우승 등 놀라운 기록을 작성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11월 14일 치러졌던 브라질 그랑프리에서는 앞도 잘 보이지 않는 폭우 속에서 남다른 드라이빙 스킬로 연이어 추월을 성공시키며 포디엄에 올랐습니다. 이제 F1 팬이라면 그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아일톤 세나나 미하엘 슈마허 등 F1 최고의 전설적인 드라이버와 베르스타펜을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2016시즌 중반 이후 베르스타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기술’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문제는 다른 부분에 있었습니다. 베르스타펜이 다른 드라이버들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태도’ 문제가 논란의 출발점이었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드라이빙은 경기에서 동료들과의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때로는 어마어마한 사고가 날 수도 있었던 장면도 있었습니다.

    문제를 더 확대시킨 것은 F1을 주관하는 FIA가 베르스타펜을 감싼다는 인상을 준 것입니다. 다른 드라이버라면 엄중한 처벌이 주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베르스타펜은 유독 페널티를 받지 않고 넘어가거나 이렇다 할 경고도 없이 사건이 지나가곤 했습니다. 때로는 너무 위험한 장면을 만들어냈는데도 스튜어드, 즉 경기의 심사관들이 어떤 조사도 하지 않으면서 논란을 부추겼습니다. 베르스타펜은 ‘내가 처벌받지 않았으니 잘못이 없다’는 반응을 계속해 비난의 화살을 받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요? 적지 않은 전문가가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바로 ‘룰( rule )’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천재적인 드라이빙 능력을 갖췄지만 여러 가지 논쟁의 중심에 선 베르스타펜

    천재적인 드라이빙 능력을 갖췄지만 여러 가지 논쟁의 중심에 선 베르스타펜

    따지고 보면 룰이 없어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FIA는 오래전부터 모든 모터스포츠에 적용되는 대원칙(말하자면 법체계에서의 헌법과 비슷합니다)을 제시하고 있고, 이런 대원칙에서 파생된 다양한 규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Formula 1’의 규정이 의미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규정’이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규정들은 F1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의 부재로 베르스타펜의 문제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다른 스포츠에서도 자주 나오는 얘기지만, ‘판정 논란’에 대해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곤 합니다. F1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연히 규정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이해관계와 상황 판단에 차이가 있고, 완전히 객관적인 판단이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보통은 애매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대해 암묵적 동의가 생기지만, 베르스타펜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이런 문제가 더 크게 불거질 수 있습니다.

    FIA나 F1의 운영을 책임지는 쪽의 입장에서는 베르스타펜은 훌륭한 보물입니다. 엄청난 인기를 끌 수 있는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고,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동차 경주와 그랑프리의 100년 이상 역사에 찾아볼 수 없었던 위대한 드라이버가 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든 이슈를 만들고 어떻게든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베르스타펜의 편의를 봐주는 쪽으로 판단 기준이 옮겨가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얘기가 나올 수준이 아니라면 말이죠.

    법과 원칙이 존재하지만, 대의를 위해서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고, 눈감아 주는 일이 많은 우리네 사회의 현실과도 꽤 비슷해 보입니다. 정부 차원에서 국가 경제를 위한다는 핑계로 중대한 위법을 저지르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던 재벌 총수를 사면해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공직을 수행할 수 있을까 믿기 힘들 정도의 범법 사실이 즐비한 사람들이 고위 공직자의 자리를 차지하곤 합니다.

    법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법이 제대로 적용되고 공정함이 유지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베르스타펜을 제대로 벌하지 못하는 F1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나마 베르스타펜은 만인이 인정하는 재능이라도 있긴 합니다만…)

    베르스타펜과 얽힌 일이 단지 특정 개인에 대한, 아주 특별한 일이라고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F1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규정과 제도, 시스템이 존재하지만 이를 적용하고 운용하는 사람의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한 예가 많습니다. 규정이 의도하는 바와 관계없이 이를 운용하는 사람의 기계적인 해석 때문에 애초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2009년 레이스카가 만드는 다운포스(공기역학적인 효과에 의해 발생하는 차를 아래로 누르는 힘)를 줄이기 위해 대대적인 규정 변화가 이뤄졌습니다. 약간의 다운포스를 더 얻기 위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해, 중소형 팀들이 너무 심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운포스를 만드는 연구 개발 비용을 강제로 제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주의 정책이 도입되는 것과 비슷한 시도였습니다. 다운포스를 잃는 대신 속도가 크게 감소하는 것을 막고, 친환경적인 요소를 추가한다는 의미에서 ‘운동 에너지 재생 시스템’인 KERS가 도입된 것도 이때입니다.

    그러나 순진하게 규정 변화의 취지를 따라 다운포스에 대한 연구 개발을 줄이고, KERS를 도입한 팀들은 2009시즌 초중반까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일부 팀들이 친환경적인 KERS 도입을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규정의 빈틈을 파고들어 규정 변화의 취지와 정반대로 다운포스를 대폭 증가시키는 ‘더블-덱 디퓨저’ 등을 사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편법은 당연히 관계자들의 반발을 샀고 FIA의 최고 법정이랄 수 있는 국제 모터스포츠 평의회(WMSC)의 법리 공방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아쉽게도 애초에 이 규정 변화를 운용하는 사람들의 실수가 누적돼 애초의 취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인명 사고를 불러올 뻔했던 2012 벨기에 그랑프리의 첫 랩 사고

    큰 인명 사고를 불러올 뻔했던 2012 벨기에 그랑프리의 첫 랩 사고

    일단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제대로 된 통제를 할 수 있는 든든한 시스템이 없다면, 애매한 빈틈을 파고드는 사람은 더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애매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하나둘 추가할 때마다 일이 복잡해지겠지만,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더 큰 손해를 보는 상황은 피해야 합니다. 좀 더 속도가 빠르고, 좀 더 사고 위험성이 높고, 결과적으로 좀 더 인명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큰 모터스포츠에 더 복잡하고 장황한 규정이 준비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리고 규정과 시스템이라는 ‘룰’이 만들어졌다면, 그것을 제대로 운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하게 우리말로 ‘규칙’이라고 쓰지 않고 무리해서 영어 단어 ‘룰(rule)’이란 말을 꺼내 든 것은, 룰이라는 말이 ‘다스린다’는 의미의 동사로도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잘 만든 시스템이 필요하지만, 사람이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스템이 만들어진 취지를 잘 살려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의 정치는 대혼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몰랐고, 저 역시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뚜껑을 열어 무엇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되짚어보면 상황은 이보다 나쁠 수 없는 대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충분한 시스템이 없어서만 문제가 이렇게 커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더 강력하고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룰도 필요하겠지만, 기존에 있는 룰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지켜지지 않을 룰이라면 만들 필요가 없겠지요.

    이번 문제의 핵심에 있는 정치인들을 베르스타펜의 경우에 빗대는 것은 조금 미안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베르스타펜이 F1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없으니까요. 정치권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받아야 할 수사와 처벌을 피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시스템을 갖추고 룰을 제대로 운용해 바른길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크나큰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2012 벨기에 그랑프리의 첫 랩 사고에서는 자칫하면 두 명의 월드 챔피언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을 뻔한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레이스 스타트 직후 속도를 높이던 로망 그로장이라는 드라이버가 규정에 어긋나는 움직임으로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일단 사고가 벌어진 뒤에는 다른 드라이버들이 손 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른 드라이버에 대한 배려 부족이 더해진 규정 위반은 민감한 레이스 스타트 상황에서는 너무나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로장은 사고가 일어난 후 마치 ‘양쪽 사이드 미러를 동시에 확인할 수 없었다’는 의미의 발언으로 한 번 더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동료들은 ‘그런 능력이 없으면 F1에 참가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로장은 다음 경기인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참가가 금지되는 최고 수준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사고를 일으킬지 미리 알 수는 없었겠지만, 뒤늦게라도 사태를 수습한 시스템의 운용은 합당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로장이 일으켰던 것과 같은 수준의 어이없는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스템에서도 비리와 부정을 막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이 존재합니다. 일단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지만, 시스템 보완과 함께 기존에 있던 룰에 따른 조치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로장이 일으킬 뻔했던 참사를 막기 위해서 룰이 엄격하게 적용됐듯이, 우리나라의 대혼란을 수습하고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해선 우리나라에도 더 엄격한 룰의 적용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미처 그런 룰을 따를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수습하기 힘든 더 큰 혼란을 막으려면 말입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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