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충격과 위기의 시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시대의 우리
    정치적 '좌파'의 공백,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2016년 11월 17일 11: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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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확실성’이란 말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시대도 없을 듯하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예측은 번번이 빗나간다. 투표완료 직후 힐러리 클린턴(Hilary Clinton)의 당선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라던 미국의 유력 언론들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의 승리에 머쓱해 지고 말았다.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EU 탈퇴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던 영국의 전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이라고 달랐을까? 그에게도 전문가들은 있었을 것이고 나름 정밀한 데이터에 기초한 분석결과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국민투표의 결과는 예측대로 되지 않았고 그의 정치생명은 끝장나 버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것일까?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는 질서가 유지될 수 없는 ‘유기적’ 위기의 시기가 도래한 것일까?

    대부분의 전문가 예측이 빗나가는 시대에 사태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합리적인’ 이론에 기대 가설을 세우고 설명을 시도하고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예상한다고 해도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은 기존의 ‘합리성’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니 말이다. 어쩌면 이것도 ‘위기’의 한 측면일 수도 있을 게다. 전문가들도, 그리고 그들이 기대고 있는 ‘합리적인’ 기준도 위기에 빠진 체계의 일부분일 테니 말이다.

    그래도 뭔가를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체계의 효과 아래 있지만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래서 합리성의 기준조차 변화하는 거대한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이야기해야 한다.

    트럼프 충격,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유는 있었다

    트럼프는 선거 캠페인 내내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 참여한다는 것조차가 냉소적인 조소의 대상인 것 같았다. 그가 속한 공화당 내에서도 트럼프와 동류로 취급받는 것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오곤 했다. ‘천박한’ 그의 언행과 자신들의 기준으로는 예측이 어려운 부동산 재벌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내세운 정책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공유한 전후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 전략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진주만’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듯한 불간섭주의(고립주의)를 내세웠다. 아메리카 헤게모니 유지에 동반되는 군사적 비용을 인정하지 않고 전략적 파트너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한 미국우선주의를 표방했다. 미국 스스로가 주도해 만들어낸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가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양극화와 노동시장 불안의 문제를 미국만의 것으로 고립시켜 불만에 찬 노동자들의 인종주의를 부채질하기도 했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겠다는 당선되면 철회될 것이 뻔한 주장으로 외국인 혐오를 조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미국 선거기간 중 한 대학가에서의 트럼프 지지 모습

    외국인 혐오와 백인우월주의는 그 자체만으로는 힘을 갖기 어려웠다. 이것은 미국의 백인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빈곤과 노동시장 조건의 악화라는 토양이 없다면 힘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백인노동자들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신자유주의의 혜택을 나누어 가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은 더 클 수 있었다.

    여기에 한 가지 결정적인 요소가 더해진다. 워싱턴 정치에 대한 환멸이 그것이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제도권 정치인들은 노동자들의 생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그래서 평범한 미국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기성정치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더해진 것이다. 정치란 돈 가진 사람들만의 게임이 아닌가. 트럼프에 대한 지지보다는 클린턴으로 상징된 기성정치권에 대한 반감이 더욱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기성정치에 대한 환멸과 클린턴에 대한 반감이 전부는 아니었다. 미국 정치의 근본적 한계가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 공고화된 정치적 좌파의 부재가 그것이다.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좌파들에게 좌우파의 균형은 결코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다. 체계의 규칙을 인정한 좌파와 우파가 선거에서 경쟁하고 그럼으로써 불만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에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뚜렷한 구분이 없었다.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경쟁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자유주의’의 토양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정당의 경쟁은 ‘사이비’ 좌우 대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이라는 국제 관계는 사이비 대립 정도로도 갈등을 관리하고 체계 안으로 흡수할 수 있게 했다.

    통치 정당성의 토대 붕괴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정당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냉전 해체에 뒤이어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선언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최소한 형식적이나마 유지되었던 정당성은 ‘돈의 논리’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갔다.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즈(Charles Wright Mills)는 이미 1950년 중반 미국 사회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파워엘리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소수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미국 사회를 좌지우지했음에도, 그 시절에는 최소한 통치의 사회적 토대가 있었고 정당성이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그런 토대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간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적 보호는 시장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공격받기 시작했다. 자본의 자유는 극대화되었지만 노동의 권리는 형편없이 축소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에서 더 큰 좌절감을 맛보게 된 집단은 상대적으로 더 큰 권리를 향유하고 있었던 백인 남성노동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는 스스로가 유색인종 노동자들, 값싼 이주노동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체험과 불만만이 중요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위기의 봉합이 가능했다. 사회적 통합과 정당성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동안 그것을 대체하지는 못 했지만 땜질은 할 수 있었던 시장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상당 히 큰 힘을 발휘했다.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공적 서비스에 대한 공격과 사회의 시장주의적 개혁이 사회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 해체가 가져온 시장자유주의의 승리에 도취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것에 편승해 국가의 모든 공적 개입을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공격하는 이데올로기 전쟁이 수행되었다. 당연히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국가에 기대는 사람들은 ‘도둑’을 낙인찍혔다.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형태의 ‘계급전쟁’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얻는 자’와 ‘잃는 자’가 너무나 분명하게 구분되는 통치전략이 장기간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 시장의 논리가 스며들게 하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시장 원리로 규율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 상태는 불만과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봉합’이 아닌 ‘전환’이 요청되는 시기가 도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기적’ 위기의 시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유기적 위기의 도래

    위기의 증상이 드러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2008-9년의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의 실제적인 파산선고였다. 인종적인 갈등과 종교적 대립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빈발하는 도시폭동, ‘점령하라 운동’과 같은 조직화된 저항은 사회적 정당성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징표들이었다. 세계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파워블록 내부로부터 새로운 모색이 시도되기도 했다. 물질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비판적 논평은 파워블록 내부로부터의 위기감의 표출이었다. ‘녹색자본주의’, ‘인간적 자본주의’가 언급되기 시작했고 ‘공동체’에 보다 적극적인 가치고 부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의식이 전환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어정쩡하고 미온적인 ‘말들’만 있었다. 기후변화 위기에 대한 담론이 넘쳐 나지만 수많은 국제회의들의 결과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화석연료체제로부터 재생에너지로체제로의 전환은 종종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매년 초 다보스에 보인 정치인들과 경제계 거물들은 빈곤과 양극화,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 ‘감동적인’ 연설을 하곤 했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방법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금융정책과 재정정책 모두를 동원해 봤자 별효과가 없었고 ‘양적완화’이라는 산소 호흡기에 의해 연명하고 있는 세계경제에 대해 뚜렷한 치유책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기득권의 달콤함과 체제 도전세력인 정치적 좌파의 부재

    분명 근본적 위기가 감지되고 있었지만 파워블록의 대응은 미적지근했던 것이다. 왜일까? 두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초국적 파워블록이 낡은 체계 안에서 누리고 있는 기득권의 파이가 생각보다 컸다. 웬만하면 버리고 싶지 않은 기존 질서의 이득은 상당히 달콤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전환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자동차와 화석연료에 기초한 체계는 파워블록이 포기하기에는 안정적인 이윤의 토대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관리 가능했던 체계가 순식간에 위기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이함’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태가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위기를 드러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 전환을 제시하는 강력한 도전세력이 부재했다는 사실이 더 결정적이었다. 유럽처럼 중도좌파 정치세력이 체계의 한축을 담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좌파의 존재는 미국의 정책 노선을 결정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냉전의 종식과 신자유주의 승리 이후 그런 강력한 비판 세력, 최소한 견제 세력은 사라졌다. 냉전의 한 축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며, 유럽의 좌파는 스스로 시장의 원리를 수용하는 투항의 길로 접어들었다. 제3세계의 좌파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넘어 설 수 없었다. 드문 경우지만 게릴라에서 정치세력으로 변모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건 대안을 가진 정치세력으로서가 아니라 체계를 관리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균형’ 회복의 한축을 자임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균형이 찾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체계는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힘도 임계점에 다다랐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체계 안에서 체험되는 좌절과 불만이 저항으로 전화되는 시점에서 필요한 좌파적 정치적 통로는 막혀 버렸다. 응력이 쌓이게 된다. 지연된 체계 전환과 한쪽으로 기울어진 정치지형의 왜곡은 위기의 관리도, 위기의 극복도 아닌 모호한 단계에서 정체되어 있게 했다.

    이러한 조건의 결과는 체계 안에서 통제되거나 관리될 수 없는, 즉 예측하지 않은 사건들이 빈발하게 만든다. 체계 안에서 관리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대안을 제시하는 미래지향적인 운동의 형태로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의 맹아를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 비합리적이고 원한과 증오에 호소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포퓰리즘 성장의 비옥한 토양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경제가 신자유주의적으로 겨우겨우 관리는 되었지만 위기의 근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본의 이윤확보를 최종 목적으로 하는 경제 정책은 경제적 위기의 폭발을 지연시키지만 해결하지는 못하면서 사회적 위기의 깊이를 더해 간다. 사회적 통합과 유대의 근거가 붕괴되고 양극화에 따른 불만은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만은 좌우 균형의 붕괴, 그리고 이에 따른 정치적 대표성의 해체와 정치의 상품화 속에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다.

    현실에서 이 세 가지 위기는 서로 과잉결정 된다. 이러한 과잉결정은 위기의 근원이 인종주의에 기반한 포퓰리즘으로 ‘치환’되게 만든다. 우발성의 정도가 커진다. 불안정성이 커지고 예측 가능한 테두리를 벗어나는 사건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발성에 의해 생겨나는 포퓰리즘적 동원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원한과 적대감에 근거한 이데올로기적 동원은 체계의 조정도 대안적인 길의 모색도 아닌 순간적인 이데올로기적 치환일 뿐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회적 통합의 붕괴에 의해 일시적으로 권력을 장악한다고 해도 체계적 수준의 통합을 성취할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풀리즘적 정치인의 일시적 승리는 과잉 결정된 위기의 증상일 뿐이다. 더 이상은 기존의 방식으로 체계가 유지될 수 없다는 병리적 증상들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초국적 파워블록은 더 이상 ‘관리된’ 전환을 미룰 수 없다는 반성의 계기들로 받아들이게 될 그런 증상 말이다.

    하지만 파워블록이 주도하는 ‘관리된’ 전환, 구조적 변화가 아닌 기존 질서 안에서의 ‘변형’의 안정된 경로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기득권 세력은 기존 체계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파이에 도취되어 ‘조정’과정에서 내놓아야 하는 이익을 불필요한 비용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은 갈팡질팡하면서 전 세계를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가고 파워블록 내의 하위 분파들은 체계 통합보다는 개별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혼돈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모순이 우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포퓰리즘 현상이 더 큰 혼란으로 치닫는 것조차 장기적인 전환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잠깐 동안의 소동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트럼프의 미국이 몰고 올 혼란은 미국의 엘리트들이 관리된 전환을 준비할 시간을 마련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민중에게는 재앙이다. 미국의 민중, 그리고 미국의 대외 정책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나라의 민중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기가 될 것이다.

    자신들의 불만에 공감하는 정치적 입장에 강하게 이끌리는 대중들

    우발성이 꼭 극우적 포퓰리즘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우경화된 중도좌파의 텅 빈 공백지대를 메우려고 하는 새로운 좌파정당에 대한 지지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단 그렇게 되려면 미국과 달리 좌파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의 급속한 정치적 성장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지는 조직화 되어 있지 못하다.

    좌파의 부재는 아직 현재형이다. 극우 포퓰리즘은 원한의 감정이면 충분하다. 그들의 원하는 것은 그런 감정상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파는 감정 상태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불만을 정치적 에너지로 삼아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대한 비전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지도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 비전을 가진 좌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에 쌓여 있는 불만은 너무나 유동적어서 좌파든 우파든 기존 정치질서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불만에 공감하는 정치적 입장에는 강하게 공명할 것이다. 한 편에는 불만과 저항을 원한의 감정분출로 소진하고 낭비할 극우파의 정치가 있고, 다른 한 편에는 그것을 조직화된 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좌파가 있다. 결코 대안 세력이 될 수 없는 이 두 흐름 사이에서 파워블록은 ‘관리된’ 전환의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제레미 코빈과 버니 샌더스

    영국은 대중의 불만과 저항이 유동적이고 모호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한편에서 영국 노동자들은 ‘브렉시트’를 선택했다. 비록 브렉시트로 드러난 민심은 신자유주의 40년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그 저항감을 선취한 것은 노골적인 국수주의를 표방한 극우정당들이었다. 영국의 백인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불만을 외국인 혐오로 불러 내온 것이다.

    코빈

    다양한 사람들에 둘러싸인 제레인 코빈 노동당 대표

    그런데 바로 그 극우적 동원과 겹치는 시기 가장 불만이 높고 좌절하고 있는 청년층은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라는 좌파 정치인을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를 영국의 수권정당 중 하나인 노동당 당수로 선출했던 것이다. 물론 코빈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과 브렉시트에 표를 던진 사람들은 겹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무정형의 불만은 극우적 통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경로를 통해서도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시리자, 포데모스, 그리고 코빈에 대한 지지를 과잉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강조했던 것처럼 여전히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왼쪽은 공백지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좌파 정당에 대한 지지는 ‘사회주의’가 지지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아직은 극우적 포퓰리즘과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 민주당 예비경선 중의 버니 샌더스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나타난 버니 샌더스(Bernie Snaders)에 대한 지지가 코빈에 대한 지지와 겹쳐지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물론 급진적 자유주의자인 샌더스를 사회주의자 코빈과 나란히 놓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미국 정치 지형에서 샌더스 같은 정치인이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막강한 배경을 가진 기성정치인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샌더스에 대한 지지가 곧 자본주의 미국에 대한 비판의 정치적 힘으로 조직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샌더스가 지금 당장 채워 넣기에 정치적 좌파의 공백지대는 너무 넓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에 대한 지지와 코빈에 대한 지지의 사회적 토대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사람들의 마음과 샌더스를 지지한 열망은 쉽게 구분되기 어렵다.

    분명 샌더스와 코빈을 향해 표출된 지지, 그리고 포데모스와 시리자에 대한 지지는 좌파가 개척해야 하는 정치적 ‘공백지대’를 보여준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이다. 이걸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로 오인하거나, 그래서 이제 좌파 정치의 복원이 시작되었다고 과장하는 것은 금물이다. 여전히 신자유주의를 주도했던 초국적 파워블록은 유리한 패를 쥐고 게임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실

    이런 세계적 정치 지형과 한국은 무관할까?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과 영국보다 더 가혹하고 더 비인간적인 시장맹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 사회는 불만과 좌절로 가득하다.

    애초에 그러한 불만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신자유주의적 폭주기관차는 ‘민주화’라는 표지를 달고 있었다. 자신들을 민주화 세력이라고 생각하는 무늬만 진보인 정치세력이 사람들을 현혹해서 폭주기관차에 올라타도록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불만과 좌절은 더 강화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연료 삼아 속도를 올렸다. 도덕성과 사회적 연대 의식 같은 것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적자생존의 정글에 뛰어 들어 살아남는 것을 유일한 미덕으로 삼게 된 것이다. 좌절은 더욱 깊어진다. 하지만 좌절을 입에 올리는 것은 나약한 패배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지탄받았다.

    이렇게 쌓여만 가는 불만은 배출구를 찾지 못한다. 트럼프 현상과 브렉시트를 통해 드러났던 원한과 적대의 포퓰리즘이 일상의 파시즘으로 뿌리 내린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격을 ‘유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타자에 대한 혐오가 팽배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역시나 정치적 좌파의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좌파를 자처하는 자들은 북한식 사회주의를 여전히 믿는 민족주의의 변종이며, 이들과 달리 합리적인 사회주의를 표방한 사람들은 정치적 좌파의 공백지대를 개척하겠다는 계획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시장자유주자들과의 거래로 의석을 구걸하는 무능한 집단일 뿐이다.

    개별화되고 경쟁이 극단화된 한국 사회의 불만이 언제나 극우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건은 사람들 마음속의 불만을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표출하게 했다. 무정형이지만, 그래서 승자독식 사회의 타자에 대한 멸시와 원한으로 드러날 수도 있지만 불만과 좌절은 변화에 대한 열망의 형태로 폭발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18

    11월 12일 광화문 백만 촛불의 한 모습

    하지만 광화문의 100만 촛불은 샌더스와 코빈에 대한 지지처럼 단단한 실체를 가지지 못한, 정치적으로는 아직 무정형 상태에 있는 에너지 일뿐이다. 정치적 좌파의 자리가 비어 있고, 그래서 좌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위기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축소된다. 기존의 체계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유기적 위기의 증상들이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는데,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박근혜’ 퇴진을 최종 목표로 제시한다.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극우언론, 그리고 민주주의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동일시함으로써 지금의 사태를 조장하고 공모했던 더불어민주당, 박근혜의 실체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거기에 기생해서 이익을 취하던 새누리당의 비박계 정치인들과 나란히 ‘박근혜’ 퇴진‘만’을 외치는 ‘진보’정당을 지켜보는 것은 절망적이다.

    무엇이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인가? 무엇이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경계인가? 좌파의 정체성,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입장은 ‘이미 만들어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현실과의 대화 속에서 지금-여기의 실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변화의 힘을 끌어내려는 운동 속에서 만들어지고, 갱신되는 것이다.

    위기는 우리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기회

    위기는 기회라고 했나? 그러나 트럼프로 드러난, 브렉시트로 나타난, 박근혜 게이트로 경험되고 있는 위기는 ‘우리’가 아닌 ‘그들’의 기회다. 미국의 파워엘리트는 트럼프 4년을 기회로 보다 세련된 통치전략을 들고 나올 시간을 벌었다. 영국의 지배계급은 ‘극우파 선동에 놀아난 노동계급’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전개하면서 코빈으로 드러난 변화에 대한 열망을 무책임한 극좌파들의 선동으로 몰아붙일 것이 뻔하다.

    한국의 지배 정치세력들은 100만 촛불로 드러난 불만과 저항을 고작 대통령 퇴진과 새 대통령 뽑는 것으로 가둘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기꺼이 동의해주는 무늬만 좌파인 정치세력은 ‘우리’의 일부라고 말하면서 ‘저들’과 공모할 것이다.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고작해야 ‘개헌’ 정도로 가두는 데 공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60-70년대 폭발적인 형태로 표현된 새로움에 대한 열망,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열망을 ‘소비주의’적 욕망의 정치로 동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동원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봉합에 불과했다. 소비주의적 열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향한 폭주는 부채와 파산을 일상적인 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신자유주의적 ‘순환’은 그 막바지에 이르러 전환을 강요받고 있다. 체계가 관리할 수 없는, 기존의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의 발생이 말해 주고 있는 대로이다.

    이러한 위기와 전환의 시대 우리는 다시 60-70년대 새로운 사회운동의 목소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세대가 원했던 차이와 다양성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차이와 다양성을 소비주의적 욕망의 용광로 속에 넣어 녹여 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차이와 다양성을 부정하는 화폐적 가치라는 획일성이었다. 문제는 다양성과 차이는 화폐적 논리의 일원론(monism) 속에서 내파(implode)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내파가 또 다른 일원론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다. 내파가 밖으로 폭발하고 그것이 자본주의 이후를 실천하고 실험할 수 있는 다양한 운동들로 전화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모델을 따르지 않는 발전모델은 모두 이단시 하는 그런 획일주의와 일원론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길이 공존할 수 있는 그런 사회 모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전환이 아니라 작은 ‘혁명들’의 촉진할 수 있는 경제모델과 정치제도를 ‘상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미 그런 ‘작은 혁명’들은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다. 단지 여전히 우리가 붙들려 있는 시장자유주의의 획일성이 그걸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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