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러리즘, 국가주의
    그리고 가면의 미학에 대하여
    [아트살롱]시민성의 미학, 가면 들추기에 맞서는 것
        2016년 11월 21일 10: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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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예술잡지 <B-art> 40호에 실린 글을, 잡지의 허락을 받아 수정하여 기고한 글입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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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1월 13일 파리에서 IS에 의한 테러가 발생했다. 파리 테러가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4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IS에 비유한다. 요약하면 IS가 복면을 쓰듯 시위대도 그럴 수 있다고 하며, 시위대에 테러리스트가 섞여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에 <월스트리트저널> 서울지국장 알레스테어 게일(Alastair Gale)은 대통령의 발언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남한의 대통령이 마스크를 쓴 자국 시위대를 IS에 비교했다. 정말이다.”라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두 사건 사이의 공통분모는 정말 IS일까? 아니다. 두 사건의 공통분모로 봐야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의 재부상’이다. 새로운 논리로 재구성된 국가주의(애국 이데올로기)의 부상 말이다. 파리 테러 이후 파리 시민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질서정연하게 축구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이런 점에서 징후적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이전의 국경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개념이 흐려진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곧장 국가가 소멸된다거나 국가개념에 위기가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는 새로운 형태로 재무장하게 된다. 자본의 세계화라는 흐름을 타면서 결정권을 가진 소수의 실세들이 대의정치를 빌미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재창출하기 위해 지구적 자본(경제)의 흐름과 합류한다.

    이제 국가는 새로운 형태의 정경유착으로 세계화라는 환경 변화에 나름의 생존 전략을 펼친다.(1) 국가는 외부의 적에 맞서 내부의 시민을 보호하는 예전의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메인 사진

    19일 광화문광장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의 모습

    반세계화의 세계화 그리고 치안의 부상

    시장이 개방되고, 그에 맞춰 국가권력의 형태가 달라지면서,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는 반세계화의 세력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반세계화 세력 역시 세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테러단체도 세계화된 반세계화 세력이지만, 그린피스 등의 다양한 NGO단체 역시 세계화된 반세계화 세력이다. 이러한 세력은 국가 내부의 소수 결정권자와 지구적 자본의 공모관계를 위협한다. 물론 이 공모자들이 반세계화 세력을 좌시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간주되는 세력들을 도매금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려든다. 이제 특정 국가의 정치세력은 이러한 위협 세력을 발견하기 위해 ‘감시와 검열’의 기술을 발전시키고 이들을 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치안의 기술’을 발휘한다.

    전통적으로 외부의 적이 내부로 침입하는 것을 방어하는 일은 군대가 하는 일이었다. 반면 범법자와 같은 내부의 적 또는 간첩이나 테러리스트처럼 내부에 숨어든 외부의 적을 발견하고 처벌하는 일은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과 국정원)의 주된 업무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각 국가마다 경찰력이 증강되는 것도 예의주시할 일이다. 그런데 이들이 행하는 검열과 감시는 정작 위법 또는 위헌 아닌가? 이런 의문에도 경찰은 보란 듯이 자신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폭력은 시민에게 매우 직접적이다.

    경찰의 폭력은 이중적이다. 어떤 경우에는 적법한 폭력을 행사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초법적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비판에 대하여≫의 벤야민에 따르면, 경찰들은 ‘법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폭력 또는 강제력(처분권)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강제력을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스스로 설정하는 권한(명령권)도 갖고 있다.

    예컨대 경찰은 사람들의 권리를 무례하게 침해할 수 있는 권한은 없지만, 아주 민감한 사안, 즉 비밀경찰이 하는 것처럼 국가에 위협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은밀하게 자신의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벤야민은 이것을 경찰의 수치스러움이라고 하면서, 경찰이 법정립적 폭력(초법적)과 법보존적 폭력이라는 이중의 폭력을 행사한다고 지적한다. 경찰은 권리를 수호할 수도 있고,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는데, 후자가 시민에게는 매우 치명적이다.

    용산

    용산철거민 참사 당시의 모습

    미누의 추방과 용산의 철거라는 두 사건을 보자. 주거권 문제를 주장하며 생존을 위해 투쟁을 하던 용산의 주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었는데, 이들의 주요 임무는 ‘대테러 진압’이었다. 정당한 권리 표현을 하는 시민들은 주거권 보장은커녕 생명권까지 박탈되고 말았다. MB정권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추방을 당한 외국인 노동자 미누 역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인권 운동을 하던 인권운동가였지만, 국가가 보기에는 그저 외부에서 유입된 불온한 이물질에 불과했다. 그는 그 어떤 국제-국내법적 보호조치를 받을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고 즉각 추방되었다.

    이 두 사건 모두 치안유지라는 명목 하에 내부에 잠입한 외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새롭게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국가는 자신의 경계를 재확립하고 견고히 하려는 방어적 폭력을 펼친다. 국가는 공포의 얼굴로 우리 옆에 서 있다.

    이렇게 치안의 논리는 안보를 위협하는 공포와 쌍을 이루면서 국가의 폭력을 더욱 강화한다. 즉 국가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더 공포스러워진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빌리지>(2004)로 공포와 폭력의 정치를 설명한다.

    <빌리지>는 20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조성한 18세기 풍의 폐쇄적 마을을 무대로 삼는다. 이 마을이 유지되는 비결은 무엇일까? 1) 마을 원로들이 제작하여 마을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 ‘괴물’과 2) 그 괴물이 벌인 것으로 ‘조작된 내부의 사건’들 그리고 3) 괴물을 둘러싼 ‘허구적 이야기(fictional narrative)’다. 마을을 유지하기 위한 공포는 내부에서 제조된 것이다.

    이 공포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증폭되면서 주민들은 폐쇄적 안전지대에 고착된다. 스스로 벙커로 걸어 들어간 시민들은 자신이 누릴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한다. 그리고 이 공포를 위협한다고 매도된 불온한 존재들을 자발적으로 제거하려든다. 치안의 논리는 배제와 포함의 경계를 강하게 그으며 공동체의 경계를 다진다. 마찬가지로 공포를 제조하는 국가는 안전을 팔고 권리를 사들여 자신을 보존하는 자기보존 장치다.

    검열: 허구적 공포와 예방적 폭력

    직접적으로 발생한 폭력을 매번 상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보다 공포를 ‘발명’하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순응하고 서로 감시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통치술이다. 이는 사회적 비용의 효율성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사회적 비용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면 될 테니까. 중요한 것은 기존 권력의 유지와 존속의 효율성이다.

    공포와 순응의 순환을 원활히 만드는 통치술이 바로 검열이다. 검열이란,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파하기에 앞서 권위 있는 기관이 해당 메시지의 검사를 강제하고, 그 검사를 통해 메시지를 금지하거나 메시지의 내용 혹은 그 대상을 제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한조치가 사전에 이루어지면 사전검열이고, 사후에 이루어지면 사후검열이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의 검열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조치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갈등의 대상인 메시지가 대중의 손에 넘어간 이전인가 이후인가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2)

    검열은 권위를 가진 편에서 수행하는 일종의 예방적 폭력이다. 검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상에 공포를 불러들일 ‘것 같은’ 불온함이다. 그래서 검열은 불온한 메시지를 남길 ‘것 같은’ 사람들의 리스트 같은 걸 즐겨 만든다. 이 리스트를 작성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고 제거하는 것, 그리고 등장한 불온함들을 처리하는 것이 검열기구가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국가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검열의 테크놀로지를 발명하고 이 테크놀로지로 재무장한다. 검열의 기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세계화에 반하는 힘이 세계화되면서 최근 발명된 새로운 검열의 테크놀로지는 이전과 많이 다르다.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에 따르면, 최근의 저항은 영토 없는 저항 또는 탈영토화된 저항의 형식을 띤다. 테러리스트와 난민이 비슷하게 엮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 다 모두 일상 속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내부에 들어온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적이다. 이들은 미디어와 웹의 지구적 흐름에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정체를 숨긴 채 우리 주변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9・11테러 이후 한국 사회는 내부에 스민 또 다른 외부의 적을 관리해야 했다. 간첩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도 관리해야 했다. 한국은 이중의 불온함을 관리해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안보를 위협하는 적은 중층적이 되었다. 이 중층적 안보문제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정작 안보를 위협하지 않지만, 국가에 의해 또는 자본에 의해 불온하다고 매도된 사람들, 정당한 권리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함께 관리되기 시작한다. 용산 철거민이 그랬다. 그들은 난민과 함께 사는 곳이 일정치 않거나,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불온한 테러리스크가 되었다.

    이 불온함을 가려내려고 최근의 두 정권은 엄청난 검열의 폭력을 행사했다. 사찰정부가 별명이었던 MB정부는 용산과 미누를 넘어 미네르바와 김종익에게도 그러한 폭력을 행사했다. 이어서 박근혜 정부는 선거조작 의혹을 간단히 무시하더니 이탈리아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하였고, 카카오톡 개인정보 열람 가능성으로 인해 2014년 대대적인 사이버망명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 사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카카오톡 대표 사임의 의혹으로 이어지고 있다.

    ≪음모론의 시대≫에 따르면 책임 당국이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거나, 공론장이 제대로 된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음모론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증가한다고 말한다. 검열은 그런 점에서 개인의 자유 침해를 넘어 민주주의 자체의 붕괴를 의미하며, 음모론의 부상은 그 사회의 위기를 드러내는 시금석이다.

    이 연장선에서 박근혜는 우리 안에 IS가 있다는 식의 표현으로 불안과 공포를 조성한다. 다음 순서는 불안과 공포의 제거를 명목으로 시민들을 투명하게 만들려고 각종 감시와 검열을 수행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 정작 투명해야 할 쪽이 정작 자신들의 몸을 철저히 숨기고 있고, 사생활을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노출을 강요하는 형국이지만, 이것이 강요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오면, 그래서 시민들이 국가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투명해지려는 의지를 발휘한다면, 권력은 더할 나위 없이 공고해진다.

    ≪권력이란 무엇인가≫의 한병철에 따르면 가장 성공적인 권력은 타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예” 하도록 만드는 힘이라지 않은가. 이런 권력은 심지어 타자에게 자유(롭다는 느낌)마저 부여한다. 이러한 권력에는 장애가 없다.

    백남기

    백남기 농민이 직사 물대포에 쓰러진 모습

    훈육된 자기검열: 나는 불온하지 않아야 한다.

    내부에 존재하는 불온한 외부, 국가를 의심해야 할지, 내 옆의 이웃을 의심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들, 북에서는 수소폭탄이 터지고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난 상황에서 북한산에서는 알카에다 소속으로 보이는 인도네시아 사람이 구속되는 등 불안은 가중된다. 이쯤 되면 우리 안의 불온을 제거하려는 데 협력하고 싶은 충동들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안보와 안전이라는 햇살을 비추자, 나그네는 자기 옷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지나가는 다른 나그네에게도 더우니 옷을 벗으라 한다. 그리고 옷을 벗지 않는 나그네들을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웃을 향한 공포는 이렇게 시작한다.(3)

    자발적 복종의 흐름을 타고 다양한 감시와 통제 권력이 일상에 연착륙한다. 푸코의 팬옵티콘은 연착륙한 구식의 감시체계다. 최근은 판-진옵티콘(Pan-synopticon)이 대세다. 단순한 공간적 차원의 감시가 실시간 감시와 만난 것이다. 이제 모든 장소에서 실시간으로 감시와 검열이 이루어진다. 버스에 카메라를 달고 위반차량을 단속하는 것도 모자라, 최근 암행 순찰차라는 구상도 등장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감시체계의 실시간화와 무관치 않다. 기술의 승리를 찬양하며, 새로운 감시체계는 일상 속으로 무혈입성한다.

    고도화된 감시체계의 발달 덕에 안전에 대한 감각만큼이나 불안에 대한 감각도 증폭된다. 불온함과 위반의 범주에 내가 포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이 불온하지 않음을 실시간 점검해야 한다. 자기검열의 일상화와 습관화가 등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기 검열은 취업전선에도 등장한다. 취준생들은 자신이 기업에 불온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기업을 위한 인성으로 무장해야 한다. 삼성직무적성검사인 쥐쌋(GSAT), 현대자동차그룹의 인적성검사인 흐멧(HMAT) 등을 넘어 다양한 인성검사들이 판을 친다. 국가는 아예 인성교육 자체를 공교육을 통해 추진하고 있다. 결국 취업과 교육에서 인성과 적성을 계량화하고 데이터화 하면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내가 적합한 존재인지, 내가 제대로 된 톱니가 될 수 있는지, 과연 나는 통과될 만한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재점검해야 한다.

    이는 사전 검열도, 사후 검열도 아닌 습관화되고 자동적인 실시간 자기 검열이라는 자발적 훈육이다. 여기에 생활기록부까지 더하면, “나는 데이터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언만은 아니다.

    간첩, 테러리스트, 난민, 시위대는 국가가 쉽게 ‘데이터화 할 수 없는 불온분자’다. 이들을 가려내는 검열은 저들을 데이터로 포획 또는 추방하기 위한 장치이다. 판-진옵티콘이 훈육된 자기 검열과 함께 작동함으로써 국가는 짱짱하게 돌아간다. 시민들은 이제 “국가를 욕망하고, 국가가 욕망하라는 것만 욕망하고, 국가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려 한다.” 기꺼이 국가의 톱니가 된다. 나는 불온하지 않아야 한다.

    벤데타

    탈데이터화(dedatalization): 가면의 미학

    “나는 차라리 불온한 편이 더 낫다. 시스템의 톱니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푸코를 살펴보시길 권한다. 푸코는 ‘존재의 미학’을 언급하면서 사람들에게 그저 그렇게 통치되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요구한다. 그런 존재가 바로 주체이며, 주체는 자기 삶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미학의 현대판은 데이터를 벗어나려는 힘(dedatalization)이자, 판-진옵티콘에 맞설 수 있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시위대의 가면시위는 데이터가 되지 않겠다는 주체적 시민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며, 새로운 존재의 미학 또는 시민성의 미학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페르조나가 가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정작 우리는 늘 가면을 쓰고 있지 않나. 그런데 이 가면을 강제로 들추려는 자가 있다. 데이터화 할 수 없는 것들마저 끝까지 데이터로 까발리려는 포르노적 폭력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민성의 미학은 이 가면을 들추려는 힘에 맞서는 것이다. 가면의 에로스가 사적인 영역으로까지 파고들려는 저 공적 포르노의 폭력을 돌파해야 한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검열에 대한 저항, 즉 계량적이고 반인권적인 독재 포르노에 대항하는 시민의 미학적 에로스의 발현이다. 이 힘은 최종적으로 불온(不穩)과 온(穩)이라는 경계(최종적 검열의 폭력)마저 지워버리고 말 것이다. 그 힘이 지금 촛불을 들고서 광장에 서있다.

    <참고 글>

    1. 이런 변화 양상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블랙딜>인데, 그 중에서도 물 산업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과 다국적 기업 아쿠아페드(Aqua-fed)의 관계를 조명한 부분을 눈여겨보기 바란다.

    2.에마뉘엘 피에라, ≪검열에 관한 검은책≫, 알마, 2012, 9쪽과 위키피디아 ‘검열’ 항목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A%B2%80%EC%97%B4

    3. 그러면서도 특정 불안(삼성의 백혈병문제, 후쿠시마 원전과 관련된 정보들, 세월호 청문회 등)은 보도되지 않는다. 이런 권력을 묵시적 권력이라 한다. 침묵이 발휘하는 힘 말이다. 사회 지배계층에게 불리한 이슈를 아예 의제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무의사결정’(non-decision making)‘이라 부른다.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결정한다는 뜻이다. 언론 역시 그렇다. 언론은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결정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의식된 불온과 은폐된 불온이 있다. 이 역시 검열의 항목이다. http://m.media.daum.net/m/media/digital/newsview/20160109135426905 참고.

    필자소개
    예술잡지 <비아트> 에디터. 부산민주시민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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