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번의 좌절, 5번째의 기회
    박근혜 정권 퇴진 위해 11월 30일 민주노총 파업
        2016년 11월 18일 11: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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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은 11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오는 11월 30일 박근혜 즉각 퇴진과 박근혜 정책 폐기를 요구하는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기대가 크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란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이 말대로 돌아보면 우리 역사는 ‘위기에 대한 보수반동세력의 성공적 응전’으로 요약된다.

    그들에게 첫 번째 ‘위기와 도전’이었던 1945년 해방은 화려한 부활로 이어졌다. 일제 잔재는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은 것은 반공뿐이다. 10년 후 4.19 혁명이 일어났지만 불과 1년 후 5.16 군사쿠데타로, 1980년 서울의 봄은 전두환의 집권과 광주학살로 귀결되었다. 네 번째 기회였던 1987년 6월 항쟁은 어정쩡한 봉합으로 끝나면서 군부세력의 재집권으로 끝났다. 온갖 악행을 저질러 왔던 박정희도, 전두환도 죄 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역사의 4장면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악질 친일경찰 노덕술과 최란수(역사학연구소). 박정희 쿠데타. 광주학살. 87년 대선의 노태우)

    보수반동세력의 간교한 후퇴와 전진 속에 민주주의는 그들만의 것으로 한정되었다. 이어진 6월 항쟁의 주역들은 또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구가했다. 철저히 노동자를 배제한 정치를 펼쳤다. 그 과정과 형식은 진보적이었으되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배반”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노무현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새누리당 9년간의 집권이 지금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들이다.

    최근 다시 타오른 촛불로 시민의 역동성이 발휘되고 있다. 이것이 5번째 기회와 도전이 될 것인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보수반동의 적당한 응전으로 귀결되게 만들 것인가?

    87년 6월 항쟁 이후의 과제는 ‘또 다른 혁명’이었다. 촛불의 광장에 나온 도올 김용옥 선생은 “혁명을 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혁명하고, 우리의 제도를 혁명하고, 우리의 의식을 혁명하고, 이 모든 압제를 다 혁명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민주노총은 “단순한 하야 투쟁만이 아니라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 계급관계의 변화를 담보해낼 수 있는 체제적 변화, 정치구조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으로 민주노총의 향후 투쟁 과제가 설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기나긴 보수반동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거대한 전환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민주노총이 답할 때다

    “민주노총의 총궐기 집회에는 휩쓸리기 싫다” 12일 100만 명이 참가한 민중총궐기 촛불에 나온 민주당 국회의원의 말이다. 이 말에 그들의 진심이 담겨 있다. “민주노총 소속 전 사업장은 11월 중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총파업 투쟁에 돌입하며, 이를 위해 모든 사업장은 즉각적인 총파업 태세에 돌입한다.” 민주노총의 결정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특히 파업을 해야 할 노조 지도자들조차 정말 총파업을 할 수 있을까를 의심한다.

    민주노총은 무엇보다 먼저 시대적 과제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역사를 보면 일제 때부터 강한 생명력을 유지해 온 지배계급은 교활하고, 영악하다. 해방 직후 수만 명, 4.19 혁명 때 200여명, 광주항쟁 당시 2천여 명, 그리고 6월 항쟁 당시 박종철, 이한열 등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온 민중이 있지만 결론은 그들의 부활과 지배를 막지 못했다. 그것을 청산하는 역사적 대전환을 만들어 내야 할 책임과 의무는 민주노총의 몫이다. 그렇게 될 때 4번의 실패를 딛고 선 5번째 기회를 성공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은 노동을 멈추는 길 이외에는 없다.

    총파업을 떠올리면 누구나 96~97년 노개투(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 총파업을 말한다. 그러나 첫날인 12월 26일 파업에 참가한 노조는 85개 노조, 143,695명에 불과했다. 파업 지도부가 있던 명동성당에 모인 조합원은 4,000여명이었다. 그것이 12월 28일 173개 노조, 220,826명으로 늘어나고, 신한국당 앞 집회에 35,000명이 참가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질기게 이어진 총파업은 97년 1월 7일에도 186개 노조, 214,095명이 파업에 참가한다. 당시 민주노총 조합원을 대략 45만명 정도로 보면 절반 정도가 실제 파업에 참가한 셈이다. 노개투 투쟁도 한 번에 불이 확 붙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단 한 번에 횃불이 되고 들불이 되는 그런 마법의 투쟁은 없다. 희생을 무릅쓴 선봉에 선 노동조합이 나머지를 이끌어 냈다.

    96총파업

    96-97 노동자 총파업 당시 명동성당 앞의 모습(사진=금속노조)

    오랜 억압의 굴레를 넘어서자

    지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노동조합은 자본과 정권의 통제에 길들여져 왔다. 굳이 노동부의 통계를 보지 않더라도 주변에 파업을 하는 사업장은 거의 대부분이 신규 노조이거나 집중적인 파괴공작을 받은 노조였을 뿐이다. 통계를 보면 2006년 1,201,000일의 근로손실일수가 2015년 447,000일로 1/3로 축소되었다. 그만큼 투쟁이 줄어들었다는 단적인 예다. 지속적인 감소 추세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고 했다. 거의 20년 가까이 투쟁을 해 본 적이 없고, 정부와 자본의 탄압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대부분의 노조에게 즉각적인 총파업은 어쩌면 공포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지 않는 한 한국 사회의 개조는커녕 민주노총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민주노총은 11월 30일 총파업과 함께 “청년학생들은 동맹휴업으로, 교수들은 동맹휴강으로, 농민들은 일손을 놓고 농기계를 끌고, 자영업자들은 하루 철시로 함께하는 민중총파업으로, 모든 시민들이 함께하는 국민저항권 행사의 날로 만들어 박근혜 즉각 퇴진 항쟁에 결정적 국면을 만들 것입니다.”라는 방향을 정했다. 맞다.

    특히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는 곳만이 아니라 사무직 노동자들의 넥타이 행진, 편의점이나 각종 패스트푸드 알바 노동자들, 중소영세 업체에 근무하는 노동자 등 모든 노동자가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새누리당 김진태라는 작자의 오만한 말이다. 그러자 누군가가 “우리는 촛불이 아니라 들불이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이것은 광야를 뒤덮는 들불이 되어야 한다. 촛불 정도로 물러날 정도의 기득권 세력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투쟁의 선두에 민주노총이 서야 한다. 그래서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 노동의 가치가 살아오는 평등한 새 세상을 열어야 한다.

    이제 11월 17일 민주노총의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것이 오늘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 정책실장. 정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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